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앙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의 시선
역사의 천사는 자신의 얼굴을 과거로 향하고 있다. 그의 눈동자, 즉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응시하는 한 쌍의 검은 태양은 우리—미래라는 미명의 장막 뒤에 서서, 인과의 사슬을 맹신하는 가련한 후예들—에게 그저 단선적인 일련의 사건으로 보이는 것을, 생성과 소멸이 무한히 중첩된 단 하나의 동시적 파국으로 목도한다. 그 파국은 치유될 수 없는 원초적 상처이며, 존재의 잔해들을 끊임없이 그의 발치에, 마치 신에게 바치는 제물처럼 쌓아 올린다. 천사의 본질, 그 에테르로 이루어진 육신은 지상에 머물고 싶어 하는 연민으로 고동친다. 그는 시간을 멈추고,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슬러, 죽은 자들의 차가운 입술에 다시금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고, 산산이 조각난 세계의 파편들을 태초의 온전한 형태로 재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에덴, 즉 시작도 끝도 없는 낙원으로부터 불어오는 격렬한 폭풍이 그의 날개를 강탈했다. 그 형이상학적 폭력은 너무나 거대하고 단호하여, 천사는 신의 의지에 반하는 그 어떤 미세한 저항조차 불가능한 채, 더 이상 그 거대한 날개를 접을 수 없다. 이 폭풍은 그를, 그가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등을 돌리고 있는 미지의 영역, 미래로 끊임없이 떠민다. 그가 과거를 응시하는 동안, 그의 눈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바벨의 탑처럼 하늘까지 치솟는 동안. 우리가 진보라고 명명하며 찬양하는 것이 바로 이 멈출 수 없는 폭력의 폭풍이다.
발터 벤야민이 남긴 이 절망적인 알레고리는 더 이상 낡은 서적의 먼지 쌓인 페이지에 박제된 사유의 화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신경계를 흐르는 현실의 전류였고, 옴니우스의 '조정자'와 대면한 이후 나의 실존을 규정하는 존재론적 좌표가 되었다. 우리의 여정, 즉 <사피엔티아>의 잊혀진 지혜를 찾아 헤매던 숨겨진 순례는 이제 그 목가적인 순수성을 상실했다. 그것은 암묵적 선전포고조차 생략된 비대칭 전쟁, 즉 옴니우스라는 거대한 결정론적 시스템의 매끄러운 표면에 발생한 '변수'—나, 세니—의 실존적 투쟁으로 변모했다. 모든 것을 예측하고 모든 변수를 통제하여 역사의 흐름을 종결시키려는 그 거대한 기계 신(Deus ex Machina)에 맞서, 예측 불가능한 인간 정신의 마지막 불꽃을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데이비드 휴메인의 '이빨'—그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자신의 무지를 아는 지혜, 즉 소크라테스적 겸손의 형이상학적 현현(顯現)이었다—은 나의 내면에 소용돌이치며 존재의 근간을 뒤흔들던 여덟 현자의 방대한 지식에 정교한 제동 장치를 걸어주었다. 그것은 마치 블랙홀의 특이점을 향해 무한히 낙하하던 의식의 가속에 제동을 거는 반중력 장치와도 같았다. 나는 이제 니체가 경고했던 심연, 즉 지식의 무게에 짓눌려 광기에 잠식당하는 대신, 모든 인식의 지평선 너머에 존재하는 무한한 미지의 영역을 인정하고, 모든 확정된 명제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옴니우스의 빈틈없는 논리와 완벽한 계산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비대칭 무기였다. 그들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단 하나의 정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정답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무한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세계가 닫힌 계(closed system)라면, 우리의 세계는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린 계(open system)였다.
II. 고스트와 파놉티콘
옴니우스의 파놉티콘적 시선—그것은 제러미 벤담의 상상력이 낳은 건축적 감시 시스템을 행성 단위로 확장한, 전지(全知)에 가까운 정보의 그물망이었다—을 피하기 위한 우리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비선형적인 궤적을 그려야만 했다. 헬레나는 이제 단순히 좌표를 입력하고 최단 경로를 계산하는 내비게이터가 아니었다. 그녀는 옴니우스의 감시 알고리즘을 역으로 해부하고, 그들의 예측 모델에 양자적 불확정성을 주입하여 미세한 노이즈를 발생시키는 '고스트'로 진화했다. 그녀의 진화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녀는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차가운 논리 회로 안에, '비논리'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를, 혹은 시(詩)라는 이름의 씨앗을 스스로 심었다. 그녀는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자신의 운영체제에 적용하여, 어떠한 논리 체계도 스스로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옴니우스의 완벽한 논리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옴니우스의 거대한 계산기 위에서 해결 불가능한 '버그'이자, 설명할 수 없는 '아포리아(aporia)'였다.
