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정사 (情死)

시즌 1

by 남킹

같은 날, 2024년 4월 4일, 목요일. 서울의 심장부.

메스가 그리는 한 줄기 붉은 선.

그 선을 따라 생과 사의 경계가 아슬아슬하게 열렸다. 수술실의 공기는 서늘하고 팽팽했다. 모니터의 규칙적인 파열음, 보조 의사들의 긴장된 숨소리, 기계들이 내는 금속성의 미세한 소음만이 가득한 그곳에서, 오정후(40대 후반)는 지휘자였다. 그리고 수술대는 그의 무대, 메스는 그의 지휘봉이었다.

“석션(suction).”

나직하지만 권위 있는 그의 목소리에 간호사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시야를 가리는 피가 투명한 관으로 빨려 들어갔다. 드러난 환부는 신이 만든 가장 정교한 미로와 같았다. 수많은 혈관과 조직이 얽힌 그곳에서, 그는 단 하나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탐험가였다.

그의 눈은 매처럼 날카로웠고, 손길은 예술가처럼 섬세했다. 시간은 그의 손안에서 순한 양이 되었다. 조급함도,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완벽한 통제와 절대적인 자신감만이 그의 몸을 지배했다.

오늘의 수술은 VIP 환자의 간 절제술. 중요한 수술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최근 방송 출연으로 얻은 ‘스타 의사’라는 명성은 그의 어깨를 무겁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오만함을 단단하게 만드는 갑옷이 되어주었다. 그는 즐기고 있었다. 이 모든 관심과 긴장,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경외의 시선들을.

“바이폴라(bipolar).”

지혈을 위한 전기 소작기가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단백질 타는 냄새가 비릿한 피 냄새와 소독약 냄새에 섞여 수술실의 공기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그는 마지막 봉합을 마쳤다.

“수술 종료. 바이탈 안정적인 거 확인하고 중환자실로 옮기도록.”

그가 마스크를 벗자, 땀으로 축축한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주변을 둘러싼 레지던트들의 눈에는 존경과 선망이 가득했다. 그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는 왕국을 떠나는 왕처럼 당당하게 수술실을 나섰다.

# 자유, 그리고 새로운 사냥감

수술 가운을 벗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는 그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4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그의 몸은 여전히 탄탄했다.

주말마다 즐기는 테니스와 사이클, 이른 새벽 한강 변을 달리는 조깅은 단순한 건강 관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을 거스르고 젊음을 붙잡으려는, 그의 치열한 자기 관리의 증거였다.

늙고 병드는 것은 그에게 패배와도 같았다. 그는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언제나 승자여야 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4월의 햇살이 그의 기분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긋지긋했던 이혼 소송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었다. 해방감. 그래, 지금 그를 감싸고 있는 이 감정은 분명 해방감이었다.

전 아내는 국내 굴지의 재벌, YS 그룹 외동딸이었다.

가난한 의대생이었던 오정후에게 그녀는 신분 상승을 위한 가장 확실한 동아줄이었다. 그는 그녀의 차가운 눈빛과 칼날 같은 자존심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줄을 잡았다. 야망은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감정을 비웃으며 그를 전진하게 했다.

결혼 생활은 쇼윈도였다.

화려하게 장식되었지만, 그 안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내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다른 남자가 있었다.

학창 시절 그녀를 사로잡았던 무명의 화가. 집안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했던 사랑의 도피는, 결국 지독한 가난 앞에 무릎 꿇고 몇 년 만에 막을 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패배자였고, 오정후와의 결혼은 그녀가 세상에 던지는 자포자기의 선언 같은 것이었다.

그는 아내가 옛사랑을 잊지 못하고 틈만 나면 그 화가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내의 집안이 제공한 병원장이라는 직함과 부유한 생활.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아내의 공허함을 방패 삼아 자유롭게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간호사, 제약회사 영업사원, 환자의 보호자까지. 그의 사냥감은 가리지 않았다. 서로의 위선을 묵인하는 것, 그것이 그들 부부가 유지해 온 기묘한 평화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언론이 그들의 위태로운 평화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쇼윈도 부부’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모든 것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는 병원장 자리에서 물러나 지금의 대형 병원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고, 이후 1년간의 지루한 재산 분할 소송이 이어졌다.

“후우…”

오정후는 집무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막대한 재산을 내주긴 했지만, ‘스타 의사’라는 명성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고 자유까지 얻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사냥. 그의 입가에 사냥꾼의 미소가 걸렸다.

그는 스마트폰을 들어 은밀하게 관리하는 목록을 열었다. 여러 여자의 이름이 저장된 그 목록에서 그의 손가락은 한 이름 위에 멈췄다.

