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02. 넷플릭스 알고리즘보다 어려운 너
"자, 오늘은 뭘로 우리 영혼을 정화해 볼까나?"
배달 온 찜닭의 매콤한 향이 코를 간질이는 금요일 밤. 수현이 비장하게 넷플릭스 리모컨을 들고 TV 앞에 섰다. 소파에 반쯤 누워 닭다리를 뜯던 지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무거나."
'아무거나' 대첩으로 한바탕 난리를 치렀음에도, 지훈의 레퍼토리는 여전했다. 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좀 가볍게 로맨틱 코미디 어때?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시리즈 정주행?"
"어우, 간지러워. 내 손발 오징어 되는 거 보고 싶냐? 좀 더 박진감 넘치는 거 없냐?"
"박진감? 그럼 액션? '익스트랙션'? 크리스 헴스워스 오빠 근육 감상이라도 할래?"
"음… 총소리 너무 시끄러울 것 같은데. 오늘 좀 피곤해서."
"피곤하면 힐링물? '슬기로운 의사생활' 같은 거. 훈훈하고 좋잖아."
"나 병원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그거 너무 길어. 시작하면 주말 순삭이야."
수현의 손가락이 넷플릭스 화면 위를 방황했다. 스릴러, SF, 다큐멘터리, 예능… 그녀가 제안하는 모든 장르와 작품에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마치 국가대표급 '노(No)'맨 같았다.
"야, 장지훈. 너 진짜 넷플릭스 알고리즘보다 더 어렵다. 걔는 내가 본 거라도 분석해서 추천해주지, 넌 뭐 기준이 뭔데? 혹시 네 머릿속에 '오늘의 지훈이 기분 맞추기'라는 숨겨진 카테고리라도 있냐?"
"까칠하기는. 그냥 딱 꽂히는 게 없는 걸 어떡해."
"꽂히는 거? 네 취향은 넷플릭스 미스터리 장르보다 더 예측 불가능해. 범인이 누군지 맞히는 게 네가 뭘 보고 싶어 하는지 맞히는 것보다 쉽겠다, 이 인간아!"
수현이 리모컨으로 지훈의 이마를 콩 하고 때렸다.
"아! 왜 때려! 폭력 반대!"
"네 우유부단함이 폭력이다, 이놈아! 이러다 찜닭 다 식겠다. 그냥 내가 본 거 또 볼란다. '브리저튼' 시즌 3 복습이나 해야지."
수현이 '브리저튼' 포스터로 커서를 옮기자, 지훈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스톱! 그걸 또 보겠다고? 그 느끼한 공작 나리 얼굴을? 차라리 다큐멘터리 '지구의 눈물'을 보고 펑펑 울겠다!"
"흥, 네가 뭘 알아! 이건 역사와 로맨스가 어우러진 예술작품이거든? 네 메마른 감성으로는 이해 못 할 고품격 드라마라고."
"고품격? 그냥 예쁜 옷 입고 연애하는 거잖아! 그리고 너 그거 이미 세 번이나 봤잖아. 대사까지 외우겠더만."
"네가 좋아하는 게임도 맨날 똑같은 맵에서 똑같은 캐릭터로 하잖아! 그건 괜찮고 이건 안돼? 내로남불 쩌네!"
결국 리모컨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수현은 '브리저튼'을 사수하려 했고, 지훈은 "아무거나 괜찮다니까! 그냥 아무거나!"를 외치며 리모건을 뺏으려 들었다. 엎치락뒤치락, 티격태격. 찜닭은 점점 식어갔고, 넷플릭스 화면은 추천작 목록만 하염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아, 진짜! 너 때문에 드라마 한 편 보려다 내가 드라마를 찍겠다!"
"네가 하도 유난을 떠니까 그렇지! 그냥 아무거나 틀면 되잖아!"
그때, 지훈의 손이 미끄러지며 리모컨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화면이 바뀌었다. 웬걸, 촌스러운 화면과 함께 트로트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실수로 눌린 채널에서 지역 방송국 노래자랑이 방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뭐냐."
수현과 지훈은 잠시 말을 잃고 화면을 응시했다. 구성진 꺾기 창법으로 열창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둘 다 피식 웃음이 터졌다.
"푸하하! 이게 뭐야! 할머니 꺾기 예술이신데?"
"야, 저분 최소 결승감이다. '아무거나' 보다가 '전국노래자랑' 볼 줄이야."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찜닭을 다시 집어 들었다. 화면 속 할머니는 열정적으로 노래를 이어갔고,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웃기고 정겨웠다.
"…근데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데?"
"그러게. 오늘 우리의 '아무거나'는 이거였나 보다."
넷플릭스 알고리즘도 예측하지 못한 선택. 결국 그들의 금요일 밤은, 예상치 못한 '아무거나'로 채워지고 있었다. 물론, 다음 주 금요일엔 또 다른 리모컨 전쟁이 벌어질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