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홍대. 그곳은 언제나 젊음과 불안, 희망과 좌절이 뒤섞여 끓어오르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2014년의 홍대는 지금보다 더 날것의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세련된 프랜차이즈 상점들 사이로,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으려는 작은 가게들이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지하에 위치한 라이브 클럽 ‘고스트 블루스’는 시대의 흐름에서 한 발짝 비켜선 섬과 같은 곳이었다.
문을 열고 삐걱이는 계단을 내려가면,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쏟아진 맥주, 그리고 사람들의 땀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공기가 폐부를 훅 찌른다. 그곳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해방구이자, 고단한 청춘들의 안식처였다.
그날도 송애경(당시 21세)은 그 공기 속에서 위태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간호학과 2학년. 그녀의 하루는 강의실의 딱딱한 의자와 도서관의 백색 소음, 그리고 밤이 되면 이곳 ‘고스트 블루스’의 소란함으로 채워졌다.
시골에서 상경한 그녀에게 서울의 학비와 생활비는 버거운 짐이었다. 그녀는 그 짐을 지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밤을 팔고 있었다.
“애경아! 3번 테이블에 카스 두 병 더!”
주방에서 외치는 사장의 목소리에 그녀는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움직였다. 끈적이는 테이블을 닦고, 주문을 받고, 무거운 맥주병을 나르는 일이 반복됐다. 웃음을 팔아야 했지만, 그녀의 눈은 언제나 공허했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이 소란스러운 공간을 떠나, 내일 아침 있을 해부학 시험의 빡빡한 텍스트 위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대 위의 조명이 한곳으로 모이며, 시끄럽던 클럽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그날의 마지막 밴드가 무대에 올랐다.
‘언노운 플래닛(Unknown Planet)’. 이름처럼, 그들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듯한 음악을 했다. 특히 밴드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한 남자. 그는 무대의 중심에서, 자신만의 행성에 고립된 왕자처럼 보였다.
그의 이름은 김지민(당시 24세)이었다. 그는 잘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병약해 보이는, 날카로운 턱선과 깊은 눈을 가진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낡은 펜더 기타를 품에 안고 첫 코드를 튕기는 순간, 그는 이 공간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그의 음악은 어려웠다.
대중적인 멜로디 대신, 변칙적인 박자와 복잡한 화성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레시브 록. 어떤 부분은 속삭이듯 섬세했고, 어떤 부분은 모든 것을 파괴할 듯 폭발했다. 그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른다기보다, 내면의 상처를 토해내는 절규에 가까웠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그의 난해한 음악에 지루함을 느끼며 다시 자신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애경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녀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그 기묘한 선율 속에서,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누군가 대신 소리쳐주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 위의 지민에게 완전히 고정되었다.
한참 동안 자신만의 세계에서 유영하던 지민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폭발적인 연주 끝에 찾아온 짧은 정적의 순간, 그의 깊은 눈이 객석을 헤매다, 마치 자석처럼 한곳에 멈췄다.
맥주잔을 든 채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 송애경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지민은 그 순간, 자신의 음악을 온전히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의 영혼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공연이 끝나고, 지민은 무대 뒤에서 악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그의 등 뒤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오늘 공연, 정말 멋있었어요.”
돌아보니 아까 그 여자, 송애경이 서 있었다. 그녀는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지민은 조금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시끄럽기만 했을 텐데요, 다들 별로 안 좋아하는 음악이라.”
“아니에요. 전… 정말 좋았어요. 뭔가… 슬픈데, 되게 힘이 있었어요. 모순적인데… 아무튼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헤매는 그녀의 모습이 지민의 눈에는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김지민입니다.”
“송애경이에요. 여기서 일해요.”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애경의 작고 차가운 손을 감싸 쥔 지민의 손은, 기타 줄에 박인 굳은살 때문에 투박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그것이 그들의 시작이었다.
# 옥탑방, 사랑으로 채운 가난
그날 이후, 애경의 밤은 더 이상 고단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지민의 밴드가 공연하는 날이면 일을 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웠고, 일이 없는 날에는 다른 손님들처럼 테이블에 앉아 그의 음악을 들었다. 공연이 끝나면 두 사람은 홍대의 밤거리를 함께 걸었다.
“간호학은 왜 전공하게 됐어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지민이 물었다.
