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커플 _ 아무거나의 저주

by 남킹

EP 001. "아무거나"의 저주

"저녁 뭐 먹을까?"

수현이 침대에 대자로 뻗어 폰만 만지작거리는 지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지훈은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아무거나."

수현의 미간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저놈의 '아무거나'는 연애 초반엔 쿨해 보였지만, 3년 차에 접어든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하고 짜증 나는 네 글자였다.

"그래, 아무거나. 그럼 떡볶이?"

"어우, 어제 먹었잖아. 속 쓰려."

"피자는?"

"밀가루 좀 그런데. 요즘 소화가 영…"

"그럼 한식? 김치찌개 어때?"

"나쁘지 않은데… 뭔가 확 당기진 않네."

"파스타?"

"크림? 토마토? 아, 로제? 모르겠다, 뭔가 헤비해."

수현은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다.

"야, 장지훈. 너 아까 분명히 '아무거나'라고 했다?"

"엉. 아무거나 괜찮아."

"근데 내가 말한 떡볶이, 피자, 김치찌개, 파스타는 왜 '아무거나'에서 자꾸 제외되는 건데? 얘네 뭐 유령 메뉴야? 슈뢰딩거의 아무거나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지금 딱히 안 땡겨서 그렇지."

지훈은 여전히 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배를 긁적였다. 그 태평함에 수현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와, 네 ‘아무거나’는 무슨 플래티넘 등급이라도 있냐? 일반 ‘아무거나’랑은 차원이 달라? ‘프리미엄 아무거나’ 뭐 그런 거야?"

"비꼬지 마라.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거잖아."

"솔직? 이게 솔직한 거야? 이건 그냥 네 안에 있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데 네가 알아서 내가 원하는 걸 딱 맞춰줬으면 좋겠다'는 심보를 '아무거나'라는 네 글자로 포장한 거잖아! 소비자를 기만하는 과대포장이라고, 이 인간아!"

수현이 랩처럼 쏘아붙이자 지훈이 그제야 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쳐다봤다.

"와, 말 한 번 살벌하게 한다. 내가 뭐 죽을죄를 졌냐?"

"죽을죄? 아니. 근데 내 속에서 천불이 나게 한 죄는 졌지. 너 때문에 내 저녁 메뉴 고민하다가 하루 다 가겠다. 이러다 우리 굶어 죽으면 사인은 '아무거나'야, 알겠냐?"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내가 정할게."

"오, 드디어? '아무거나'의 신께서 강림하시나? 뭔데, 말해봐."

수현이 팔짱을 끼고 지훈을 노려봤다. 지훈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는 시늉을 하더니, 이윽고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역시… 아무거나?"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며 소리쳤다.

"됐다, 이 자식아! 나 혼자 컵라면 먹을 거다! 넌 평생 '아무거나'나 고민하다 굶어 죽어라!"

쾅, 하고 닫히는 방문 너머로 지훈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강수현! 컵라면도 '아무거나'에 포함되는 거 아니냐? 같이 먹자!"

수현은 방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이건 '아무거나'가 아니라 '내 최후의 선택'이거든? 그리고 네 '아무거나' 리스트엔 없어, 이 웬수야!"

지훈은 낄낄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삐졌냐? 삐졌네, 삐졌어. 알았어, 내가 맛있는 거 시킬게. 진짜 '네가 좋아하는 아무거나'로."

"…치킨."

수현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왔다.

"콜. 역시 우린 치킨으로 대동단결이지."

결국 그들의 '아무거나'는 오늘도 치킨으로 귀결되었다. 어쩌면 '아무거나'의 저주는, '결국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과정은 늘 이렇게 살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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