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오월, 그 성찰의 아포리아

by 남킹

기억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오월, 그 성찰의 아포리아(Aporia)

유년의 끝자락, 교복 깃을 세우던 고교 시절의 저는 세상을 향한 창(窓)이 지극히 제한된 존재였습니다. 빛바랜 교실 한구석, 웅웅거리는 소음과 함께 흑백의 화면을 송출하던 낡은 텔레비전 브라운관은, 마치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처럼, 왜곡되고 단편적인 세계의 이미지만을 허락했습니다. 그 협소한 창을 통해 흘러나온 5.18 광주에 대한 뉴스는, 정교하게 연출된 모노크롬의 무성영화처럼, '불순분자들의 폭동'이라는 건조하고 단호한 프레임으로 제 망막 위에 투사되었습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권위는 의심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고, 통제된 정보의 파편들은 실체 없는 공포와 막연한 불안감을 자아냈을 뿐, 그 검은 장막 뒤에 숨겨진 진실의 무게와 피의 농도를 가늠하기엔 너무 어리고 순진했습니다. 플라톤이 그의 알레고리에서 묘사한 동굴 속 죄수처럼, 저는 그림자놀음에 현혹되어 실재의 태양을 감히 응시하지 못한 채, 그저 머나먼 남쪽 도시에서 벌어진, 나와는 무관한 혼란스러운 소요 정도로 치부했을 뿐입니다. 그 불온한 단어들 너머,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스러져간 수많은 영혼들의 처절한 절규와 역사의 지층 깊숙이 새겨지고 있던 거대한 상흔을 인지할 만한 인식의 지평도, 용기도 제게는 부재했습니다. 제 안의 세계는 아직 안온한 질서와 맹목적 순응의 논리로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었고, 광주는 그 질서 바깥의 이해 불가능한, 그래서 의식적으로 외면하고픈 '타자(他者)'의 영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마치 니체의 "괴물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괴물 또한 너를 들여다본다"는 경고처럼, 저는 그 심연을 들여다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지성의 용광로, 상아탑의 문턱을 넘어서자, 비로소 그 단단했던 인식의 성벽에 가느다란 실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유와 저항의 기운이 미명(微明)처럼 감돌던 캠퍼스, 선배들의 손에서 손으로, 마치 금단의 사과처럼 은밀히 건네지던 '광주 비디오'의 존재는, 견고했던 내 인식의 성벽에 최초의 파열음을 낸, 거부할 수 없는 충격요법이었습니다. 빛바랜 테이프가 돌아가며 토해내는 조악한 화질 속에서, 저는 처음으로 국가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자행된 폭력의 민낯, 그 적나라한 야만성과 마주했습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무자비한 진압봉의 섬뜩한 궤적,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와 뒤섞인 총성, 무고한 피를 흘리며 아스팔트 위로 힘없이 쓰러지던 시민들의 처절한 몸짓, 그리고 도시 전체를 질식시킬 듯 뒤덮은 공포와 분노의 아우성은 단순한 시각적 충격을 넘어섰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인식론적 단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강요하는 지적 지진이었습니다. 내가 굳건히 믿어왔던 세계의 질서, 국가라는 이름의 신성불가침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전복되는 경험. 프로이트가 인간 문명의 필연적 대가로 논파한 '문명 속의 불만'을 넘어, 문명 자체가 야만으로 퇴행할 수 있다는, 아니 이미 퇴행했다는 끔찍한 가능성을 직면한 순간이었습니다. 선배들의 격앙된 목소리와 함께 전해진 그날의 이야기들은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젊은 지성으로서 짊어져야 할 역사적 부채감과 사회적 책임감을 어렴풋이나마 일깨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고통은 관념의 영역에 머물렀고, 타인의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화된, 아직은 온전히 나의 것으로 육화(肉化)되지 못한 슬픔의 편린들이었습니다. 그날 밤, 잠 못 이루며 뒤척이던 제 의식은, 마치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현대 사회의 불안정성을 묘파한 '액체 근대'의 파도처럼, 이전과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과 그 이면의 어두운 심연 사이에서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칸트가 말한 '순수이성'의 한계를 절감하며, 경험과 감성이 이성을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를 실존적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푸른 군복의 엄격한 규율 속에 제 청춘의 한 조각을 저당 잡혔을 때, 예기치 않게 조우한 호남 출신 동기들과 선임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5.18은 또 다른 차원의, 살과 피를 가진 생생한 현실로 제게 육박해왔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영상이나 문자로 접했던 거대 담론의 추상성과는 달리, 지극히 사적이고 구체적인 아픔의 결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삼촌이 그때 광주에 계셨는데, 그 후로 사람이 변했어..." 혹은 "옆집 아저씨는 아직도 그날 밤의 총소리가 귓가에 맴돈다고 하셔. 술 없이는 잠을 못 이루시지..."로 시작되는 증언들은, 단순한 서사를 넘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며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새겼습니다. 그것은 잊히지 않는 트라우마의 대물림이었고, 한 지역 공동체가 겪어야 했던 집단적 슬픔의 심연을, 마치 브뤼겔의 그림처럼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는 고통의 파노라마였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동정심이나 연민을 넘어, 사회 구조적 폭력이 개인의 영혼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상흔이 마치 유령처럼 얼마나 오랫동안 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배회하며 현재를 잠식하는지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칼 융이 언급한 집단 무의식의 상처처럼, 광주는 특정 지역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에 깊게 팬 흉터임을, 그리고 그 상처는 여전히 봉합되지 않은 채 현재진행형으로 고름을 짜내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영의 밤, 소등 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그들의 낮은 흐느낌, 혹은 애써 감추려 하지만 숨길 수 없었던 눈가의 미세한 떨림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의 무게를, 그 어떤 웅변보다도 더 처절하게 실감케 하는 침묵의 고발이었습니다. 