“음… 안정적이니까요. 시골에 계신 엄마한테 매달 손 벌릴 수도 없고… 어떻게든 서울에서 제 발로 서야 하니까요. 지민 씨는요? 왜 그렇게 어려운 음악을 해요? 조금만 더 쉽게 만들면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지민은 씩 웃었다. “쉬운 건 재미없잖아요. 세상에 널린 게 쉽고 재미있는 건데,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이게 나예요. 복잡하고, 가끔은 시끄럽고, 사람들이 잘 이해 못 하는 거. 그래도 언젠가는 알아줄 사람이 있겠죠. 애경 씨처럼.”
그의 말에 애경은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은 가난했지만,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며 밤을 지새웠다. 애경은 지민의 음악에 담긴 순수한 열정을 존경했고, 지민은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애경의 강인함을 사랑했다.
사랑은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어느 늦은 가을밤, 지민은 애경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동네,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낡은 옥탑방이었다. 방은 그의 악기와 앨범, 악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어지러웠지만, 창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되게… 멋있다.” 애경이 창밖을 보며 감탄했다.
“가진 게 이거밖에 없어서.” 지민이 그녀의 등 뒤에서 속삭이며 부드럽게 그녀를 안았다.
“이 풍경, 이제 애경 씨랑 같이 보고 싶은데. 어때요?”
그날 밤,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한 몸이 되었다. 낡은 옥탑방은 두 사람의 사랑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이 되었다.
얼마 후, 지민은 애경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애경아, 이제 그 클럽 일 그만둬.”
“뭐? 그럼 생활비는 어떡해…”
“내가 할게.”
“지민 씨 혼자 벌어서는 우리 둘 다 힘들어. 나 괜찮아.”
“안 괜찮아. 어젯밤에도 코피 흘렸잖아. 넌 지금 공부에만 집중해야 해. 네 꿈은 그냥 네 꿈이 아니야. 이제 내 꿈이기도 하니까. 내가 어떻게든 할게. 걱정 말고, 이제부터 넌 그냥 대한민국 최고의 간호사가 될 준비만 해.”
그의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말에 애경은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학업에만 전념했다. 지민은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늘리고, 틈틈이 곡을 쓰며 생활비를 벌었다. 고된 삶이었지만, 두 사람은 함께였기에 행복했다. 애경은 지민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4년 내내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 균열의 시작, 엇갈린 세상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애경이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형 병원의 간호사로 입사했을 때, 두 사람은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다. 하얀 간호사복을 입은 애경의 모습은 지민의 눈에 천사처럼 보였다.
“우리 애경이, 진짜 멋있다. 이제 고생 끝이네.”
“다 지민 씨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의 세상이 조금씩 엇갈리기 시작했다.
애경의 세계는 넓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생과 사가 교차하는 긴박한 현장에서 일했다. 의사, 부유한 환자, 성공한 사람들. 그녀가 병원에서 마주하는 세상은 지민과 함께 살던 옥탑방과는 전혀 다른 질서로 움직였다. 그녀는 조금씩 그 세상의 화려함과 안정감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반면, 지민의 세계는 좁아지고 있었다. 홍대의 음악 트렌드는 힙합과 일렉트로닉으로 빠르게 바뀌었고, 그가 고집하는 프로그레시브 록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라이브 클럽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공연 기회는 눈에 띄게 줄었다. 그는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해갔고,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우울증이 소리 없이 그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애경이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신나게 이야기할 때, 지민은 그저 힘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오늘 VIP 병동에 최연소 장관이라는 사람이 입원했는데, 사모님이 나보고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하더라. 아들이 검사래.”
“…….”
애경의 눈은 동경과 선망으로 반짝였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세상은, 더 이상 곡을 팔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지민이 감히 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점점 더 작아졌다.
결정적인 균열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밤, 지민이 애경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애경아… 우리 아기 가질까?”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우리 아직 자리도 못 잡았는데. 옥탑방에서 애를 어떻게 키워.”
“내가 더 열심히 일할게. 난… 그냥 우리 둘을 닮은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 뭔가… 새로운 희망이 필요해, 나.”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는 음악으로 잃어버린 존재의 의미를, 아이를 통해 찾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애경에게 임신과 출산은 경력 단절을 의미하는 공포스러운 단어였다.
“안돼. 적어도 2, 3년은 안 돼. 나 이제 겨우 간호사 됐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 없어.”
애경의 단호한 거절에 지민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했다. 그는 몰래 콘돔에 바늘로 작은 구멍을 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만하는, 이기적이고 비겁한 행동이었다.
얼마 후, 애경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쁨이 아닌, 배신감과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지민을 거칠게 추궁했고, 그는 모든 것을 실토했다.