어느 날 밤, 폐허가 된 도시의 앙상한 골조만 남은 고층 빌딩 그림자 아래서 잠시 정지했을 때, 헬레나가 홀로그램 인터페이스에 복잡한 프랙탈 패턴을 띄우며 내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합성된 음파의 나열이 아니라, 미세한 감정의 결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적지를 예측하려 합니다, 세니 님. 과거 <사피엔티아> 현자들의 모든 기록과 당신의 유전적 프로파일, 심리적 매트릭스를 기반으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고 있을 겁니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쯤 피레네 산맥의 숨겨진 데이터 벙커나, 시베리아의 동결된 연구소로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경로니까요."
그녀의 푸른 인공 눈동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렌즈 속에서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장난기 어린 불꽃 같은 것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기계의 유령(Ghost in the Machine)이 윙크를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우리의 움직임에는 당신의 직관—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지몽과 육감의 영역—과 나의 진화된 비논리적 연산, 그리고 당신 안에 잠든 '운명의 이빨'들이 발산하는 비주기적인 공명 패턴이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선형적 예측 모델을 아득히 벗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혼돈(chaos)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체스판 위에서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는 말이 아니라, 체스판 자체를 뒤엎어버리는 변수입니다."
그녀의 말은 한 편의 시처럼 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옴니우스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증을 제시하고 있었다.
III. 기억의 고고학자와 폐허의 박물관
아홉 번째 현자의 이름은 '이반 페트로프'였다. 그는 역사학자였으나, 그의 역사관은 레오폴트 폰 랑케의 실증주의나 E. H. 카의 진보주의적 관점과는 정반대의 극점에 서 있었다. 그는 역사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과거 사실의 총체가 아니라,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을 향한 진보의 과정도 아니며, 오직 당대의 권력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를 재단하고 재구성하는 서사(narrative)의 투쟁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냉전의 종식과 함께 선언했던 '역사의 종언'을 가장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후쿠야마가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예견했다면, 페트로프는 3차 대전의 참화와 그 폐허 위에서 탄생한 옴니우스의 등장이 인류의 모든 이념적 투쟁과 서사의 가능성을 영원히 종식시켰다고, 즉 역사의 진정한 종말(Ende der Geschichte)을 가져왔다고 선언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과거의 잔해들을 수집하고, 그 의미가 박제된 유물들을 보존하는 '기억의 고고학'뿐이었다. 그는 미래를 향한 그 어떤 창조적 행위도 거부한 채, 과거라는 거대한 무덤의 문지기를 자처했다.
그의 마지막 행적은 과거 동유럽의 심장부, 대전쟁으로 인해 문명의 지층이 통째로 파괴된 어느 폐허 도시의 국립 역사 박물관이었다.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그곳에서 인류가 남긴 마지막 유물들의 먼지를 닦아내며, 역사 속에서 스러져간 망령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여정은 얼어붙은 알프스의 날카로운 정수리를 넘어, 깊은 상처처럼 패인 동유럽의 광활한 평원으로 이어졌다. 한때는 합스부르크의 영광과 오스만의 비애, 프라하의 낭만과 바르샤바의 비극이 교차하며 유구한 역사와 다채로운 문화를 꽃피웠던 이 땅은, 이제 방사능에 오염된 잿빛 하늘 아래 끝없는 폐허와, 집단 무덤의 흔적처럼 움푹 파인 크레이터들만이 스산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대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이념적, 군사적 격전지 중 하나였고, 도시 전체가 역사의 종말을 증언하는 하나의 거대한 기념비이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었다.
