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데칼코마니: 나폴레옹과 히틀러, 129년의 간극

by 남킹

어둠의 데칼코마니: 나폴레옹과 히틀러, 129년의 간극을 넘어선 두 폭군의 초상


역사는 스스로를 반복하지 않지만, 종종 기이할 정도로 유사한 운율을 지닌다. 시간의 광대한 태피스트리 위에서 어떤 인물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등장하며, 인류 정신의 가장 어둡고 복잡한 심연을 드러낸다. 여기, 129년이라는 명백한 시간의 단층을 사이에 두고 기괴할 만큼 닮은 궤적을 그린 두 인물이 있다. 한 명은 프랑스 혁명의 혼돈 속에서 피어난 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다른 한 명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잿더미 위에서 증오를 먹고 자라난 제3제국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 최근 나폴레옹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활발해지면서, 그의 영웅적 신화 뒤에 가려졌던 폭군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있으며, 이는 히틀러라는 20세기의 악몽과 불길한 공명을 일으킨다.

이 글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나 피상적인 유사점의 비교를 넘어, 권력이라는 가장 강력한 미약(媚藥)에 중독된 두 영혼의 내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탐색하고자 한다. 그들의 야망이 어떻게 대륙을 피로 물들였으며, 그들의 신화가 어떻게 수백만의 죽음을 정당화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육체가 어떻게 시대의 광기와 욕망을 체현했는지를 해부할 것이다. 이는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를 동원하여, 비유와 상징의 안개를 헤치고 역사의 가장 깊은 상흔을 더듬어 나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태생: 이방인의 야망과 상처받은 자존심

모든 비극의 시작은 미약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본토가 아닌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이방인이었다.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서 그는 촌스러운 억양과 평민이라는 신분, 그리고 168cm의 당시 프랑스 평균 키를 웃도는 신장에도 불구하고 '작은 키'라는 놀림에 시달리며 콤플렉스를 키웠다. 이글거리는 지중해의 태양 아래 다져진 그의 야망은 프랑스 사교계의 냉소와 귀족들의 오만함에 부딪히며 더욱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의 내면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증명하고, 그를 무시했던 구체제를 발아래 무릎 꿇리려는 욕망이 들끓었다.

129년 후, 오스트리아의 작은 국경 도시에서 태어난 히틀러 역시 독일 민족주의의 광풍 속에서 이방인이었다. 화가를 꿈꿨던 실패한 미대 지망생, 175cm의 키에 허약 체질 판정을 받았던 그는 뮌헨의 싸구려 하숙집을 전전하며 세상에 대한 증오와 뒤틀린 선민의식을 키웠다. 그의 육체는 굶주림과 패배감에 시달렸고, 그럴수록 그의 정신은 게르만 민족의 위대함이라는 망상에 집착했다. 나폴레옹의 콤플렉스가 코르시카 촌뜨기에 대한 멸시에서 비롯되었다면, 히틀러의 그것은 유대인과 슬라브 민족에 대한 병적인 혐오와 아리안족의 신화적 위대함을 향한 광적인 집착에서 기인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변방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오히려 중심부를 전복시키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로 변환시켰다는 점에서 섬뜩한 동질성을 보인다.

권력의 장악: 혼돈을 이용한 쿠데타와 합법을 가장한 독재

두 폭군은 시대의 혼란을 자양분 삼아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의 광풍이 휩쓸고 간 뒤, 공포정치의 피비린내와 총재정부의 무능함에 신물이 난 대중의 열망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는 군인으로서 연전연승하며 쌓은 명성을 바탕으로 1799년 11월 9일, 안개 자욱한 브뤼메르의 아침에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노골적인 무력의 행사였으나, 프랑스 국민들은 혼란을 종식시켜 줄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했기에 그의 등장을 묵인하고, 나아가 환호했다.

히틀러의 방식은 더욱 교활하고 현대적이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적 파탄과 정치적 무정부 상태를 배경으로, 선동적인 연설과 치밀한 선전전을 통해 나치당의 지지기반을 넓혔다. 1923년 11월 9일, 기이하게도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같은 날짜에 시도했던 뮌헨 폭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는 이 실패를 통해 합법적인 권력 장악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민주주의의 절차를 역이용하여 1933년 총리가 되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총통의 자리에 오르며 절대 권력을 손에 쥐었다. 나폴레옹이 군화발로 의회의 문을 걷어찼다면, 히틀러는 대중의 광적인 지지라는 합법의 외투를 걸치고 민주주의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그러나 그 본질은 동일했다. 둘 다 국가적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자신을 유일한 구원자로 신격화하며 독재의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전쟁과 학살: 영광의 이름 아래 자행된 야만

권좌에 오른 두 사람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유럽 대륙을 거대한 도살장으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전쟁의 신'이라 불리며 천재적인 군사 전략을 구사했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아랑곳하지 않는 냉혹함이 있었다. 그의 전술은 "적의 몸통을 깨면 부차적인 문제는 스스로 정리된다"는 말처럼, 최대한의 전력을 집중하여 적의 중심을 파괴하는 단순하고 잔혹한 방식이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부터 이집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이르기까지 그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와 시체만이 남았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최대 6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한다.

