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2024년 4월 4일, 목요일.
도시가 가장 깊은 숨을 내쉬는 새벽 4시.
안개가 눅눅한 수의처럼 도시의 뒷골목을 감싸고 있었다.
불 꺼진 다세대 주택들이 묘비처럼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주택가. 그 음울한 풍경 속, 낡은 국산차 한 대가 그림자처럼 숨어 있었다.
차 안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은 패스트푸드의 기름 냄새와, 하룻밤을 꼬박 새운 두 남자의 피로가 뒤섞여 탁했다.
운전석에 앉은 강태식 형사는 햄버거의 마지막 한 조각을 억지로 씹고 있었다. 종이처럼 퍽퍽한 빵과 차가운 패티가 혀 위에서 겉돌았지만, 그는 맛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충혈된 그의 두 눈은 안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한 다세대 주택의 2층 창문에 못 박혀 있었다. 귀에는 허름한 이어폰이 꽂혀, 그 창문 안에서 벌어지는 소리의 우주를 탐색하고 있었다.
“아, 진짜 껌도 단물이 다 빠졌네.”
조수석의 김형사가 질겅거리던 껌을 창밖으로 뱉으며 투덜거렸다. 그의 얼굴에도 밤샘의 고단함이 역력했다.
“조용히 해. 집중 안 돼.”
강태식의 목소리는 잠기다 못해 갈라져 나왔다.
“아니, 선배님. 이게 벌써 몇 시간째입니까. 그냥 마사지하고, 그렇고 그런 소리만 한 시간째인데. 이번에도 허탕 치는 거 아닙니까? 저번처럼 증거 하나 없이 풀어주고 나면 우리만 바보 되는 거라고요.”
김형사의 말에 강태식은 대답 대신 미간을 셔터처럼 굳게 내렸다.
예전의 기억이 쓰라린 흉터처럼 되살아났다.
‘손상식.’ 그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도 출장 마사지사의 실종 신고 때문이었다.
당시에 업주 사장은 마지막 통화 상대로 손상식을 지목했다.
강태식은 그의 집을 샅샅이 뒤졌다. 루미놀 반응부터 시작해 머리카락 한 올, 미세 섬유 하나까지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손상식의 집은 소름 끼칠 정도로 깨끗했다.
마치 대청소를 갓 마친 모델하우스처럼, 어떤 삶의 흔적도, 범죄의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혐의없음으로 풀려났고 며칠 뒤 연기처럼 이사를 가버렸다.
실종된 여자는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도망을 간 건지, 살해된 건지. 사건은 그렇게 미제의 서랍 속에 처박혔다.
“이번엔 달라.” 강태식이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증거야. 업주 놈이 자기 귀를 건다고 했어. 그 때 그놈 목소리랑 똑같다고.”
“그놈 목소리가 뭐, 성우 목소리처럼 특이한 것도 아니고… 법정에서 그게 먹힐까요?”
“먹히든 안 먹히든, 지금 저 안에 들어간 애가 비명이라도 지르면 그땐 현행범으로 덮칠 수 있어. 그거면 돼.”
이번에는 업주 사장의 집요함이 판을 다시 깔았다. 손상식은 가명을 썼지만, 업주는 통화 너머로 들려오는 특유의 허스키하면서도 섬뜩한 음색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곧장 강태식에게 연락했고, 강태식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마사지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그녀의 작은 가방에는 초소형 녹음기와 비상용 전기 충격기를 숨겨주었다.
그녀가 저 문턱을 넘은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김형사의 말대로였다.
어색한 첫인사, 마사지를 위한 준비, 그리고 오일 바르는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손상식의 능글맞은 농담들. 그러다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뒤섞이며 육체가 부딪히는 질척한 소음으로 변해갔다.
지금까지는, 그저 평범하고 저속한 거래 현장일 뿐이었다. 강태식의 초조함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대로 여자가 무사히 걸어 나온다면, 그는 또다시 패배하는 것이다. 연쇄 살인범일지도 모르는 짐승을 눈앞에 두고도 돌려보내야 하는 무력감.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순간이었다.
“아악-!”
이어폰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고막을 후벼 팠다. 그것은 쾌락의 교성이 아니었다. 공포와 고통으로 가득 찬, 생의 마지막 단말마와도 같은 절규였다.