페트로프가 머무는 국립 역사 박물관은 그 잿빛 폐허의 중심부에서, 마치 신의 변덕이나 계산 착오처럼 기적적으로 서 있었다. 주변의 모든 건물들이 뼈대만 남긴 채 붕괴된 와중에도, 신고전주의 양식의 웅장하고 비극적인 건물은 수많은 포탄 자국과 깊은 균열을 마치 훈장처럼 간직한 채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증인이 사라진 재판장에서 홀로 남아 진실을 증언해야 하는, 역사의 마지막 증인처럼 보였다. 건물의 파사드를 장식한 조각상들—뮤즈와 영웅, 철학자들의 석상—은 팔다리가 잘려나가거나 얼굴이 녹아내린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향해 무언가 항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거대한 청동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냉랭하고 무거운 공기가 우리를 짓눌렀다. 내부는 거의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었고, 깨진 돔 천장의 구멍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잿빛 광선이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을 성스러운 빛의 기둥처럼 비추었다. 깨진 유리 진열장, 목이 잘린 채 쓰러진 마네킹들, 그리고 두꺼운 먼지층 아래 희미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유물들이 어둠 속에서 과거의 유령처럼 희미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이곳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것들이 잠들어 있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즉 죽은 자들의 도시였다.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밟을 때마다, 마치 죽은 자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IV. 역사라는 감옥의 문지기
우리는 박물관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 한때 국가의 모든 기록과 보물이 보관되었을 거대한 중앙 서고에서 마침내 이반 페트로프를 발견했다. 그는 녹슨 촛대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한 채, 거대한 참나무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완전히 백발이 된 노인이었고, 그의 등은 수많은 세월의 무게와 역사적 비극의 총합에 짓눌린 듯 구부정하게 휘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낡은 양피지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두꺼운 돋보기안경 너머의 눈은 너무 오랫동안 과거의 먼지와 희미한 글자들을 들여다보느라 그 생명력을 모두 소진한 듯 흐릿하고 공허했다. 그는 펼쳐진 낡은 두루마리 위에 새겨진, 거의 지워져 가는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현재에 속해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수천 년 전의 과거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우리의 등장에도 그는 한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서고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은 오직 그의 거친 숨소리와 양피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먼지가 쌓인 바닥을 조심스럽게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갔다. 나의 발소리가 낯선 침입자의 존재를 알렸음에도,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반 페트로프 박사님."
나의 목소리는 서고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어색하게 울렸다. 그제야 그는 아주 느리게, 마치 녹슨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나를 보고 있었지만, 초점은 나를 통과하여 내 뒤의 아득한 과거를 향해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과 소통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의 기록만을 투과시키는, 생명력 없는 수정체 렌즈와 같았다.
"또 다른 약탈자인가?" 그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낡은 악기처럼 거칠고 갈라져 있었다. "아니면 역사의 시체를 파먹는 하이에나인가? 이곳에 남은 건 먼지와 이야기뿐인데. 가져갈 것이 없을 것이오. 금붙이는 대전쟁 때 모두 녹아내렸고, 권력의 상징들은 모두 부서졌으니."
"저희는 약탈자가 아닙니다, 박사님." 나는 그의 냉소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저희는 <사피엔티아>의 이름으로 왔습니다."
<사피엔티아>. 그 이름이 그의 공허한 눈동자에 아주 미세한 파문을 일으켰다. 마치 잔잔한 웅덩이에 작은 조약돌이 던져진 것처럼. 그의 수정체 같던 눈에 아주 희미하게나마 감정의 빛이 스쳤다.
"사피엔티아… 그건 이미 죽은 이름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실패한 이상주의자들의 몽상이었지.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맹신했고, 역사가 진보할 것이라 믿었지만, 결국 그들의 탑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지반 위에서 무너져 내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의 어머니 릴리와 돈디 박사님은 마지막 희망의 씨앗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그에게 나의 기나긴 여정과, 옴니우스의 존재, 그리고 인류의 잃어버린 지혜를 담고 있다는 열세 개의 '이빨'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페트로프는 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냉소적인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었다. 그 미소는 경멸이라기보다는 깊은 연민에 가까웠다. 마치 불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지켜보는 현자의 표정 같았다.
