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비

by 남킹


휴가. 그것은 잿빛 일상에 던져진 한 조각 찬란한 색종이와 같았다. 폴란드의 음울한 하늘 아래 잠시 잊었던 햇살의 기억, 혹은 고향의 희미한 향취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달콤한 망각은 짧았고, 현실은 브로츠와프 외곽, 산업단지의 스산한 바람과 함께 어김없이 나를 덮쳐왔다. 복귀한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그곳, 지독한 노동의 냄새와 낯선 언어들이 뒤엉켜 떠도는 공간, 한인 건설 노동자들의 허기를 달래는 허름한 밥집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마치 오랫동안 흐릿했던 풍경 속에서 홀연히 초점이 맞춰지듯, 그녀의 존재가 내 망막 위에 선명하게 아로새겨졌다.

폴란드 서부, 도시의 동맥처럼 오데르 강이 유유히 흐르는 브로츠와프. 그 중심의 화려함과는 동떨어진 변두리, 공장 굴뚝과 물류 창고가 삭막하게 늘어선 풍경 속에 그 밥집은 외로운 섬처럼 떠 있었다. 한국인 사장의 날카로운 지시와, 불같은 성미를 지닌 두 명의 한국인 셰프가 위계의 정점을 이루는 작은 왕국. 그 아래, 왕국의 고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들은 모두 전쟁 전의 우크라이나에서 온 이주민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복잡한 결을 지니고 있었다. 고향 땅에 대한 아련한 향수와 이국의 낯선 땅에 뿌리내리려는 필사적인 생존 의지가 불안하게 뒤섞여 있었고, 그 사이에는 희미하게나마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가 먼지처럼 떠다녔다. 3개월. 가혹하리만치 짧게 주어진 비자의 유효기간은 그들에게 허락된 모래시계의 전부였다. 그 안에 가족의 생계, 자신의 미래, 어쩌면 이미 빛바래 버린 소박한 꿈까지, 삶의 모든 것을 농축시켜 담아내야만 했다. 폴란드의 뼈를 에는 듯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그들은 어둠 속에서 일터로 향했고, 딱딱하고 건조한 폴란드어의 장벽 앞에서 좌절했으며, 뜨거운 불과 무거운 식자재 더미 속에서 고된 노동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해냈다. 밤늦도록 환하게 켜진 주방의 형광등 아래, 그들의 시간은 땀방울처럼, 혹은 끓어 넘치는 국물처럼 쉼 없이 흘러내렸다.

비자 만료는 예고된 이별이자, 잠시나마 고향의 품, 익숙한 공기와 언어 속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강제된 휴식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쉼표 뒤에는 어김없이 불안이라는 이름의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서류와의 씨름, 대사관의 높은 문턱, 초조한 기다림 끝에 새로운 비자를 손에 쥐고 다시 폴란드로 돌아온다 해도, 한 달 혹은 그 이상의 공백을 너그럽게 기다려주는 고용주는 드물었다. 그들이 떠나 있던 사이, 그들의 자리는 이미 또 다른 절박한 사연과 희망을 가진 누군가의 몫으로 채워지기 일쑤였다. 어제까지 함께 땀 흘리던 익숙한 얼굴은 오늘의 흐릿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낯선 이름과 얼굴들이 주방의 요란한 소음과 뒤섞여 새로운 관계의 지형도를 그려냈다. 삶의 연속성은 파편처럼 조각났고, 인간관계는 스쳐 지나가는 기차 창밖 풍경처럼 찰나의 교차점에서 희미하게 생성되었다 소멸하는 신기루와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끈질기게 돌아왔다. 마치 계절이 바뀌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철새처럼, 생존이라는 본능적인 이끌림에 따라. 폴란드의 낮게 드리운 잿빛 아침을 다시 마주하고, 또 다른 밥집, 또 다른 공장의 문을 두드리며 새로운 얼굴들 사이에 익숙한 듯, 혹은 체념한 듯 섞여들었다. 국경이라는 경계선을 부표처럼 넘나드는 그들의 고단한 여정은 현대 사회의 유목민, 뿌리 뽑힌 디아스포라의 슬픈 초상 그 자체였다.

