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2024년 4월 4일, 목요일. 봄의 한가운데.
새벽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알람 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김민지(34세)는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약속처럼 스스로 눈을 떴다.
침실 창문으로 스며드는 새벽빛은 회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부드러운 벨벳 같았다. 세상이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는 시간, 그녀는 이불을 걷어내고 아주 천천히, 마치 물속을 유영하듯 몸을 일으켰다.
모든 동작에 불필요한 서두름이 없었다.
오늘, 그녀의 시간은 다른 누구의 것과도 다른 속도로 흘러갈 터였다.
욕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서른네 해의 세월이 희미한 흔적을 남긴, 낯설면서도 익숙한 맨얼굴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 시간, 얼굴이라는 캔버스 위에 완벽한 갑옷을 입히기 시작했을 것이다. 피부의 결점을 가리는 파운데이션, 날카로운 인상을 만드는 아이라이너, 세상을 향한 방어벽처럼 짙고 붉은 립스틱까지. 그것은 출근이 아니라 출전에 가까운 의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스킨과 로션만으로 아주 간단히 피부를 정돈했다. 화장대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색조 화장품들은 마치 과거의 유물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이게… 진짜 내 얼굴이었구나."
나직한 혼잣말이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 흩어졌다. 화장을 하지 않으니 오히려 숨겨져 있던 본연의 선이 드러났다. 가려지지 않은 작은 점과 옅은 주근깨마저 그녀의 일부가 되어 담담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짙은 화장이라는 갑옷을 벗어 던진 여인은,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선명해 보였다.
옷장 앞에서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몸을 조이는 불편한 오피스룩 대신, 부드러운 면 소재의 하얀 블라우스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편안한 회색 스커트를 골랐다.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주방 식탁 위에는 어젯밤 꼬박 새워 쓴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얀 봉투 위에는 '엄마에게'만 쓰여 있었다.
그녀는 봉투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어보았다. 종이의 감촉, 그 안에 담긴 단어들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더 이상 눈물은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쏟아낸 뒤 찾아오는 기이한 평온함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편지를 소중히 가방에 넣은 그녀의 손길은 더없이 침착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텅 빈 집을 향한 인사는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고 무겁게 울렸다.
# 거리, 풍경을 담다
아파트 현관을 나선 민지는, 처음 세상에 나온 아이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 그녀의 걸음은 언제나 목표 지점인 지하철역을 향해 직선으로 내달렸다. 주변 풍경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무의미한 배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발걸음은 느리고 유유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뿌연 미세먼지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4월의 태양. 그 빛이 이렇게 따스했던가. 가로수의 어린 잎사귀들은 햇살을 받아 연초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젯밤 내린 비를 머금은 보도블록 틈새에서 작은 민들레가 앙증맞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런 게 있었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노란 민들레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출근길에 미친 사람처럼 길바닥에 앉아있는 그녀를 행인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힐끔거렸지만, 민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타인의 시선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빵집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빵 냄새, 커피 전문점의 진한 원두 향기, 분주하게 가게 문을 여는 상인들의 활기찬 목소리.
세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의 소리와 냄새와 풍경을 펼쳐내고 있었다. 변한 것은 오직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녀 자신뿐이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놓쳐버렸던 세상의 모든 디테일이, 비로소 그녀의 감각 속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 지하철, 인간 군상의 축소판
지하철역은 거대한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었다. 스크린도어 앞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긴 벽이 만들어졌고, 모두의 얼굴에는 조급함과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땡, 땡, 땡, 땡.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무감정한 안내 방송과 함께 열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쏟아져 내리려는 사람들과 밖에서는 밀고 들어가려는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닫히려는 문틈으로 가방을 들이밀고, 찌그러진 얼굴로 억지로 몸을 구겨 넣는 사람들. 그 처절한 아침의 전쟁을, 민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제까지의 나도 저들 중 하나였지.'
한 발이라도 먼저 내딛기 위해, 남을 밀치고 어떻게든 저 쇳덩이 상자 안에 몸을 싣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자신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듯, 그 모든 소란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한 대의 열차가 사람들로 가득 찬 채 떠나갔다. 곧이어 다음 열차가 도착했지만, 민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플랫폼에 서서 오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들의 분주한 몸짓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웃는 사람, 찡그린 사람, 통화하는 사람, 이어폰을 꽂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사람. 수많은 인생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그녀는 투명한 유령처럼 존재했다.
세 번째 열차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인파에 몸을 맡겼다. 떠밀리듯 열차에 올라탄 그녀는 문 바로 옆, 구석진 곳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숨 막히는 열기, 땀과 향수가 뒤섞인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의 몸에 밀착된 채, 거대한 기계의 일부가 되어 흔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
처음에는 그저 사람이 많아 어쩔 수 없이 닿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손길은 집요했다. 그녀의 엉덩이 위를 노골적으로 훑다가, 이내 천천히 엉덩이 골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불쾌하고 더러운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평소의 김민지였다면, 그 즉시 돌아서서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을 것이다.
