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같은 날, 2024년 4월 4일.
다른 시간, 다른 공간, 그러나 같은 하늘 아래.
밤의 장막이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 국회의원 권아란(40대 초반)의 고급 빌라 침실은 어둠보다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천둥이라도 치는 듯 지끈거렸다.
전날 밤, 유력 정치인들과의 파티에서 들이켠 최고급 샴페인이 뒤늦게 그녀의 뇌세포를 공격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실크 잠옷의 부드러운 감촉마저 사포처럼 거슬리는, 불쾌한 아침이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세상을 향한 짜증과 특권 의식이 배어 있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그녀는 대리석으로 마감된 복도를 걸어 약 상자가 있는 거실 수납장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온갖 종류의 영양제와 비상약들이 질서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타이레놀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두통이 분노로 변이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박 비서!”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거실의 고요함을 갈랐다. 잠시 후, 홀 한쪽 소파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 보좌관이 거의 튀어 나오듯 달려왔다. 그의 얼굴에는 만성적인 피로와 긴장이 가면처럼 붙어 있었다.
“네, 의원님. 부르셨습니까.”
“여기 타이레놀 없어요? 내 머리가 지금 깨질 것 같은데, 안 보여?”
그녀의 말투는 질문이 아니라 질책이었다. 박 보좌관은 허리를 굽히고 익숙하게 약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다른 약병들 뒤에 숨어 있던 타이레놀 한 통을 찾아낸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의원님.”
하지만 권아란의 입에서 돌아온 것은 칭찬이 아닌, 더 날 선 질책이었다. 그녀는 박 보좌관의 손에 들린 약통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쏘아붙였다.
“박 비서! 내가 미리미리 여러 개 사다 놓으라고 몇 번을 말했어요? 꼭 이렇게 다 떨어져 갈 때쯤, 바닥이 보일 때 사 오지 말고! 이게 뭐 비싼 거라고 아끼나? 그러니 정작 급하게 찾으려고 하면 눈에 띄지도 않잖아요!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녀요?”
“죄, 죄송합니다. 어제 오후에 사다 놓는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바로 채워 놓겠습니다.”
박 보좌관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권아란의 눈에는 경멸의 빛이 스쳤다. 그는 그녀에게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기능이 떨어지는 비싼 가전제품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됐고, 물이나 가져와요.”
그녀가 턱짓으로 주방을 가리키자, 박 보좌관은 다시 종종걸음으로 냉장고로 향했다. 그가 크리스털 컵에 차가운 생수를 따라 내놓자, 권아란은 그것을 낚아채듯 받아 들고 타이레놀 두 알을 꿀꺽 삼켰다.
물을 마신 그녀는 잠시 소파에 앉아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약효가 퍼지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 그녀는 또 다른 불편함을 떠올렸다.
“애들은요?”
“아, 네. 기사님 편에 맞춰서 방금 나갔습니다.”
“아침은 먹였고?”
“네. 주방 이모님께서 준비해주신 샌드위치 먹고 갔습니다.”
그녀는 자식들의 안위조차 자신의 입이 아닌 박 보좌관의 입을 통해 확인했다. 마치 자신이 처리해야 할 수많은 업무 중 하나를 보고받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코를 막으며 인상을 팍 썼다.
“아야! 이게 무슨 냄새야!”
유난히 냄새에 민감한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다시 박 보좌관을 호출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비명에 가까웠다.
“박 비서! 이거 냄새 안 나요? 음식물 쓰레기통! 언제 적 쓰레기인데 아직도 안 버리고 처박아 뒀어요? 네? 이 집에서 썩은 내가 진동을 하잖아요!”
박 보좌관이 황급히 달려와 싱크대 아래에 놓인 음식물 쓰레기통을 잽싸게 들고 나갔다. 그의 축 처진 뒷모습에 대고 그녀는 다시 한번 독을 뿜었다.
“미리미리 좀 하세요, 제발! 시키기 전에! 아이고, 두통이 더 심해지네. 꼭 사람을 이렇게 잔소리하게 만든다니까!”
박 보좌관이 막 현관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녀는 다시 외쳤다.