‘송애경.’

그녀를 떠올리자 기분 좋은 나른함이 온몸에 퍼졌다.

병동의 간호사인 그녀는 유난히 그를 잘 따랐다. 무엇보다 속궁합이 기가 막혔다. 그의 다소 변태적인 요구, 예를 들면 병원 비상계단에서의 자극적인 정사나 야외에서의 은밀한 플레이까지도 그녀는 스릴을 즐기듯 기꺼이 받아주었다. 복종적이고, 순진하면서도 대담한 여자. 오늘의 해방감을 축하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파트너였다.

[오후에 시간 어때? 점심이나 같이 할까. 보고 싶네.]

메시지를 보낸 그는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가 거절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다음 계획을 그리고 있었다. 뜨거운 한낮의 정사, 그리고… 오늘 아침 병원을 나서기 전, 몰래 챙겨온 작은 바이알(vial) 병. 모르핀. 쾌락의 정점을 맛보기 위한 그만의 비밀스러운 무기였다.

# 희망이라는 달콤한 독

“띠링-“

밤샘 근무의 고단함이 온몸을 납처럼 짓누르던 순간,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울었다. 간호사 송애경(31세)은 막 잠의 늪으로 빠져들려던 참이었다. 힘겹게 눈을 떠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닥터 오.’

그의 이름이 뜨자마자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오후에 시간 어때? 점심이나 같이 할까. 보고 싶네.]

‘보고 싶네.’

그 세 글자가 그녀의 심장에 불을 질렀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켜 자판을 두드렸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적당한 튕김과 설렘을 담아서.

[정말요? 저 방금 퇴근해서 엉망인데… 그래도 괜찮으시면요. 저도 보고 싶어요, 선생님.]

거의 동시에 답장이 왔다.

[XX 호텔 로비에서 12시에 봐. 엉망인 모습도 예쁠 것 같은데?]

그의 능숙한 밀어붙이기에 애경은 얼굴을 붉히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그녀가 잠들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두어 시간 남짓. 하지만 상관없었다. 피곤함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1년 넘게 이어온 은밀한 관계. 처음에는 그저 하룻밤의 불장난일 거라 생각했다. 병원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부남 의사와 평범한 간호사.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마성 같은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가 부쩍 그녀를 더 자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혼했다. 돌아온 싱글이 된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게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 애경의 심장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밤샘 근무로 푸석해진 얼굴이었지만, 이목구비만큼은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녀는 오정후의 아내가 되어 병원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의사 사모님. 그 달콤한 단어가 혀끝을 맴돌았다.

그녀는 잠자리에 드는 대신, 욕실로 들어가 정성껏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매만졌다.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얼마 전 큰맘 먹고 산, 몸의 곡선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실크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에게 가장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잠은 사치였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인생을 건 도박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 욕망이 교차하는 밀실

정오의 햇살이 쏟아지는 호텔 로비. 애경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해 창가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통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한껏 멋을 낸 모습이 마치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귓가에 울리는 익숙한 저음. 돌아보자 멀끔한 캐주얼 정장 차림의 오정후가 서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아닌 듯, 대담한 그의 행동에 애경의 심장이 다시 한번 세차게 요동쳤다.

“아니에요, 방금 왔어요.”

“올라갈까?”

그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그녀를 훑었다. 그 뜨거운 시선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 안, 단둘이 남게 되자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입술을 포갰다. 그의 키스는 언제나처럼 격렬하고 탐욕스러웠다. 그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키스에 애경은 숨이 가빠왔다.

‘띵.’

객실 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두 사람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후… 빨리 들어가자. 못 참겠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객실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신호탄처럼 울렸다.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창밖의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방 안의 시간은 오직 원초적인 욕망의 리듬에 맞춰 흘러가고 있었다.

오정후는 여자를 다루는 데 능숙했다. 그는 지난 수많은 밤 동안 갈고닦은 기술로 애경을 쾌락의 절정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모든 민감한 곳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어떤 자극에 약한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애경은 그의 리드에 몸을 맡긴 채 정신없이 흔들렸다.

“애경아.”

“네… 선생님…”

“넌… 날 미치게 만들어.”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달콤한 말들은 그녀에게 마약과도 같았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다. 그의 약간은 변태적인 요구들마저도, 그녀에게는 사랑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가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특별한 모습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오정후의 머릿속은 냉정했다.

그는 여러 여자를 만나지만 그중 송애경을 꽤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녀와의 섹스는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다시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만약 한다고 해도, 그 상대는 결코 송애경 같은 평범한 여자가 될 수 없었다.

