4.
바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하필이면 오늘, 윤병장하고 같은 불침번 조가 되었다. 당직사관이, 오늘 밤 03시경에 태풍의 중심이 지나갈 것이라며, 특히 주의하라고 경고하였다.
녀석과 불침번을 서게 되면 여러 가지로 힘들었다. 담배를 넉넉하게 준비해야 하고, 고약한 입 냄새를 견뎌야만 하였다. 게다가 녀석은 한 번도 지정된 자리에서 불침번을 선 적이 없었다. 그가 즐기는 장소는 격납고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막사였다. 그는 그곳에 숨어 담배를 피우거나, 구석에 처박혀 잠을 청하곤 하였다. 녀석이 구석으로 들어가면 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직사관의 불시 방문 전에, 녀석을 깨워서 데려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초유의 강력 태풍이 온 그 날. 녀석은 대범하기 그지없는 결정을 내게 통보하였다. 200m쯤 떨어진 공사장 임시 건물에 가겠다는 거였다.
몇 달 전부터 기내에 공사판이 벌어졌다. 무슨 공사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공사판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밥집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녀석은 그때부터 매일 그곳에 가서 밥을 때우곤 했다. 물론 사병이 밥집을 가는 것은 불법이었다. 걸리면 바로 영창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뻔뻔하게 거의 매일 들렀다. 그러다 보니 밥집 아줌마하고 엄청 친해졌다.
거의 30살 넘게 차이가 나는데도, 누나 누나 하며 밥집 아줌마한테 찰싹 달라붙어서 사제 밥을 우걱우걱 처먹곤 하였다. 우리가 이 사정을 잘 아는 이유는, 녀석이 자기 돈으로 절대 밥을 사 먹지 않는다는 거였다. 녀석은 졸병들을 번차례로 한 명씩 불러내어 같이 밥을 먹고는, 무슨 자기가 엄청 어려운데 특별히 너를 초청했다는 듯이 생색을 내며, 우리에게 밥값을 착복하는 거였다.
녀석이 사라진 거대한 격납고. 낡고 노란 래커칠이 덧칠해진, 3층 철계단 난간에 선 나는, 거친 바람이 쏟아내는 다양한 소리가 일어나고 가라앉고 변주하는 어둠을 마주하고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군용기들. 그들은 꺽 꺽 거리며 바람과 소통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빗물이 새기도 하였다. 관자놀이에서 눈으로 전해지는 가느다란 물방울 튀김.
나는 절망하고 있었다. 끝없는 심연. 내 몸을 불편하게 감싸는 끈적거림. 이런 느낌은 드러나지 않고 그 안에서 증식하고 내뿜으며 이상하리만치 공간으로 뻗어 나갔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난생처음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다가 순간 막무가내로 떠오르는 그리움에 젖기도 하였다.
그녀의 하얀 이마. 자그맣고 매끈한 피부. 얇은 입술. 반짝이는 귀걸이. 볼을 만졌을 때 느낀 차가움. 다갈색의 반짝이는 눈. 앙상한 어깨를 덮은 매끄러운 촉감. 단순하고 소박한, 명주로 만든 부드러운 안감. 나는 그 순간, 아마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본능적으로 찾으려고 애썼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나는 모슬린 천으로 만든, 바다 빛깔 드레스를 입혀주고 싶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현실이잖아요. 전, 저를 재정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미안해요.” 헬리오트롭 같은 보랏빛 스웨터를 입은 여인은, 반짝이는 첼로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긴 뭐, 내가 그 자리에서 뭐라고 하겠는가? 세상의 이치인 것을.
이런 가장과 몽환이 뒤섞인, 이상한 느낌은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세상을 삼킬 듯한 심한 폭풍 소리가 세상을 흔들었다. 나는 천천히 우의를 입었다. 철모의 끈을 바짝 당겼다. 마치 가시로 만든 화관을 쓴 것처럼 따가웠다. 나는 좁은 철문을 힘껏 열어젖히고 태풍 속으로 발을 들였다. 거친 비바람이 삽시간에 얼굴을 강타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공사장 입구에 도착했다. 임시 건물을 지탱하는 끈들이 공포 속에 덜덜덜 떨고 있었다. 속을 비추는 초라한 봉창이 흐릿하였다.
나는 칼을 꺼내 끈들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자르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한 끈들이 거칠게 반항했다. 나의 손을 휘어잡고 감돌아 지나가며 발악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마지막 끈까지 잘라 버렸다. 거추장스러운 줄들이 어둠 속에 사라졌다. 멋지고 시원한 바람이 내 귀를 휙휙 거리며 지나쳤다.
건물이 삽시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림의 강도가 거세어지더니, 심한 소리를 내며 꼬부라졌다. 이윽고 축구공처럼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짜부라지는 소리와 함께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
태풍이 지나가자 평화가 찾아 왔다. 윤병장은 공사장에서 300m나 떨어진 곳에 발견되어 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병 전역을 하였다. 한쪽 다리가 심하게 부러졌다고 하였다. 나는 14박 15일의 포상휴가를 받았다.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동료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점이 참작되었다.
나는 그때 느꼈다. 비로소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된 것을. 나는 한 마리의 귀여운 거미로 변신하였다. 나는 이제 육안과 심안, 영안 모두 바뀌었다. 입가에 거품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문에서 뭔가가 비죽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텅 빈 어딘가,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