“아, 거기 현관 옆에 일반 쓰레기 봉투도 같이 버리고 와요!”
박 보좌관은 거대한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비닐 안으로 플라스틱, 캔, 종이류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분리수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그 쓰레기 더미 앞에서, 깊고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쓰레기봉투를 풀어헤치고, 차가운 바닥에 쪼그려 앉아 플라스틱과 캔을 하나하나 골라내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망가진 자존심 조각을 줍는 것처럼.
# 욕망의 거래, 그리고 황홀한 기억
점심 약속을 위해 권아란은 집을 나섰다. 박 보좌관이 운전대를 잡았다. 검은색 세단은 미끄러지듯 도로를 달렸다. 목적지는 시내 최고급 일식 레스토랑. VVIP들만 예약할 수 있는 프라이빗 룸이 있는 곳이었다.
“오늘 오후 일정 다시 브리핑해봐요.”
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그녀가 말했다. 박 보좌관은 룸미러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네, 의원님. 점심 약속 후 2시에는 지역구 여성위원회 간담회가 있고, 3시 30분에는 OOO일보와 단독 인터뷰가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가장 중요한 일정으로, 저녁 6시에 아버님 간 이식 수술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수술 집도의는 XX 병원 오정후 박사입니다.”
아버지의 수술 이야기를 듣는 순간, 권아란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딸의 미소가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승리를 확인하는 자의 오만한 미소였다.
그녀의 아버지, 권영세 전 법무부 장관은 알코올성 간경화 말기였다. 간 이식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하지만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등록된 간 이식 대기 환자는 수천 명. 정상적인 순서를 기다린다면, 아버지는 아마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에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권아란이었다. 법과 원칙은 그녀 같은 사람들을 비껴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인맥과 권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확실한 카드인 오정후를 손에 넣었다.
그녀는 수많은 대기 환자들을 가차 없이 밀어내고, 아버지의 이름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이 수술로 새 생명을 얻게 된다면, 틀림없이 다른 형제들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유산을 물려줄 것이라는 확신에 그녀는 흐뭇했다.
그녀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오정후에게로 흘러갔다. 사실 이번 간 이식 수술은 그녀가 오정후를 완벽하게 ‘구워삶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달 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오정후를 오늘 가는 바로 그 최고급 일식 레스토랑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박 보좌관을 시켜, 그의 차 트렁크에 묵직한 ‘사과 상자’ 하나를 싣게 했다. 물론 그 속에는 붉은 사과가 아니라, 신사임당이 인쇄된 지폐 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준비한 거래의 대가는 돈만이 아니었다.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은은한 조명의 프라이빗 룸. 두 사람은 최고급 사케를 나누어 마셨다.
“오 박사님, 요즘 방송에서 보니 더 멋있어지셨던데요. 여전히 인기도 많으시고.”
“과찬이십니다, 의원님. 의원님이야말로 나날이 미모가 더 빛나시는 것 같습니다.”
의례적인 칭찬이 오갔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다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혼 후 자유로운 몸이 된 권아란은 자신의 몸을 가꾸는 데 아낌없이 투자했다. 가슴 수술부터 시작해 얼굴의 미세한 주름까지, 웬만한 성형 수술은 모두 받은 상태였다.
마흔을 갓 넘겼지만, 그녀의 몸은 여전히 20대처럼 탱탱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그 몸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오늘 박사님께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요.”
그녀는 잔을 채워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버님 일 때문에… 박사님 도움이 꼭 필요해요. 박사님 능력이라면, 어떻게든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오정후는 그녀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사케 잔을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의원님 아버님 같은 분을 위한 일이라면…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죠. 다만, 아시다시피 절차라는 게 워낙 까다로워서요.”
그의 말에 권아란은 요염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절차는… 깨라고 있는 거 아닐까요? 특히, 우리처럼 특별한 사람들에게는요.”
그녀의 손이 그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식당의 다다미방에서 뜨겁고 황홀한 관계를 가졌다. 오정후는 자신이 만나 본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도 권아란이 단연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수동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리드하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게다가 그가 가진 약간의 변태적인 기질까지도 완벽하게 받아주며 그를 황홀경으로 이끌었다. 권력 있는 여자가 보여주는 대담한 복종. 그것은 오정후에게 최고의 흥분제였다.