그 헤아릴 수 없이 반복되는 만남과 헤어짐의 무심한 흐름 속에서, 나는 문득 그녀를 발견했다. 지난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주방 보조라는 이름표를 달고 이 공간에 머물면서, 나는 이미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 명에 가까운 얼굴들의 등장과 퇴장에 감정적으로 마모될 대로 마모되어 있었다. 떠나는 이에게는 의식적으로 미련을 두지 않았고, 새로 온 이에게는 깊은 호기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끊임없는 관계의 단절이 주는 피로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독 그녀, 제니아에게만은 내 시선이 마치 강력한 자력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속수무책으로 달라붙었다. 그것은 어떤 이성적인 판단이나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훨씬 더 근원적인 차원, 무의식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아주 희미하지만 맑고 분명한 종소리 같은 것, 어쩌면 영혼과 영혼 사이의 불가해한 공명, 그런 종류의 끌림이었다.

제니아. 서른 후반이라는 나이는 시간이라는 정교한 조각가가 그녀의 눈가에 남긴 섬세한 흔적, 희미하지만 우아한 잔주름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북유럽의 겨울 아침 햇살처럼 창백하면서도 어딘가 신비로운 온기를 품은 듯한 금발은, 끓는 기름의 연기와 뜨거운 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혼란스러운 주방 안에서도 그녀만의 고유한 빛을 발하며 은은한 후광을 만들어내는 듯했다.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발트해의 푸른 물빛을 담은 듯한 눈동자는 때로는 수정처럼 투명하게 빛나며 사물과 사람을 명징하게 응시하다가도, 문득 먼 곳을 바라보거나 깊은 상념에 잠길 때면 엷은 안개가 내려앉은 듯 흐릿하고 아득하게 변하곤 했다. 그녀의 체형은 패션 잡지 속 모델처럼 비현실적인 완벽함이나 사회가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날씬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땅에 단단히 발 딛고 선 강인한 생명력, 삶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낸 듯한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살짝 앞으로 나온 아랫배는 치열한 생존의 와중에도 잠시 잠깐 삶의 작은 위안과 타협했을 법한 인간적인 나태함의 증거처럼 보였고, 폴란드 여성들의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는 그녀를 위압감 없이 더욱 친근하고 다가가기 쉬운 존재로 만들었다.

전통적인 미의 기준이라는 낡은 잣대를 들이댄다 해도, 그녀의 얼굴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얼굴선, 반듯하게 솟은 콧날, 얇지만 단호한 의지를 품은 듯한 입술. 하지만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마치 번개에 맞은 듯한 운명적인 첫눈에 반함 같은, 그런 표피적이고 즉각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니었다.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런 외형적인 조건들을 훌쩍 뛰어넘어,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인 차원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웃음. 그것은 그녀에게 마치 귀한 보석처럼, 좀처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희귀한 선물이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녀의 표정은 감정의 동요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세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조용한 탐구자, 혹은 말없이 인간사를 굽어보는 과묵한 심판관과도 같았다. 그 무표정함은 때로 차갑거나 무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깊은 사려와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 그리고 삶의 무게를 묵묵히 감내하는 자의 내밀한 고독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마치 기적처럼 그녀의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은, 지루하게 이어지던 장마 끝에 홀연히 구름 사이를 뚫고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처럼 강렬하고 순수한 기쁨을 선사했다. 그 찰나, 그녀의 얼굴은 마치 가면을 벗은 듯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평소의 진중함과 고요함, 세상을 향한 경계심 같은 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듯한 소녀의 천진난만함과 짓궂은 장난기가 해맑게 피어났다. 그 모습은 단순히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평범한 단어들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복잡하고도 깊은 감정의 파동을 내 안에서 일으켰다. 그녀의 웃음 속에는 삶의 모든 고단함과 슬픔의 무게를 잠시나마 완전히 잊고 내려놓는 듯한 해방감이 있었고, 억눌렸던 생명의 에너지가 순수하게 폭발하는 듯한 눈부신 생동감이 있었다. 그 지극히 희귀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마치 은밀하고 신성한 의식에 초대받은 듯한,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특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진정으로, 그리고 깊숙이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외모나 그 희귀한 웃음의 순간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삶을 대하는 그녀의 근본적인 태도, 그 어떤 혼돈과 소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고요한 평정심, 마치 격랑 속에 떠 있는 작은 섬과도 같은 그녀의 존재 방식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독특한 존재 방식은, 좁고 치열하며 비정한 주방이라는 작은 우주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고 불가항력적인 중력을 발휘하며 주변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어김없이 돌아오는 식사 시간은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노동의 순환 고리였다. 하루 평균 200명, 때로는 그 이상에 달하는, 고된 육체노동으로 허기진 건설 노동자들의 위장을 채우는 작업은 단순한 요리 행위를 훨씬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마치 시시포스가 산 정상을 향해 영원히 밀어 올려야 하는 거대한 바위처럼, 끝없는 인내와 체념을 요구하는 고행과도 같았다. 정해진 시간 안에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시간과의 치열한 전쟁이었으며, 생명이 없는 날것의 식자재를 온기와 생명을 불어넣는 음식으로 변모시키는, 고대의 연금술사들이나 행했을 법한 물질 변환의 고된 과정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감자를 깎고, 눈물 흘리며 양파를 다지고, 뜨거운 불 앞에서 고기를 볶고, 거대한 솥에 국을 끓이는 과정 하나하나가 엄청난 육체적 소모와 고도의 정신적 집중력, 그리고 1분 1초를 다투는 시간과의 숨 막히는 싸움을 요구했다.