특히 최근 들어 그의 잔혹성이 집중적으로 재조명되는 부분은 아이티에서의 흑인 학살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폐지되었던 노예제를 부활시킨 그는, 자유를 위해 저항하는 아이티의 흑인들을 상대로 유황가스를 사용하여 약 10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영광스러운 정복 전쟁의 신화 뒤에 숨겨진, 인종주의에 기반한 제국주의의 추악한 민낯이었다.

히틀러의 야만성은 나폴레옹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와 체계성을 띠었다. 그의 전쟁은 영토 확장을 넘어, '열등 민족'을 절멸시키고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라움(생활 공간)'을 확보하려는 인종 청소의 성격을 가졌다. 그는 나폴레옹이 아이티에서 사용했던 독가스를 산업적 규모로 발전시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는, 나폴레옹이 아이티의 사탕수수밭에서 피워 올렸던 유독가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기술적으로 진보했으나 본질적으로 동일한 야만의 상징이었다. 히틀러는 나폴레옹을 롤모델로 삼았다고 전해지는데, 정복의 야망뿐만 아니라 대량 학살의 방법론까지도 계승한 셈이다.

러시아 원정: 오만의 절정과 파멸의 서곡

역사의 아이러니는 두 폭군이 똑같은 실수, 즉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와 혹독한 겨울을 얕보았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812년 6월 24일, 60만 대군을 이끌고 네만강을 건넌 나폴레옹은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전투를 피하며 초토화 작전을 펼쳤고, 마침내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텅 빈 도시와 거대한 화염뿐이었다. 식량 부족과 추위에 시달리던 그의 '위대한 군대'는 퇴각 길에 '동장군'의 맹공 앞에 무참히 스러져갔다. 눈 덮인 광야에는 얼어붙은 병사들의 시체가 이정표처럼 널렸고, 굶주린 병사들은 죽은 말의 배를 갈라 따뜻한 내장을 파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정확히 129년 후인 1941년 6월 22일, 히틀러 또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을 침공했다.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그는 4개월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 역시 광대한 영토와 예상보다 완강한 소련군의 저항, 그리고 무엇보다 살을 에는 러시아의 겨울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스탈린그라드의 폐허 속에서 얼어붙은 독일군 전차는, 129년 전 모스크바 외곽에서 버려진 프랑스군의 대포와 겹쳐지며 역사의 비정한 반복을 증언한다. 두 사람 모두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휴브리스(오만)'에 빠졌고, 자연의 거대한 힘과 인간의 끈질긴 저항 의지를 간과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의 길을 재촉했다.

몰락과 최후: 섬과 벙커, 고립된 죽음

러시아에서의 참패는 두 독재자의 몰락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엘바섬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탈출하여 '백일천하'를 누렸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며 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헬레나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위암으로 고통받으며 과거의 영광을 회고하다 1821년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그의 육신은 대서양의 거친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차가운 바위섬에 묻혔다.

히틀러의 최후는 더욱 극적이고 비참했다. 연합군의 총공세에 밀려 베를린 지하 벙커에 갇힌 그는, 소련군의 포성이 지축을 흔드는 가운데 자신의 제국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온 유럽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 했던 그의 광대한 야망은 축축하고 비좁은 콘크리트 공간에 갇혔다. 결국 그는 1945년 4월 30일, 연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신은 부하들에 의해 불태워져 흔적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다. 한 명은 섬에, 다른 한 명은 지하 벙커에 고립되어 맞이한 죽음. 이는 세상을 소유하려 했던 자들이 결국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채 맞이하는 비극적 종말을 상징한다.

맺음말: 신화의 해체와 역사의 경고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외치며 인간 의지의 승리를 웅변했지만, 그의 유산은 '나폴레옹 법전'과 같은 근대화의 업적 이면에 수백만의 희생과 독재, 그리고 제국주의적 침탈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히틀러는 그 그림자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인류에게 홀로코스트라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오늘날 나폴레옹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는 것은 그의 신화를 해체하고, '위대한 영웅'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폭력을 직시하려는 역사의 자기 성찰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129년의 간극을 둔 두 폭군의 평행이론은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던진다. 그것은 바로 국가적 위기와 대중의 불안을 파고드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등장, 합법과 효율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의 망령,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희생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야망이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본질과 인간의 광기에 대한 영원한 우화이며, 우리가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두 사람의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통해, 우리는 삶의 참됨과 거짓, 진보와 야만, 그리고 영광과 파멸의 경계가 얼마나 위태롭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목도한다. 어둠의 데칼코마니처럼 서로를 비추는 두 폭군의 초상은, 시간의 강을 건너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서늘하고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이 어두운 거울 속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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