그녀 역시 오정후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는 단순한 의사가 아니었다. 여자의 몸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신의 경지에 오른 테크니션이었다. 그녀는 그와의 섹스를 통해, 권력이 주는 쾌감과는 또 다른 차원의, 원초적인 쾌락을 맛보았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권아란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병원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그녀의 몸이 은밀하게 달아올랐다. 아버지의 수술이 끝나면, 그를 다시 한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 분노의 폭발, 그리고 광란의 질주
“의원님, 차가 좀 막히는데요...”
박 보좌관의 목소리가 그녀를 황홀한 상상에서 현실로 끌어냈다.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권아란의 얼굴에서 달콤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얼음장 같은 분노가 서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차 안의 공기를 갈랐다.
“죄송합니다, 의원님. 갑자기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사고? 박 비서!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출발하기 전에 교통상황부터 체크하라고! 그리고 내비게이션만 믿지 말라고 했지! 이 시간대에 여기 순환도로가 얼마나 막히는지, 서울에서 10년을 운전했으면 몸으로라도 외웠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분노는 점점 더 거세졌다.
“도대체 머리는 왜 달고 다녀요? 장식이야?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라고! 뭐가 된장이고 뭐가 똥인지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 국회의원 보좌관 노릇이라도 하는 거 아니냐고! 참, 내! 어떡할 거야, 이제! 점심 약속 시간 다 늦었잖아! 오늘 오후 일정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러다간 쫄쫄 굶고 인터뷰하게 생겼잖아! 응? 뭐라도 해봐! 하늘을 날든 땅을 파든, 이 차를 여기서 빼내란 말이야!”
그녀의 폭언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인격 모독적인 말들이 비수처럼 박 보좌관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수년 동안 이 모욕을 견뎌왔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녀처럼 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하지만 오늘은, 그 희망의 심지가 거의 다 타버린 것 같았다.
진저리가 났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발이 움직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핸들을 왼쪽으로 틀어 버스 전용차로로 진입했다.
빵-! 빵빵-!
뒤따라오던 시내버스가 위협적으로 경적을 울리며 상향등을 켬뻑거렸다. 비키라는 명백한 신호였다. 하지만 박 보좌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속 페달을 더욱 깊이 밟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분노의 표현이었다. 수년간 억눌러왔던 울분이, 그의 발끝을 통해 광기로 폭발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찢고 달리고 싶은, 한 마리의 성난 짐승일 뿐이었다.
“그래, 진작 이렇게 했어야지!”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권아란은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박 보좌관의 그 짧은 반란을, 자신의 카리스마가 이끌어낸 당연한 복종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 하늘의 심판, 추락하는 카르마
도로 위에서의 온갖 불법과 난폭 운전 덕분에, 권아란은 간신히 점심 약속을 마칠 수 있었다. 그녀는 최고급 오마카세로 점심을 때우고, 오후의 간담회와 인터뷰까지 모두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녀의 유능함을 과시하는 기사들이 곧 인터넷을 도배할 터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그녀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아버지의 수술이 예정된 병원으로 향한 시각은 오후 4시 44분.
차가 병원 근처에 가까워질수록 차량은 다시 늘어났다. 박 보좌관은 아까의 광기가 사라진 듯, 다시 침착한 얼굴로 운전하고 있었다. 그는 내비게이션을 끄고, 자신의 감을 믿고 좁은 이면도로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박 보좌관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바로 위, 고가도로에서 검은색 대형 세단 한 대가 가드레일을 부수고,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의원님…!”
그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시커먼 강철 덩어리가, 그들의 차 지붕을 그대로 덮쳤다.
콰아아아앙-!
세상이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박 보좌관은 구겨진 운전석에서 간신히 상체를 빼냈다. 그의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고통 속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권아란.
조금 전까지 세상을 다 가진 듯 오만하게 앉아 있던 그녀는,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차체와 천장 사이에 끼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붉은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오정후의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