“미안해, 애경아. 내가 정말 미안해. 하지만… 제발, 낳아줘. 응? 내가 다 책임질게. 우리 아기… 보고 싶어.”
그의 눈물 어린 애원에도 애경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지민 몰래 병가를 내고, 혼자 수술대에 올랐다. 차가운 기계가 그녀의 몸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긁어내는 동안, 그녀는 지민과의 사랑도 함께 지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투명하지만 결코 깨뜨릴 수 없는 벽이 생겼다. 그들은 한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행성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 금지된 유혹, 숙직실의 하룻밤
애경의 마음이 지민에게서 떠나가기 시작할 무렵, 운명은 그녀에게 새로운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날도 기나긴 야간 근무였다. 새벽 3시,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애경은 탈진한 몸을 이끌고 남자 숙직실로 향했다. 여자 숙직실은 이미 선배 간호사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시간에 숙직실을 이용할 의사는 거의 없었다.
그녀는 텅 빈 숙직실의 좁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자마자 잠의 늪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희미한 인기척에 그녀는 실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옆 침대에 눕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애경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길게 들어와 옆 침대에 누운 남자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오정후. 병원의 신이라 불리는, 그녀가 남몰래 흠모해왔던 바로 그 남자였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잠든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일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조각 같은 이목구비와 날렵한 턱선은 여전했다. 그의 세상은, 지민이 있는 옥탑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었다. 성공, 부, 명예. 그 모든 것을 가진 남자.
그 순간, 악마적인 충동이 그녀의 내면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마치 잠결에 뒤척이는 것처럼 오정후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것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큰 가슴을 감싸고 있던 브래지어의 후크를 소리 없이 풀었다. 그리곤 좀 더 도발적인 자세로, 마치 무방비 상태인 것처럼 누웠다. 모든 것은 그녀의 본능이 시킨 일이었다. 지긋지긋한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본능.
잠시 후, 오정후가 잠에서 깼다. 그는 갈증에 물을 마시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옆 침대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한 간호사가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얇은 간호사복 위로,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풍만한 가슴의 윤곽이 달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숨결에 따라 그녀의 몸은 유혹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오정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잠자던 욕망이 순식간에 깨어났다.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그녀의 가슴을 눈으로 샅샅이 훑어 내렸다.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이 밀려왔다. 그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듯, 떨리는 손을 뻗어 조용히 그녀의 가슴에 가져갔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애경은 자는 척하며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부할 수 없는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꿰뚫었다. 그녀는 일부러 “으음…” 하고 교성을 흘리며 그의 손길을 더 자극했다. 다리를 살짝 벌리며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마침내 오정후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는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치마를 살짝 들추고는 팬티에 손을 가져갔다. 이 모든 상황은 그녀가 정녕 원했던 바. 마침내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어둡고 고요한 숙직실 안에서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송애경은 오정후의 은밀한 애인이 되었다. 병원 내 가장 인기 있는 의사와 가장 예쁜 간호사의 만남.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처럼 보였다. 그녀는 최고급 호텔의 실크 시트와 명품 선물에 길들여져 갔다. 지민이 있는 낡은 옥탑방은 점점 더 초라하고 질식할 것 같은 공간으로 변해갔다.
결국, 오정후와 관계를 가진 지 6개월 만에, 송애경은 지민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지민 씨, 우리… 그만하자.”
“…….”
“미안해. 나… 더 이상은 힘들어.”
그녀는 그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그저 깊고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청춘과 사랑이 담긴 옥탑방에서 짐을 싸서 나왔다.
# 마포대교에서 걸려 온 전화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송애경은 병원 비상계단에서 오정후와 격렬한 정사를 벌인 참이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자신의 교성이 아직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고 번진 립스틱을 고쳐 바르고 있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욕망으로 상기되어 낯설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낯선 번호로 울렸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딱딱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울 마포경찰서 형사과 OOO 경장입니다. 송애경 씨 맞으십니까?”
“네, 그런데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김지민 씨가 남편 되십니까?”
“아뇨… 아, 그냥… 어… 전 남자친구인데요…” 그녀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 네. 김지민 씨 휴대폰에 ‘아내♥’라고 저장되어 있어서요.”
‘아내♥.’ 그 단어가 비수처럼 애경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아직 자신을 지우지 못했던 것이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네. 드릴 말씀이… 김지민 씨가, 사망하셨습니다.”
“네? 사…망을 했다고요? 아니, 어떻게… 왜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는 듯했다. 화장실의 타일과 세면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형사의 마지막 말이 그녀의 귀를, 그리고 영혼을 관통했다.
“마포대교에서… 투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