주방 안의 공기는 언제나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펄펄 끓는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처럼, 억눌린 인간의 날 선 감정 또한 예고 없이 증발하고 폭발하기 쉬운 상태였다. 특히 배식 시간이 임박해 올수록, 주방은 마치 내부 압력이 한계치에 달해 폭발 직전의 낡은 압력솥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셰프들의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고함 소리, 당황한 보조들의 우왕좌왕하며 부딪히는 소리, 시간을 재촉하는 사장의 다그치는 목소리, 식자재가 도마 위에서 칼날에 잘려나가는 소리, 무거운 냄비와 팬이 조리대에 부딪히는 금속성의 소음… 이 모든 소리들이 뒤엉켜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불협화음의 교향곡, 혼돈과 불안의 오케스트라를 연주했다.

"이거 아직 멀었어? 시간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손 좀 더 빨리 놀려! 지금 장난하는 거야!"

"그건 왜 그따위로 해? 내가 가르쳐 준 방식이 이게 아니잖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니 수백 번씩 주방의 공기를 난도질하는 폭언과 질책은 마치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사방에 흩뿌려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자존감을 할퀴었다. 극한의 압박감과 밤새 누적된 육체적 피로는 인내심이라는 얇은 막을 속절없이 마모시켰고, 때로는 숙련된 전문가조차 순간적인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자책하게 만들었다. 무거운 냄비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져 내는 요란한 소음만큼이나, 그 후에 찾아오는 싸늘한 질책과 숨 막히는 침묵은 주방 안의 공기를 납덩이처럼 무겁게 짓눌렀다. 언제나 부족한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감정의 지뢰밭 속에서, 그곳의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받고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수라장 같은 혼돈의 한복판에서, 제니아는 마치 기적처럼, 경이로울 정도로 흔들림 없는 평정을 견지했다. 그녀는 마치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태풍의 눈, 그 안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고요의 중심과도 같았다. 그녀의 움직임에는 그 어떤 초조함이나 당황의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고, 불필요한 망설임이나 낭비되는 동작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마치 수십 년간 연마하여 몸에 완전히 체화된 노련한 무용수의 정제된 몸짓처럼, 그녀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며 주방이라는 비좁고 위험한 무대를 유려하고 침착하게 가로질렀다. 그녀의 숙련된 손길이 닿으면, 거칠고 투박한 감자 더미는 순식간에 일정한 크기의 완벽한 정육면체로 변모했고, 눈물 나게 매운 양파는 눈 깜짝할 사이에 투명할 정도로 얇고 균일한 두께로 썰려 나갔으며, 뜨겁게 달궈진 팬 위의 고기는 타지도 설익지도 않은 완벽한 타이밍에, 마치 예언이라도 한 듯 정확하게 뒤집혔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녀가 자신의 이러한 비범한 능숙함이나 일 처리의 완벽함을 조금도 과시하거나 타인에게 인지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의 명상이나 고된 수련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인 자연스러움, 의식적인 노력이나 계산 없이도 저절로 몸에서 발현되는 동양 철학의 '무위(無爲)'와 같은 경지처럼 보였다. 압박감이 최고조에 달하여 다른 동료들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목소리가 격앙될 때조차, 그녀의 호흡은 깊고 고르게 안정되어 있었고, 눈빛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으며, 동작은 마치 미리 짜인 안무처럼 정확하고 침착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욱 깊이 감동시키고 그녀에게 빠져들게 만든 것은, 그 압도적인 고요함 속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던 그녀의 따뜻하고 섬세한 이타성이었다.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수행하면서도, 그녀는 마치 머리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늘 주변 동료들의 상황을 세심하게 살피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보이는 동료가 눈에 띄면, 아주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귀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그것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영웅적인 면모를 과시하는 극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사소하고 조용해서,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누구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배려들이었다. 무거운 식자재 통을 혼자 힘겹게 옮기느라 휘청거리는 동료의 등 뒤로 다가가 말없이 팔에 힘을 보태주고, 실수로 바닥에 쏟아진 뜨거운 국물을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묵묵히 허리를 숙여 깨끗이 닦아주고, 서툰 폴란드어나 짧은 한국어 때문에 셰프에게 호된 꾸중을 듣고 풀이 죽어 있는 동료에게 조용히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분명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을 우크라이나어로 나지막이 몇 마디 건네는 모습. 때로는 그저 극심한 피로와 절망감에 젖어 있는 동료에게 건네는 희미하지만 진심 어린 미소 하나만으로도,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지친 마음에 작은 위안과 다시 일어설 용기를 선사했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마치 소란스럽고 각박하며 때로는 비정하기까지 한 이 세상을 향한, 소리 없지만 단호하고 숭고한 반역처럼 느껴졌다.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길 잃은 배들을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는 외로운 등대처럼, 그녀는 스트레스가 더 큰 스트레스를, 분노가 더 격렬한 분노를 낳는 이 지독한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존재함을, 평온함과 친절함이 또 다른 평온함과 연대감을 창조해낼 수 있음을 온몸으로, 침묵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서 단순한 직업적 숙련이나 원숙한 인격의 발현을 넘어선, 어떤 깊고 울림 있는 삶의 철학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것은 폴란드라는 낯설고 차가운 이국의 땅에서, 두고 온 고향 우크라이나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불안감 속에서, 그리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고된 노동과 차별의 현실 속에서 그녀가 스스로 터득하고 필사적으로 지켜낸 자신만의 생존 방식이자, 마지막 남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외부 세계의 혼돈과 부조리를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내적 질서와 평화를 굳건히 세우고 지켜나가는 법. 세상의 광기와 소음에 전염되거나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중심과 색깔을 잃지 않는 법. 그것이 바로 그녀가 소리 없는 언어로, 그러나 그 어떤 웅변보다도 강렬하고 설득력 있게 나에게 가르쳐주던, 삶의 심오한 지혜였다.