“지금이야! 가자!”
강태식의 외침과 함께 두 형사는 용수철처럼 차에서 튀어 나갔다. 눅눅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동안에도 이어폰에서는 격렬한 몸싸움 소리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 여자의 흐느낌, 그리고 남자의 분노에 찬 신음.
“열어! 이 새끼야, 문 열어!”
강태식은 낡은 철문을 미친 듯이 걷어찼다. 거의 부서질 듯 문을 흔들던 그는 결국 어깨로 문을 들이받았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문이 열렸다.
집 안의 풍경은 아수라장이었다. 방 한가운데, 속옷 차림의 여자가 전깃줄로 손발이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상의를 탈의한 채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
손상식. 취조실에서 보았던 그 서늘한 눈빛의 사내였다.
“손상식!”
강태식이 소리치는 순간, 손상식은 짐승 같은 반사신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창문을 주먹으로 깨부수고는 그 비좁은 틈으로 몸을 날렸다.
“김형사! 피해자 먼저 챙겨!”
강태식은 김형사에게 소리치고는 곧바로 손상식의 뒤를 쫓아 깨진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발목에 유리가 스치는 아픔이 느껴졌지만, 아드레날린이 통증을 지워버렸다.
숨 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손상식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어둠에 익숙한 한 마리 거대한 들고양이 같았다. 1층의 축축한 바닥을 박차고 옆 건물의 가스 배관을 붙잡고 순식간에 벽을 기어올랐다. 강태식도 녹슨 철제 난간을 잡고 필사적으로 그를 따랐다.
다세대 주택들이 미로처럼 얽힌 옥상.
손상식은 옥상과 옥상 사이를 성큼성큼 건너뛰며 달아났다. 강태식도 이를 악물고 그 뒤를 쫓았다. 낡은 옥상 바닥의 방수 페인트가 발밑에서 부스러졌다. 몇 번이고 미끄러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 이어졌다. 한 건물 옥상에서 다음 건물로 뛰어내리는 순간, 강태식은 손상식의 발목을 거의 잡을 뻔했다. 그의 손끝이 손상식의 바짓단을 스치는 찰나, 손상식은 비웃음이라도 흘리듯 몸을 비틀어 달아났다.
새벽의 어둠은 서서히 걷히고,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추격전의 끝은 허무했다. 손상식은 마지막 건물을 뛰어내려 미로 같은 골목길 어둠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허억… 허억… 이 개자식…!”
강태식은 무릎에 손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허탈함과 분노가 온몸을 짓눌렀다. 또 놓쳤다. 눈앞에서, 또.
# 패배자의 소주
집에 돌아왔지만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텅 빈 집의 정적이 그의 패배감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샤워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찬장 구석에 처박혀 있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김치가 담긴 반찬통을 식탁 위에 되는대로 던져놓았다.
소주잔을 채울 여유도 없었다. 그는 병째로 소주를 들이켰다. 알싸하고 쓴 알코올이 식도를 태우며 위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손상식의 그 비웃는 듯한 얼굴과, 공포에 질려있던 여자의 눈동자가 번갈아 떠올랐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애초에 놈을 풀어주지 말았어야 했어.’
후회와 자책이 독처럼 퍼져나갔다. 그는 괴로움을 잊으려는 듯 다시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식어버린 컵라면 면발이 불어터져 국물을 모두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삶처럼, 팍팍하고 불어터진 인생. 그는 젓가락을 들어 면을 한입 가득 쑤셔 넣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자, 지독한 피로와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소파 위에 시체처럼 쓰러져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끝없이 옥상 위를 달리고 있었다.
# 지옥의 호출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전화벨 소리에 강태식은 번쩍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숙취와 피로가 뒤엉켜 온몸이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창밖은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반이 넘어 있었다.
“여보세요…”
잠에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김형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배님! 저 김형사입니다! 지금 일어나셨습니까?”
“어… 왜.”
“선배님, XX 특급 호텔 앞으로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호텔 옥상에서 누가 투신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빨리요!”