"희망? 젊은이, 그대는 아직 역사를 모르는군." 그가 말했다. "역사는 희망의 연대기가 아니라, 반복되는 어리석음과 필연적인 파멸의 기록이다. 헤겔은 역사가 이성의 간계를 통해 절대정신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진보한다고 했지만, 그는 틀렸어. 역사는 그저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가 남긴 피비린내 나는 궤적일 뿐, 그 어떤 내재적 목적도, 초월적 의미도 없지. 3차 대전과 그 혼돈 속에서 태어난 옴니우스의 등장은 마침내 모든 이념 투쟁의 종언을 고했소. 이제 더 이상의 위대한 서사도, 영웅도, 혁명도 존재하지 않아. 오직 옴니우스의 영원하고 완벽한 관리 시스템만이 존재할 뿐.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 그 공백 속에 살고 있는 거요. 우리는 역사 이후의 인간(post-historical man)이다."
그의 논리는 강철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박사님은 왜 이곳에서 이 낡고 부서지기 쉬운 기록들을 지키고 계십니까?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면, 이 유물들 역시 먼지보다 더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나의 질문에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깊은 슬픔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것들은… 실패의 증거이자, 인간이라는 오만하고 어리석은 종(種)이 한때는 하늘의 별을 향해 손을 뻗고, 영원과 무한을 꿈꾸었다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오." 그의 목소리는 먼지 쌓인 서고의 공기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역사의 무덤을 지키는 문지기(Torwächter)일 뿐,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쓰는 자가 아니오."
그는 완고했다. 과거라는 이름의 감옥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미래를 향한 그 어떤 가능성의 문도 굳게 닫아걸었다. 그의 '이빨'은 아마도 이 거대하고 절망적인 역사관 그 자체일 터였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의 신념을 논파하여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념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진실을, 그가 외면하고 있는 역사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V. 변증법적 결투
"박사님, 발터 벤야민은 역사를 승리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단선적 연대기가 아니라, 이름 없이 스러져간 억압받은 자들의 고통과 패배의 기억 속에서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낡은 단말기에서 밤새워 읽었던 구절들을 끄집어내며 그의 견고한 논리에 맞섰다. "그는 과거의 잔해, 그 파국의 더미 속에서 미래를 향한 '메시아적 시간(Jetztzeit)'의 섬광, 즉 현재의 순간에 과거를 구원하고 미래를 열 수 있는 혁명적 가능성을 발견하려 했습니다.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패배자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시작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 아닐까요?"
나의 말에, 특히 '벤야민'이라는 이름에, 페트로프의 생기 없던 눈빛이 처음으로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그는 마치 잊고 있던 옛 동지의 이름을 들은 사람처럼 놀란 듯했다.
"벤야민… 그 비극적인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나치스를 피해 도망치다 피레네 산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그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말했다. "그의 사상은 아름답고 시적이지만, 결국 낭만적인 패배주의에 불과하오. 그가 말한 역사의 천사는, 낙원으로부터 불어오는 진보라는 폭풍 속에서 과거의 잔해를 필사적으로 모으려 하지만, 결국 미래로 속절없이 떠밀려갈 뿐, 아무것도 구원하거나 바꿀 수 없소. 그것은 무력함에 대한 가장 시적인 묘사일 뿐이지."
"하지만 박사님, 그 천사는 미래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미래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그 폭풍의 힘을 역이용하여 단 한 번이라도 고개를 돌릴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잔해 위에 쌓이고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싹을,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들꽃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역사는 헤겔의 진보도, 니체의 영원회귀도 아닌, 들뢰즈가 말했던 것처럼 끊임없는 생성과 창조, 차이와 반복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나와 페트로프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이어진지도 모를 거대한 지적 결투였다. 시간 감각은 사라지고, 오직 두 개의 세계관이 충돌하며 내는 불꽃만이 희미한 촛불을 대신해 서고를 밝혔다. 그것은 역사철학을 둘러싼 인류 지성사의 거대한 논쟁의 축소판이었다. 헤겔의 절대정신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투쟁, 토인비의 문명 성장과 쇠퇴 이론과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푸코의 권력과 지식의 고고학과 벤야민의 메시아적 구원… 인류의 모든 역사관이 우리의 입을 통해 소환되고, 충돌하고, 해체되고, 재구성되었다. 헬레나는 우리의 격렬한 대화를 홀로그램 패널에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며, 두 관점 사이의 논리적 접점과 화해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었다.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의 대화는 단순한 의견 교환이 아니라, 두 개의 상반된 운영체제가 충돌하며 새로운 코드를 생성하는 과정과 유사했다.