"이 손 안 치워요? 경찰서 가고 싶어요?" 날카로운 눈으로 남자를 쏘아붙이고 주변의 시선을 집중시켜 그를 매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마네킹의 몸에 누군가 손을 댄 것처럼 무심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어두운 터널의 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몸이라는 감옥을 떠나, 더 높은 곳에서 이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침묵은 남자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그의 불결한 손은 이제 그녀의 스커트 밑단으로 파고들어 맨살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민지는 피하거나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기억 속에 새기려 애썼다.
낡은 광고 스티커, 손잡이에 묻은 희미한 손때, 맞은편 좌석에 앉아 졸고 있는 여자의 지친 얼굴까지. 이 세상의 모든 조각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의 눈동자는 아주 느리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안내 방송이 강남역 도착을 알렸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남자의 손은 그녀의 팬티 속까지 침범하여 수차례나 그녀를 유린했다.
민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파를 헤치고 열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자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채운 채 서 있었다.
# 회사, 익숙한 공간
개찰구를 빠져나와 익숙한 회사 건물로 향하는 길.
출근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그녀가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사무실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동료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놀라움과 의아함이 가득했다.
"민지 씨, 늦었네? 무슨 일 있어?"
"어머, 김 비서님. 웬일이세요, 이 시간에. 몸이라도 안 좋으세요?"
수군거리는 소리와 걱정 어린 질문들이 쏟아졌다.
사장의 비서인 그녀가 단 1분이라도 지각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늘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도착했다.
사장의 책상을 정리하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에스프레소 원두를 갈아 쿠키와 함께 세팅해놓는 것은 그녀의 변치 않는 아침 의식이었다.
민지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늦잠을 좀 잤어요."
그녀의 대답에 사무실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김민지가 늦잠을?'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켰다. 하지만 평소처럼 인터넷 쇼핑몰을 기웃거리거나 메신저로 친구와 잡담을 나누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거나, 걸려오는 전화를 기계적으로 받을 뿐이었다.
마침 사장이 출장 중이라 커피를 준비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 외의 다른 일들도 그녀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이방인처럼, 자신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공간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책상 위 작은 화분, 동료들의 웃음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복합기에서 종이가 출력되는 소리까지. 이 모든 풍경을 그녀는 기묘할 정도로 차분하게 지켜봤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동료들은 다시 한번 술렁였다.
"어? 민지 씨, 식당 가게?"
"도시락 안 싸왔어, 오늘?"
그랬다. 그녀는 사장과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항상 집에서 정성껏 싼 도시락을 먹었다. 구내식당의 소란스럽고 번잡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제 발로 구내식당을 찾은 것은 동료들에게 또 하나의 '이상한 행동'으로 기록되었다.
그녀는 식판에 음식을 담아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음식의 맛을 하나하나 음미하듯 밥을 먹었다.
주변에서 자신을 힐끔거리는 동료들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눈이 마주치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식당 구석구석,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 도시의 풍경.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만찬의 배경으로 삼아 기억 속에 저장했다.
# 4월 4일 오후 4시 4분
마침내 퇴근 시간을 두어 시간 앞둔 시각. 민지는 아무런 예고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챙겨 들고 비서실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동료들은 의아하게 바라볼 뿐,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회사를 나온 그녀는 길을 건넜다. 그녀의 목적지는 길 건너편,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특급 호텔이었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망설임 없이 가장 높은 층, 'Rooftop'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눈앞에 별세계가 펼쳐졌다.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여러 차례 방송에도 소개된 옥상 정원이었다. 잘 가꿔진 꽃과 나무, 작은 분수와 아늑한 벤치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비밀의 화원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지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사람처럼, 정원을 아주 천천히 거닐었다. 형형색색의 튤립, 달콤한 히아신스 향기, 뺨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그녀는 오감을 열어 이 지상의 낙원을 만끽했다.
한참을 걷던 그녀는 옥상 가장자리, 길 건너편 자신이 일하던 비서실 창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오랫동안, 미동도 없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후회? 미련? 아니면 해방감? 그녀의 표정은 그저 고요해서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곳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려 난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구두를 벗어 가지런히 옆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차가운 난간을 두 손으로 잡았다. 발아래로 수십 층 아래의 세상이 개미처럼 아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엄마의 얼굴, 동생의 웃음소리, 그리고 자신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더없이 맑고 평온했다.
그녀는 난간을 넘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마치 새처럼, 아주 자유롭게.
시계탑의 시계가 정확히 오후 4시 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24년 4월 4일, 그녀의 시간은 그렇게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