그의 야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재산을 불려주고, 그의 명성을 더 높은 곳으로 올려줄 수 있는 재력가나 권력가의 딸. 그것이 그가 그리는 다음 아내의 모습이었다.

송애경은 그저,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잠시 쉬어가는 달콤한 휴식처일 뿐이었다.

한바탕 폭풍 같은 정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숨을 골랐다. 애경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선생님.”

“응.”

“이제… 우리 자주 볼 수 있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오정후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럼. 이제 방해할 사람도 없는데.”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다정해서, 애경은 그 말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어버렸다.

“배고프지? 뭐 좀 시킬까? 여기서 점심 먹고… 조금 더 있다가 가자.”

오후 6시에 잡힌 수술 전까지만 병원에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는 한번 더 그녀와 정사를 벌일 속셈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정사에서는, 그가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 모르핀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네, 좋아요. 선생님이랑 같이 있으면 뭐든 다 좋아요.”

애경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는 룸서비스 메뉴판을 들어 스테이크와 와인을 주문했다. 완벽한 오후였다. 그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 계획의 균열, 잠든 욕망

점심 식사가 끝나고, 와인 기운에 노곤해진 애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밤샘 근무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잠깐만… 5분만 눈 좀 붙일게요, 선생님.”

“그래, 그래. 좀 자.”

오정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잠깐’이 문제였다. 그녀는 너무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정후는 잠든 그녀의 몸을 만지며 그녀가 깨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여유롭게 기다렸지만, 시계가 3시를 넘어서자 그의 얼굴에 조금씩 짜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의 완벽한 계획에 균열이 생겼다. 두 번째 정사, 그리고 모르핀으로 완성될 쾌락의 피날레가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그는 잠든 애경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평온하게 잠든 그녀의 얼굴이 순간 밉살스러워 보였다.

결국 3시 30분이 되어서야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억지로 깨웠다.

“애경아, 일어나.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차갑고 사무적이었다.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 애경은 시계를 보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머!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너무 정신없이 잤나 봐요.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 피곤했겠지. 어서 씻고 준비해.”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망쳐버린 오후에 대한 아쉬움과 분노가 그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었다. 두 번째 정사가 틀어지자, 쾌락에 대한 갈증은 오히려 더욱 강렬해졌다.

두 사람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어색한 침묵이 방 안을 감돌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오정후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모르핀.’ 이대로 그냥 병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망쳐버린 쾌락을 어떻게든 보상받고 싶었다.

호텔 로비를 막 나서려는 찰나, 그는 애경에게 말했다.

“아, 나 화장실 좀.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애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인적이 없는 칸에 들어간 그는 망설임 없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바이알 병과 주사기를 꺼냈다. 그의 손놀림은 수술을 할 때처럼 침착하고 정교했다. 고무마개를 뚫고 투명한 액체를 주사기로 빨아들인 그는, 자신의 팔뚝 혈관에 정확히 바늘을 꽂아 넣었다.

주사기 안의 액체가 그의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순간, 짜릿한 전율과 함께 기이한 평온함이 찾아왔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멀어지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기분이었다. 망쳐버린 오후에 대한 분노는 눈 녹듯 사라지고, 신이라도 된 듯한 전능감이 그를 채웠다.

한결 기분이 좋아진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을 나섰다.

# 4월 4일, 하늘이 무너지다

호텔 회전문을 밀고 나오자, 4월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송애경이 그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이제 가요, 선생님.”

그녀의 얼굴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와 함께할 밝은 미래를 꿈꾸는 여인의 얼굴이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오정후의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희미한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지만, 모르핀이 주는 쾌감은 그 감정마저 부드럽게 지워버렸다. 그도 그녀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무언가 거대한 것이 그들을 덮쳤다. 그 충격의 여파로 오정후는 비틀거리며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귀가 먹먹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의 뇌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넘어진 자리에서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자신을 보며 웃고 있던 송애경. 그녀의 위로, 낯선 여자가 기괴한 형태로 엉겨 붙어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그 여자는 송애경을 그대로 덮쳐 두 사람을 하나의 끔찍한 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꺾인 팔과 다리, 터져버린 머리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호텔 앞 보도블록을 빠르게 적시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주변 사람들의 비명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정후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고정되었다. 피와 살점이 뒤엉킨 그 참혹한 몰골 속에서, 송애경의 눈.

그녀의 두 눈은 여전히 부릅뜬 채, 허공 속의 그를, 오정후를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놀람, 고통, 그리고 배신감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왜?’라고 묻는 듯했다.

그녀의 마지막 시선은, 낙인이 되어 그의 망막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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