투신. 그 단어에 강태식의 잠이 확 달아났다.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호텔 앞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폴리스라인이 넓게 쳐져 있었고, 그 안으로 수많은 경찰과 구급대원, 그리고 언론사 기자들까지 몰려들어 아수라장이었다. 호기심과 충격에 휩싸인 구경꾼들은 스마트폰을 들어 현장을 찍어대기 바빴다.
강태식은 인파를 헤치고 폴리스라인을 넘었다. 사건의 중심에는 감식을 위해 임시로 쳐놓은 하얀 텐트가 있었다. 그를 발견한 김형사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상황은?”
“일단 자살로 추정됩니다.”
김형사가 손가락으로 아득히 높은 호텔 옥상 끝을 가리켰다. 강태식도 고개를 들어 그곳을 쳐다보았다. 인간이 만든 바벨탑의 끝에서 추락한 한 생명의 절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데… 사망자가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여인이, 투신한 여자 밑에 그대로 깔렸습니다.”
강태식이 텐트 쪽으로 다가가자, 감식반 직원이 텐트의 일부를 살짝 걷어 보여주었다. 그 순간, 강태식은 숨을 헙 들이마셨다. 수많은 변사체를 봐 온 베테랑 형사였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두 여자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지고 뒤엉켜, 마치 추상적인 공포를 조각해 놓은 끔찍한 예술 작품 같았다. 그는 역겨움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신원은 파악됐나?”
“네. 투신한 여자는 김민지, 34세입니다. 사원증이 가방에 있었습니다. 바로 길 건너편 SM 소프트 직원입니다. 그리고 깔린 여자는 송애경, 31세. XX 대형 병원 간호사로 밝혀졌습니다.”
김형사의 보고를 듣던 강태식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잠깐. 목격자는?”
“아, 있습니다. 의사인데요. 방금까지 저기서 진술하고 있었는데… 사망한 송애경 씨와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이름이… 오정후 박사라고, 방송에도 자주 나오는 유명한 의사입니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김형사는 두리번거리며 방금 전까지 오정후가 서 있던 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모르핀, 그리고 파멸의 질주
그 시각, 닥터 오정후는 짐승처럼 도망치고 있었다. 김형사가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 틈을 타, 그는 인파 속으로 몸을 숨겨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온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조금 전 눈앞에서 펼쳐졌던 지옥도. 그리고 자신을 향하던 송애경의 마지막 눈빛. 그 잔상이 악령처럼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들키면 안 돼. 내가 그녀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내 인생은 끝이야.’
그의 명성, 그의 지위, 그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공포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자신의 차, 육중한 검은색 캐딜락 운전석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도저히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손이 덜덜 떨려 키를 꽂을 수도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됐다. 이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는 다시 재킷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차갑고 단단한 바이알 병. 모르핀이었다. 이성을 되찾기 위해, 그는 다시 한번 악마의 유혹에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주사를 마친 그는, 시트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약효가 퍼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평온이 찾아왔다. 심장의 광란이 잦아들고, 손의 떨림이 멈췄다. 눈앞을 아른거리던 송애경의 잔상도 희미해졌다. 그는 다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닥터 오’로 돌아왔다.
안정을 되찾은 그는 천천히, 아주 조용히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지상의 혼란을 뒤로하고, 그는 유유히 도로에 합류했다. 지금 당장 이 끔찍한 장소에서 벗어나야 했다. 병원으로,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점점 더 가속 페달을 깊이 밟았다. 도시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조금 전의 끔찍한 장면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그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모르핀의 효과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동공이 풀리고, 현실 감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주변의 차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다. 도로의 선들이 꿈틀거리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차는 어느새 고가도로 위를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환각이 펼쳐졌다. 조수석에, 피투성이가 된 송애경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부릅뜬 눈으로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소리 없이 입을 뻥긋거리고 있었다.
‘왜… 왜…’
“으아아악!”
오정후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격하게 꺾었다.
끼이이이익-! 쾅!
육중한 캐딜락은 통제 불능 상태로 미끄러지며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쇠가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차는 가드레일을 종잇장처럼 구기고는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한순간, 그의 차는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 듯 허공에 떠올랐다. 그 짧은 찰나, 오정후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아득한 아래 도로를 평화롭게 지나가는 한 대의 승용차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차가, 거대한 강철의 관이 되어 그 위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가 본 마지막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