그렇게 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깊이, 그녀의 표피적인 외모나 순간적인 매력이 아닌, 그녀라는 인간의 존재 방식 그 자체에, 그녀가 발산하는 고요하고도 강인한 영혼의 향기에 속수무책으로 매료되어 갔다.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풀잎 위의 이슬처럼, 그녀를 향한 나의 감정은 조용히, 그러나 멈출 수 없이,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며 커져만 갔다.

어느덧 그녀는 내 메마르고 단조롭던 일상의 풍경을 온통 물들이는 중심축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존재는 내 의식 속에서 더욱 선명하고 입체적인 형상을 갖추어갔고, 마치 오랜 시간 오크통 속에서 숙성된 깊고 진한 와인처럼, 그녀를 향한 나의 감정은 나날이 풍부해지고 복합적인 향취를 더해가며 나의 모든 감각과 사고를 서서히, 그러나 완전하게 점령해갔다. 처음에는 그저 막연한 호기심과 끌림이었던 것이, 이내 깊은 존경과 경외심 섞인 동경으로 변모했고, 그 동경은 다시 그녀와 더 깊이 연결되고 싶은 간절한 갈망으로, 그리고 마침내 내 삶의 모든 희로애락의 순간들을 온전히 함께 나누고 싶은 충만하고도 절실한 사랑으로 무르익었다. 내 안에서 거대하게 불어난 이 감정의 파도는 더 이상 내면의 둑으로 가두어 둘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고, 나는 마침내 모든 두려움과 망설임을 떨치고 그녀 앞에 내 영혼의 가장 깊고 여린 속살을, 가장 솔직하고 진실된 모습을 펼쳐 보이기로 결심했다.