미셸 푸코가 권력의 미시적 작동 방식을 설파했듯, 국가의 거시적 폭력은 이렇듯 개개인의 삶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그 존재를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사회라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혹은 냉혹한 생존 경쟁의 장으로 첫발을 내디딘 후, 보다 폭넓은 정보의 바다와 심층적인 기록의 숲, 그리고 역사의 산증인인 생존자들의 육성 증언이라는 다면적인 프리즘을 통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각도로 조망하게 되면서, 저는 비로소 그 사건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의미의 지층들과 그 심각성의 본질을 온전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특정 시공간에 국한된 국지적 사건, 지나간 과거의 한 페이지로 치부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었고,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그 정당성에 대한 처절한 저항이었으며, 민주주의라는 고귀한 가치가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을 담보로 쟁취되고 수호되는지를 웅변하는 역사의 준엄한 교훈이었습니다. 마치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진보를 폭풍에 비유하며 과거의 폐허 더미를 응시하는 '역사의 천사'의 모습으로 묘사했듯, 저 또한 광주의 폐허 속에서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의 윤곽을 고뇌하게 되었습니다. 그 폐허는 단순한 물질적 파괴를 넘어, 정신적 가치와 공동체적 신뢰의 붕괴를 의미했고, 그 잔해 위에서 새로운 의미를 구축해야 하는 세대의 과제를 절감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인식 변화 과정은 마치 안갯속을 더듬어 나아가는 고독한 여정과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희미한 윤곽조차 잡히지 않던 진실이, 시간의 퇴적과 함께 여러 겹의 두터운 베일을 벗고 점차 또렷한 형체를 드러내며 그 압도적인 무게감으로 제 삶과 정신을 관통했습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일갈했듯, 5.18의 진실을, 그 참혹한 폭력의 심연을 알게 된 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낙관하거나 국가 권력을 맹신하기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 기억은 때로는 깊은 죄책감으로, 때로는 뜨거운 분노로, 그리고 때로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무력감으로 제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을 파고들며, 존재론적 불안을 야기했습니다. 한 개인의 역사가 공동체의 역사와 접속되고, 개인의 고통이 집단의 트라우마와 공명하는 순간, 저는 더 이상 안전한 방관자일 수 없다는, 무겁고도 회피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에서 절대적인 윤리적 명령을 발견했듯, 광주의 희생자들의 얼굴은 제게 국가 폭력의 부당함과 인간 존엄의 불가침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살아있는 양심의 거울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현존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심리적으로 가장 큰 충격과 지적 혼란을 야기했던 것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을 통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명쾌하게 설파했듯, 그토록 끔찍하고 반인륜적인 폭력이 신화 속 괴물이나 극악무도한 악당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사유하지 않는 관료적 명령 체계 속에서 자행될 수 있다는 섬뜩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함께, 개인이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얼마나 나약할 수 있는지, 그리고 '생각 없음'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처절하게 깨닫게 했습니다. 또한,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개인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폭력을 정당화하며, 심지어는 미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은, 사회 시스템과 권력의 본질, 그리고 인간 심성의 심연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끊임없는 철학적 성찰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조르조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 개념을 통해 벌거벗은 생명과 국가 권력의 관계를 분석했듯, 광주에서의 시민들은 한때 그러한 존재로 전락했음을, 그리고 그러한 비극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이제 저에게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끊임없이 현재를 되묻고 미래의 방향을 숙고하게 하는 살아있는 질문이자 현재진행형의 윤리적 좌표입니다. 그것은 기억의 투쟁이며, 해석의 정치학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場)이기도 합니다.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고, 그 숭고한 저항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과거에 대한 부채감을 넘어, 미래를 살아갈 우리가 인간다운 사회를 구축하고,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덕적 책무일 것입니다. 세련된 언어와 현학적인 수사로 그날의 참혹함과 희생의 무게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아니 그래서는 안 됨을 알기에, 저는 다만 이 부족하고 투박한 기록을 통해 제 인식의 지평을 뒤흔들었던 그 오월의 빛과 어둠을 겸허히 증언하고, 그 기억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합니다. 오월의 광주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역사이며,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시대의 과제임을, 그리고 그 기억의 터 위에서 더 정의롭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꽃피워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이 끝나지 않을 성찰의 편린들을 조심스레 갈무리합니다. 그것은 과거를 향한 애도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약속이어야 할 것입니다.


7.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금산의 바람결에 실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