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03. 세탁기 속 핑크 양말의 비밀
"으아아아악! 장지훈! 너 이리 안 와?!"
일요일 아침, 수현의 앙칼진 비명이 온 집안을 갈랐다. 늦잠을 즐기던 지훈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하며 부스스한 머리로 거실로 뛰쳐나왔다.
"왜, 왜! 무슨 일이야? 집에 불이라도 났어?"
수현은 세탁기 앞에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는 새하얀 반팔 티셔츠였어야 할, 그러나 지금은 얼룩덜룩한 연분홍빛으로 물든 무언가였다.
"이거… 이거 내 최애 흰 티인데… 이게 지금 무슨 꼴이냐고!"
수현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지훈은 상황 파악을 위해 세탁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원흉을 발견했다. 다른 빨랫감들 사이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앙증맞은 핑크색 양말 한 짝.
"아… 저건 내 양말인데…"
지훈의 해맑은(?) 대답에 수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네 양말? 그래, 네 핑크 양말 테러리스트 때문에 내 아끼는 흰 티가 순교하셨다! 이 핑크색 물 빠지는 양말을 왜 흰 빨래랑 같이 넣는데! 너 혹시 색맹 테스트에서 빨간색 초록색 구분 못 하는 그런 거냐?!"
수현이 물든 티셔츠를 지훈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억울하게 핑크빛으로 물든 티셔츠는 마치 지훈의 만행을 고발하는 듯했다.
"아니, 나는 그냥… 양말 한 짝이라 괜찮을 줄 알았지. 그리고 그거 그렇게 물 빠지는 양말 아니었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증거가 여기 떡하니 있는데! 이게 네 눈에는 흰색으로 보이냐? 필터 낀 인스타그램 사진으로 보여? 이건 명백한 핑크색 테러야! 내 흰 티 돌려내!"
"야, 진정해. 세탁 한번 잘못했다고 사람을 아주 살인범 취급하네. 내가 뭐 일부러 그랬겠냐?"
"일부러가 아니면 뭔데! 과실치사? 아니, 이건 과실염색이지! 너 앞으로 빨래 금지야! 세탁기 접근 금지! 반경 5미터 이내로 얼씬도 하지 마!"
수현은 씩씩거리며 핑크빛 티셔츠를 흔들었다. 지훈은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진짜 미안하다. 내가 새로 사줄게. 똑같은 걸로."
"똑같은 거? 이건 한정판이었다고! 이제 어디서도 못 구해! 네 핑크 양말 한 짝 때문에 내 패션 자부심이 나락으로 떨어졌어! 너 오늘 점심 없어!"
수현의 선포에 지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니, 왜 내 점심까지… 양말이 잘못했지 내가 잘못했냐? 핑크 양말한테 따져!"
"그 핑크 양말 주인은 너거든? 연대 책임이야! 그리고 그 핑크 양말, 너 설마… 그거 내 거 아니냐?!"
수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지훈의 발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훈은 슬그머니 발을 뒤로 숨겼다.
"무, 무슨 소리야! 남자 발에 맞는 핑크 양말이 얼마나 많은데!"
"너 저번에 내 서랍에서 뭐 뒤적거리는 거 봤는데! 그때 훔쳐 신었지! 이 양말 도둑놈아! 내 양말로 내 옷을 망쳐? 완전 자폭 테러잖아!"
"아니, 그게… 네 양말이 예뻐서… 한번 신어봤는데… 깜빡하고 같이 빨래통에 넣었네. 하하."
지훈의 어색한 웃음에 수현은 기가 막혔다.
"하하? 웃음이 나와? 내 소중한 핑크 양말로 내 최애 흰 티를 핑크색으로 물들여 놓고 웃음이 나오냐고! 너 진짜… 오늘 나랑 끝장 볼래?"
"워워, 진정해. 강수현. 내가 진짜 잘못했다. 내가 저 티셔츠, 어떻게든 원상복구 시켜볼게. 인터넷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거야."
지훈은 황급히 셔츠를 받아들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수현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욕실에서 지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강수현! 락스 어디 있어? 락스!"
"뭐? 락스? 야! 그거 쓰면 완전 망해! 그냥 걸레 되는 거야!"
수현이 경악하며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핑크빛으로 물든 티셔츠는 이제 락스 냄새까지 풍기며 대환장 파티를 예고하고 있었다.
세탁기 속 핑크 양말의 비밀은 결국 '지훈의 양말 도둑질'과 '수현의 흰 티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들의 일요일 아침은, 핑크빛 분노와 락스 냄새로 얼룩졌다. 물론, 이 소동 후 지훈은 한동안 빨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