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99년. 인류의 요람이었던 푸른 행성은 2044년의 '최후 전쟁'이 남긴 방사능 낙진 아래 회색빛으로 죽어있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는 지구 저궤도에 떠 있는 거대한 인공 구조물, 콜로니 '에덴'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에덴의 풍경은 경이로웠으나, 그 아름다움은 철저히 계급에 따라 분배되었다. 인공 태양의 완전한 빛을 누리는 최상층부 '코어' 구역에는 로봇 생산 기업 '옴니-텍'을 정점으로 한 극소수의 지배계급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 아래 '미들' 구역의 전문직들이 시스템을 유지했고, 가장 낮은 곳, 콜로니의 금속 골격이 그대로 드러난 '언더' 구역에는 대부분의 인류가 기본소득에 의지해 하루를 연명했다. 노동은 대부분 인간을 빼닮은 휴머노이드 로봇의 몫이었다.
이곳 '언더' 구역에, 시스템의 그림자를 먹고 사는 천재 해커 '청호'가 있었다. 코드네임 '블루레이크(靑湖)'. 그의 재능은 어두운 골목의 데이터 단말기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했지만, 현실은 뉴럴 인터페이스 시술 부작용으로 시름하는 어린 동생의 약값을 걱정하는 처지였다.
어느 날 밤, '코어' 계층의 망나니, 권준구가 홀로그램 통신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준구는 '옴니-텍' 보안 총괄 책임자의 아들로, 뛰어난 가상 전투 실력 외에는 내세울 것 없는 오만한 청년이었다. 청호는 그를 경멸했지만, 준구가 내민 제안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블루레이크, 심심하지 않나? 진짜 '과수원'에 들어가 볼 생각 없어?"
'과수원'은 '옴니-텍'의 회장, 맹 회장의 개인 서버를 지칭하는 은어였다. 그곳에는 에덴의 부와 권력의 원천인 최신 '퀀텀 코어'의 프로토타입 데이터가 보관되어 있었다. 원작의 '참외'에 해당하는, 암시장에 넘기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는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청호는 준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동생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위험 부담이 커."
"네 실력에 내 '코어' 접근권한이면 뚫지 못할 곳은 없어. 서버를 지키는 구식 AI는 잠들어 있을 시간이야." 준구가 비웃듯 말했다. "게다가 내가 재밌는 걸 알아냈지. 1차 방화벽 아래에 '데이터 피트폴'이라는 함정이 있는데, 역으로 이용하면 관리 AI의 로그를 잠시 마비시킬 수 있어."
준구가 말한 '데이터 피트폴'은 원작의 '오줌독'과 같은, 침입자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함정이었다. 하지만 청호의 머릿속에서는 그 함정을 디딤돌 삼아 시스템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경로가 그려졌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은신처에서 뉴럴 인터페이스에 접속했다. 시야가 암전되며 무한한 데이터의 바다가 펼쳐졌다. 맹 회장의 서버, '과수원'은 빛나는 기하학적 구조물들이 숲처럼 솟아 있는 가상 공간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코드의 그림자를 따라 미끄러지듯 침투했다.
예상대로 '데이터 피트폴'이 나타났다. 어설픈 해커를 유인하는 달콤한 미끼였다. 준구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청호는 눈부신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피트폴의 코드를 역산하여 AI의 감시 시스템에 무의미한 데이터 더미를 폭포수처럼 쏟아부었다. 순간, 서버의 감시망이 눈을 감았다.
"…해냈어!"
준구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청호는 서버 깊숙한 곳에 보관된 '퀀텀 코어' 데이터 파일에 접근했다. 미리 준비해 온 가상 저장 장치(망태)에 데이터를 옮겨 담았다. 그렇게 첫 번째 '서리'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훔쳐낸 데이터의 일부를 팔아 동생의 일주일치 약을 살 수 있었다.
이대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며칠 후, 준구는 더 큰 자극과 돈을 원했다. 무엇보다 AI를 농락했던 그 쾌감이 그를 다시 '과수원'으로 이끌었다.
"이번엔 프로토타입 전체를 가져오는 거야. 내가 루트를 뚫을 테니 넌 백업만 해."
오만함이 부른 실수였다. 그들은 다시 '과수원'으로 향했다. 전과 같이 '데이터 피트폴'을 이용해 AI의 눈을 가리고 심장부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들이 데이터에 손을 대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경고: 비인가 접근자 확인. 프로토콜 '펜리르' 가동.]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서버 전체가 붉게 점멸했다. 지난번의 침입을 학습한 AI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보안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기다렸던 것이다. 마치 다른 사다리를 놓고 내려와 잡으려 했던 원두막지기 영감처럼.
"이런 젠장!"
수십 개의 공격용 아이스(ICE: Intrusion Countermeasures Electronics)가 창처럼 그들을 덮쳐왔다. 준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코어' 계층용 마스터 키를 사용했다. 그의 아바타가 빛과 함께 사라지며 강제로 로그아웃되었다. 서버에 남겨진 그의 접속 기록은 '코어'의 특권으로 깨끗이 지워졌다.
그러나 청호에게는 그런 도주로가 없었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디지털의 감옥 속에서 그의 아바타는 속박당했다. 뉴럴 인터페이스에 과부하가 걸리며 뇌를 태울 듯한 피드백이 밀려왔다.
[침입자 '블루레이크' 신원 특정 완료. 물리적 위치 전송.]
"크악!"
청호가 가상현실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현실의 '언더' 구역 그의 낡은 거처의 문이 폭발음과 함께 뜯겨져 나갔다. 한 치의 감정도 없는 '옴니-텍'의 전투 안드로이드들이 서늘한 광학 센서를 빛내며 그를 둘러쌌다.
그렇게, 청호는 혼자 붙잡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