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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드세요.

by 남킹

남자가 거울을 보기 시작했다면, 마음에 둔 여자가 가까이에 있다는 신호다. 그녀는, 대로변 사거리 한 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대형 할인점에서 일한다. 그녀는 작지만 풍만했으며, 못생겼지만 친절했다. 항상 미소를 띠며, 오고 가는 고객과 눈이 마주치기를 바랐다.


그는 마트에서 한 블록 떨어진, 낡은 오피스텔 원룸에 기거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물과 냉동 볶음밥, 김치를 사러 그녀가 서 있는 곳을 들르곤 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녀에게 빠진 건 아니었다. 반년이 넘도록 그녀의 존재조차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갓 튀긴 냉동 만두를 절반으로 잘라, 손바닥만 한 접시에 올려두고, 마침 지나가는 그를 미소 띤 얼굴로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그녀의 짙은 마스카라 속에 숨은 연민을 보았다. 게다가 두꺼운 화장 속에 감춰진 작은 얼굴에서 풍요로움을, 초승달처럼 휘어진 입꼬리를 머금은 미소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한여름 대청마루에 지긋이 누워 바라보는 장대비 같았다.


그는 무엇에라도 끌린 듯 그녀 앞에 섰다. 그녀가 만두 반 조각을 내밀었다. 그는 탐스러운 녹색 이쑤시개에 꽂힌 노릇하게 익은 갈색 만두를 받아 들었다.


“고객님, 뜨거우니 호호 불어서 천천히 드세요.”

발걸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돌아서기가 싫었다. 그녀는 다음 고객에게 나머지 만두 조각을 건넸다. 마트에는 항상 다양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만 특별 할인…. 폭탄 세일 중…. 대박 할인 중…. 고객님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고객님, 일 플러스 일 행사입니다….”

그는 외로웠다. 외로움은 아픔이었다. 그는 이른 나이에 결혼했으나 곧 헤어졌다. 자식은 없으며, 부모와는 아주 가끔 소식을 주고받았다. 뭘 예를 들자면,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다거나 조카 녀석이 미국 명문대학에 입학하였다는 등등 말이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그의 성격적 결함에 기인한 면이 적지 않다.

사실, 수년 전, 그는 홀연히 외딴 섬에 들어왔으며, 그 이유의 무게 중심은 다분히, 삶의 대부분에 관계되었던 인연을 자르거나 적어도 무시하기 위함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세월이 갈수록 극단적인 에고이즘 성격으로 바뀌는 자신을 당혹스럽게 바라다보곤 하였다. 분명 이건 슬픔이고, 어떤 면에서는 삶을 지배했던,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외로움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헤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마트를 어떻게 나갔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좁은 원룸에 들어서자마자 쇼핑백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서둘러 거울을 집어 든다. 온전했던 젊음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고통의 조각들은 실타래처럼 엮인다. 거울에 새겨 든 무표정한 남자. 얼이 빠진 듯한 표정. 흐릿한 눈동자. 산 날은 아프고 살아야 할 날은 무겁다. 눈을 홉뜨며 길게 한숨을 낸다. 짙은 호흡 속에 퍼덕이는 연민. 그는 의자 등받이에 자신을 걸친다.


그녀를 기억한다. 생경하고 낯선 자신에 깃든 설렘. 하지만 무엇인가 난처한 것에 맞닥뜨린 것처럼 곤혹스러움이 앞선다. 왜냐하면, 그의 가슴에는 한목소리만 들려왔기 때문이다.

”고객님, 뜨거우니 호호 불어서 천천히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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