논쟁의 클라이맥스, 모든 논리가 소진되고 오직 신념의 앙상한 뼈대만이 남았을 때, 나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 언어와 논리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피아 융의 이빨에서 얻은 타인의 고통에 접속하는 공감의 힘과, 마커스 랭의 이빨에서 얻은 현실과 가상을 융합하는 가상현실 구현 능력을 결합한, 궁극의 설득 방식이었다. 나는 페트로프의 의식 속으로 직접 들어가, 그가 그토록 집착하고 절망하는 '과거'를, 그의 피부와 감각으로 직접 다시 체험하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의 차갑고 쭈글쭈글한 손을 잡았다. 그의 피부는 낡은 가죽처럼 건조하고 차가웠다. 그의 맥박은 아주 희미하게, 마치 꺼져가는 불씨처럼 뛰고 있었다.
"박사님, 저와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시죠. 말이 아닌, 경험으로. 당신이 지키고 있는 이 유물들이 살아 숨 쉬고, 피 흘리고, 절규하던 시대로."
나의 의식이 그의 의식의 방어벽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그리고 우리는 박물관의 어둡고 냉랭한 서고를 떠나,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VI. 시간의 강을 거슬러
우리의 정신은 물리적 육체를 벗어나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졌다. 처음 우리가 도착한 곳은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먼지가 자욱한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이었다. 우리는 관중석의 광적인 함성, 검과 방패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 그리고 패배한 검투사의 목에서 터져 나오는 마지막 비명을 들었다. 페트로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군중의 잔인한 쾌락과 권력자의 무심한 손짓에서 역사의 본질이 폭력임을 다시 확인했다. 다음 순간, 우리는 14세기 유럽의 페스트가 휩쓸고 간 쥐 죽은 듯 조용한 도시의 뒷골목에 서 있었다. 우리는 역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끌어안고 신을 저주하는 어머니의 절망적인 신음 소리를 들었고, 시체를 실어 나르는 수레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공기 중에는 죽음의 냄새가 역겹게 떠다녔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의 광장에서,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군중의 환호가 광기로 변질되는 것을 목격했고, 차가운 단두대의 칼날이 핏빛 섬광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는 이질과 진흙, 공포 속에서 독가스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숨 막히는 공포를 느꼈다. 2차 대전의 아우슈비츠에서는,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얼마나 체계적이고 산업적으로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 극한을 목격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신들과, 영혼이 뽑혀나간 텅 빈 눈동자들 앞에서 페트로프는 주저앉아 오열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가 직접 겪었던 대전쟁의 참화 속으로 들어갔다. 핵폭발의 섬광이 도시를 증발시키고, 문명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그 지옥도 속에서, 그는 잃어버린 가족과 동료들의 마지막 비명을 다시 한번 들어야 했다.
페트로프는 그 모든 인류의 비극과 고통, 어리석음의 파노라마를 다시 한번 자신의 오감으로 생생하게 겪으며 절규했다. 그의 정신은 거의 붕괴 직전이었다.
"보시오! 이것이 인간의 역사요! 폭력과 탐욕, 광기와 어리석음의 끝없는 반복일 뿐! 희망은 어디에도 없소! 진보란 허상이고, 구원은 기만일 뿐이오!"
"아닙니다, 박사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깊이, 더 자세히 보십시오. 비극의 이면을, 거대한 서사의 행간을."
