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04. 샴푸 뚜껑은 누가 닫나
"아, 진짜! 장지훈!"
아침부터 수현의 짜증 섞인 고함이 욕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샤워를 막 끝낸 지훈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나오자, 수현이 젖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뚜껑이 활짝 열린 채 방치된 샴푸통이 들려 있었다.
"또 왜 그래, 아침부터. 혹시 내 미모에 또 반했냐?"
능글맞게 웃는 지훈의 얼굴에 수현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미모? 네 뻔뻔함에 질렸다, 이 인간아! 이거 안 보여? 샴푸 뚜껑! 또 안 닫았지!"
"아… 그거. 깜빡했네. 이따 닫으려고 했는데."
"이따? 네 ‘이따’는 ‘다음 생’이랑 동의어냐? 샴푸 뚜껑 닫는 게 그렇게 어렵냐? 세종대왕님이 한글 창제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 아니면 뭐, 뚜껑 닫으면 손가락에 알레르기라도 생기냐?"
수현의 목소리 톤이 한껏 올라갔다. 그녀에게 샴푸 뚜껑은 단순한 플라스틱 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훈의 배려심, 혹은 그 부재를 상징하는 바로미터와 같았다.
"야, 쪼잔하게 샴푸 뚜껑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내가 뭐 샴푸를 다 쏟기라도 했냐?"
"쪼잔? 이게 쪼잔한 거야? 뚜껑 열어놓으면 샴푸 굳고, 먼지 들어가고, 심지어 물 들어가서 변질될 수도 있는 거 몰라? 네 머리는 장식이냐? 뇌 대신 우동사리 넣고 다니냐고!"
"와, 말 심하게 한다. 우동사리라니. 그리고 샴푸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냥 새로 사면 되지."
"새로 사? 네 돈으로 사! 내 돈으로는 한 방울도 아까워! 그리고 이건 돈 문제가 아니잖아. 기본적인 매너, 습관의 문제라고! 너 혹시 화장실 변기 뚜껑도 열어놓고 다니는 그런 부류냐?"
수현의 날카로운 지적에 지훈은 순간 흠칫했다. 사실, 그는 가끔 변기 뚜껑도…
"…아니거든! 변기 뚜껑은 꼬박꼬박 닫거든!"
"수상한데? 목소리 떨리는 거 보니 백퍼센트네. 너 진짜… 기본적인 생활 예절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유치원 다시 보낼까? '지훈아, 샴푸 뚜껑은 꼭 닫아요~ 안 그러면 맴매!' 이렇게?"
수현이 유치원 선생님 흉내를 내며 지훈을 놀렸다. 지훈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 그만해! 알았어, 다음부터 꼭 닫을게. 됐냐?"
"다음? 다음이 어디 있어! 지금 당장 가서 닫아! 그리고 앞으로 샴푸 뚜껑 열린 채로 발견되면, 네 용돈에서 샴푸값만큼 차감이다. 이건 경고가 아니라 통보야."
"치사하다, 진짜. 샴푸 뚜껑 하나에 무슨 용돈까지… 너 완전 짠순이 다 됐네."
"짠순이? 아니, 난 합리적인 소비자이자, 너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정당한 페널티를 부과하는 정의의 사도다! 그리고 넌 그냥… 뚜껑 하나 제대로 못 닫는 생활력 제로인 루저고."
수현의 팩트 폭격에 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터덜터덜 욕실로 들어가 샴푸 뚜껑을 "딱!"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리고 수현을 향해 소리쳤다.
"됐냐? 닫았다! 아주 꽉 닫았다! 이제 만족하냐, 샴푸 경찰 나으리?"
"어쭈, 반항하는 거야? 좋아. 그럼 앞으로 린스 뚜껑, 바디워시 뚜껑, 치약 뚜껑까지 전부 검사 대상이다. 하나라도 열려 있으면 그날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수현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지훈은 기가 막혔다.
"와… 너 진짜 독하다. 나랑 살림 합치더니 아주 군기반장이 다 됐어. 이러다 나중에 숨 쉬는 것도 허락받고 쉬어야 하는 거 아니냐?"
"네 생활 태도를 보면 그럴 날이 올지도 모르지. 똑바로 해, 장지훈. 안 그러면 내 잔소리 폭격에 네 고막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수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샴푸통을 제자리에 놓았다. 지훈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 연애 초반엔 천사 같았는데… 지금은 샴푸 뚜껑 단속반이라니.'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수현의 잔소리 속에는 결국 자신을 향한 애정과 관심이 숨어있다는 것을. 물론, 그 표현 방식이 좀… 격해서 그렇지.
"알았어, 알았다고. 샴푸 뚜껑, 내가 책임지고 닫는다. 대신… 오늘 저녁은 네가 쏘는 걸로."
지훈이 슬쩍 협상을 시도했다. 수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웃기시네. 샴푸 뚜껑 닫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리고 저녁은 당연히 네가 사야지. 오늘 아침부터 나한테 잔소리 폭탄 맞았잖아. 정신적 피해보상 청구한다."
결국 샴푸 뚜껑 논쟁은 지훈의 완패로 끝났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샴푸 뚜껑 닫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바로 수현의 잔소리를 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