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커플 _ 라면 물 조절 장인 납시오

by 남킹

EP 009. 라면 물 조절 장인 납시오

"와… 이게 뭐야?"

일요일 오후,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지훈이 야심 차게 끓인 라면을 본 수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냄비 안에는 면발보다 국물이 더 많아 보이는, 마치 작은 호수 같은 라면이 담겨 있었다.

"라면이지, 뭐야. 내가 특별히 너 생각해서 끓인 사랑의 라면."

지훈은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지만, 수현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사랑의 라면? 이게 라면이냐, 한강물이냐? 너 혹시 라면 끓일 때 정수기 필터 고장 나서 물 폭탄이라도 맞았냐?"

수현이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어 보았다. 힘없이 풀어지는 면발과 멀건 국물은 '망했다'는 두 글자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왜 그래? 물 좀 넉넉하게 넣었을 뿐인데. 국물 좋아하잖아, 너."

"국물을 좋아하긴 하는데, 이건 국물이 아니라 그냥 맹물에 라면 스프 살짝 푼 거잖아! 너 혹시 라면 레시피 '물 550ml'를 '물 5.5L'로 잘못 읽은 거 아니야? 아니면 눈 감고 물 부었냐?"

"아니거든! 나름 황금비율로 맞춘 거거든? 그리고 요즘 싱겁게 먹는 게 건강에 좋대. 싱겁게 먹으면 오래 산다더니, 너 혹시 나랑 같이 무병장수 프로젝트라도 하려고?"

수현이 비꼬듯 말하자, 지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무슨 소리야! 그냥… 네 건강 생각해서 그런 거지."

"내 건강? 네가 끓인 이 '건강 라면' 먹다가 내가 스트레스로 먼저 쓰러지겠다! 이건 라면에 대한 모독이야! 라면 장인들이 통곡할 맛이라고!"

"와, 너무하네. 먹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일단 한번 먹어봐.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잖아."

지훈이 젓가락으로 면을 한 움큼 집어 수현의 입가로 가져갔다. 수현은 마지못해 한 입 먹어보았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라면이 아니라… 라면 향 첨가된 밀가루 풀인데? 너 혹시 미각을 잃었냐?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관대해진 거야?"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냥 좀 삼삼한 거지. 여기에 김치랑 같이 먹으면 딱 좋아."

지훈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김치를 꺼내 왔다. 하지만 수현의 불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김치가 만병통치약이냐? 이 라면은 김치 할아버지가 와도 못 살려! 너 그냥 앞으로 라면 끓이지 마. 이건 재능 낭비가 아니라 그냥 재능 부재야."

"너무하네, 진짜.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끓였는데. 너는 맨날 내 요리에 불만만 많아."

"불만? 이건 정당한 비판이거든? 그리고 네 요리 실력은… 솔직히 말해서 '라면 물 조절'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너 혹시 '요리 파괴왕' 뭐 그런 타이틀이라도 노리는 거야?"

수현의 팩트 폭격에 지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젓가락으로 멀건 국물만 휘적거렸다.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수현도 조금 미안해졌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알았어. 너무 심하게 말했네.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잖아. 다음부터는 그냥 내가 끓일게."

"됐어. 안 먹어."

지훈이 삐친 듯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수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라면 하나 때문에 또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해지다니.

"야, 장지훈. 삐졌냐? 라면 물 좀 많이 넣었다고 삐지기 있냐?"

"…안 삐졌거든."

"삐졌네, 삐졌어. 목소리 톤부터 다른데?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래도 이건 진짜 너무 싱거워서… 차라리 여기에 밥 말아 먹으면 괜찮을지도?"

수현이 슬쩍 제안하자, 지훈의 귀가 솔깃해졌다.

"밥…?"

"응. 국물이 넉넉하니까 밥 말아 먹기에는 딱이네. 거의 라면 국밥 수준인데?"

결국 두 사람은 싱거운 라면에 밥을 말아 먹기 시작했다. 의외로 밥을 마니 국물 맛이 좀 더 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음, 밥 마니까 좀 낫네."

"거봐. 내 말이 맞지?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야. 라면도 결국 밥이랑 먹어야 완성된다니까."

수현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지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는 그냥 레시피대로 끓일게. 정량 계량컵 사서."

"오, 드디어 '라면 물 조절 장인'께서 항복 선언하시는 건가? 잘 생각했어. 안 그러면 우리 집은 맨날 한강물 라면 파티 열릴 뻔했네."

결국 라면 물 조절 논쟁은 '밥'이라는 구원투수의 등장으로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지훈은 깨달았다. 자신의 요리 실력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그리고 수현의 잔소리는, 때로는 쓰지만 결국 맛있는 결과를 위한 필수 양념이라는 것도. 물론, 다음번 지훈이 끓일 라면 역시 어떤 맛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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