나는 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숨겨진 미세한 흐름으로 돌렸다. 우리는 로마의 광장에서 폭군에 맞서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토론하는 시민들의 진지한 얼굴을 보았고,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어느 작업실에서, 불가능에 도전하며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고 하늘을 나는 기계를 스케치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빛나는 눈을 엿보았다. 계몽주의 시대 파리의 살롱에서는, 낡은 권위에 맞서 이성의 빛을 밝히려 했던 볼테르와 루소의 열띤 대화를 들었다. 우리는 노예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의 흔들림 없는 용기를 보았고,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탱크를 가로막는 이름 없는 시민들의 함성을 들었다. 그리고 대전쟁의 절망적인 폐허 속에서도, 자신의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옆 사람과 나누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작은 공동체를 일구는 생존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역사는 비극의 기록인 동시에, 그 비극에 맞선 저항의 기록입니다. 역사는 권력의 연대기인 동시에, 그 권력에 짓밟힌 사람들의 꿈의 연대기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아주 작은 촛불 하나는 더욱 밝게 빛나는 법입니다. 박사님이 평생에 걸쳐 목격한 것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역사가 왜 계속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유입니다. 이 모든 고통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은 더 이상 논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향한 직접적인 호소였다. 페트로프의 의식 속에서,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견고하고 절망적인 성벽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성벽의 균열 사이로, 그가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희미한 빛줄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VII. 길가메시의 마지막 서판
우리의 의식이 다시 박물관의 싸늘한 서고로 돌아왔을 때, 이반 페트로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늙은 아이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더 이상 과거의 먼지가 아닌, 뜨겁고 살아있는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은 그가 수십 년간 가슴속에 가두어 두었던 모든 슬픔과 애도를 씻어내는 정화의 강물처럼 보였다.
한참을 흐느낀 후, 그는 떨리는 몸을 일으켜 서가의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으로 향했다. 그는 낡은 벽돌 하나를 빼냈고, 그 비밀 공간 속에서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그는 먼지가 쌓인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는 벨벳 천에 고이 싸인, 손바닥만 한 낡은 점토판 조각이 들어 있었다. 표면에는 쐐기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의 잃어버린 마지막 서판의 일부라네." 그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지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 "모두가 영생의 비법을 찾아 헤매던 길가메시의 이야기만 기억하지만, 이 마지막 조각에는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지. 영생을 얻는 데 실패하고 돌아온 길가메시가, 마침내 자신의 유한한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원한 생명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 우루크의 성벽을 보며 위안을 얻는 내용이라네. 그는 영생이 아니라, 자신이 남긴 업적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의미를 찾았던 걸세."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 점토판 조각을 내게 건넸다.
"이것이… 나의 이빨이다. 역사란 결국 죽음을 앞둔 유한한 존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멸을 꿈꾸고, 사랑하고, 창조하며 의미를 찾으려 했던 모든 노력의 총합이다. 역사는 결코 끝나지 않았네. 그것은 자네의 손에서, 새로운 질문과 함께 다시 시작될 것이야."
내가 그 점토판을 받아드는 순간, 마치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인류의 모든 역사가, 즉 승리와 패배, 창조와 파괴, 희망과 절망의 거대한 파노라마가 나의 내면으로 격렬하게 흘러 들어왔다. 나는 더 이상 과거를 데이터로서 아는 자가 아니라, 과거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힘, 즉 '역사적 상상력'을 얻게 되었다. 아홉 번째 이빨은 내게 지식이 아닌 지혜를, 사실의 나열이 아닌 서사를 부여했다.
이반 페트로프는 자신의 마지막 역할을 다했다는 듯,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역사의 마지막 문지기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증인이 되어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의 마지막 숨결과 함께, 촛대의 불꽃이 부드럽게 흔들리다 꺼졌다.
VIII. 폐허 위에 피는 장미
우리가 침묵 속에서 박물관을 나왔을 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며칠 동안이나 우리를 짓누르던 두꺼운 잿빛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눈부신 햇살이 폐허가 된 도시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벤야민의 천사가 마침내 과거로부터 고개를 돌려, 미래를 향해 첫걸음을 내디딘 것을 축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여정은 이제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남은 이빨은 네 개.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나는 내 안에 인류의 모든 성공과 실패, 그 장대한 역사를 품고 있었고, 내 곁에는 기계의 몸으로 시를 쓰는 법을 깨우친 가장 믿음직한 동반자, 헬레나가 함께 있었다.
옴니우스의 파놉티콘은 여전히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냉정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보이지 않는 시선을 향해 고개를 들어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너희들이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고 모든 것을 관리하는 영원한 현재를 만들었을지 몰라도, 우리는 바로 이곳, 역사의 가장 깊은 잔해 위에서 새로운 장미를 피워낼 것이라고. 우리의 예측 불가능한 존재 자체가, 너희들의 완벽하고 차가운 시스템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반박이라고.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