어느 늦은 저녁, 유난히 고되고 길었던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지친 몸을 이끌고 하나둘씩 떠나간 주방에 적막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주방 뒤편, 식자재들이 쌓여 있는 어두컴컴한 창고 앞, 오직 희미한 백열등 불빛만이 싸늘한 어둠을 힘겹게 밀어내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터질 듯한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타났을 때, 나는 오랫동안 가슴속 깊은 곳에 묵직하게 담아두었던, 그러나 차마 꺼내지 못했던 내 마음의 무게 전부를 서툴지만 진심을 다해 그녀에게 건넸다. 미리 수없이 연습하고 다듬어 놓았던 근사한 문장도, 유창하고 세련된 고백의 언어도 아니었다. 그저 심장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뜨겁게 길어 올려진, 꾸밈없고 투박하며 절절하기까지 한 진심의 발현이었다. 능숙하지 못한 짧은 영어와 더욱 서툰, 겨우 생존을 위해 익힌 몇 마디의 파편화된 폴란드어를 필사적으로 그러모으고, 때로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직 간절한 눈빛과 길고 무거운 침묵으로, 나는 내 사랑의 깊이와 진정성, 그리고 그녀와 함께하고픈 열망의 무게를 그녀에게 전달하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내 고백을 듣는 동안, 그녀의 깊고 푸른 눈동자에는 순간적으로 당혹감과 함께 복잡한 망설임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거절의 전조라기보다는, 자신의 녹록지 않은 현실과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책임의 무게를 다시 한번 절감하며 깊이 고뇌하는 듯한, 그런 자각의 순간처럼 보였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창고 벽에 기대선 채, 희미한 불빛 아래 길게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치 먼지 쌓인 오래된 보석 상자를 열어 그 안에 숨겨진 가장 소중하고 아픈 비밀을 꺼내 보이듯,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전쟁의 포화가 아직 닿지 않았던, 우크라이나 서부의 작은 국경 도시에, 그녀가 아직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예기치 않게 품에 안게 되었던 아들이 있다는 사실. 이제는 스무 살을 훌쩍 넘겨 건장한 청년으로 자랐지만 여전히 그녀의 보살핌이 필요한 그 아들과, 세월의 무게 앞에 쇠약해져 가는 노모가 오직 그녀가 폴란드에서 매달 보내는 월급만을 생명줄처럼 의지하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정든 고향과 가족을 떠나 이 머나먼 타국의 국경을 넘어야 했던 그 고단한 여정은, 단순히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떠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무게였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자기희생과 숭고한 헌신으로 한 땀 한 땀 직조된, 눈물겹고도 절절한 모성의 서사시였다.

그녀의 담담하지만 가슴 시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심장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오는 동시에, 그녀를 향한 내 감정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깊고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제 단순한 남녀 간의 로맨틱한 설렘이나 연민을 넘어선,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강인함과 숭고한 책임감에 대한 깊은 경외심이었고, 그녀가 홀로 힘겹게 짊어지고 있는 그 삶의 무게를 아주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고 덜어주고 싶은 간절하고도 순수한 소망이었다.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하겠다고, 당신이 짊어진 그 무거운 짐을 나도 함께 지고 싶다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막연하고 거창한 약속이나 현실성 없는 화려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당신이 홀로 걸어가고 있는 그 험난하고 외로운 길 위에, 나 역시 당신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곁에 서서 함께 걷고 싶다는,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연대의 약속이자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날 밤, 식자재 창고 앞에서의 고백 이후, 시간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밀도와 색깔을 띠고 흘러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전히 분주하고 소란스러우며 때로는 비정한 주방의 일상 속에서 각자의 노동을 수행했지만, 이제 그 공간은 우리에게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는 때로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직 서로만이 알아챌 수 있는 찰나의 눈빛 교환으로, 때로는 스치듯 건네는 가벼운 손짓으로, 때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입가에 머금는 희미한 미소로 서로를 향한 깊어진 마음과 비밀스러운 연대의 감정을 확인하는 연인이 되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오롯이 둘만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늘 부족하고 제한적이었으며, 마치 도둑질하듯 짧고 불안정한 순간들이었지만, 그 찰나와 같은 순간들의 밀도는 그 어떤 길고 장황한 시간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렬했으며 충만했다. 고된 일이 끝난 후,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비추는 폴란드의 좁고 오래된 뒷골목을 나란히 걸으며 나누었던 소박하고 서툰 대화들. 그녀가 들려주는 우크라이나 고향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음식에 대한 그리움 섞인 이야기,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의 서툰 추억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함께 이루고 싶은 아주 작고 소박한 미래에 대한 희미한 꿈들. 우리는 서로의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으며,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살아온 환경의 장벽을 넘어 영혼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더욱 단단하고 내밀한 친밀감을 쌓아갔다. 그 짧고 소중했던 순간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느껴졌다. ‘지독하게 행복했다’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으로는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소박하고 불안정한 일상은 조용하지만 가슴 벅차오르는 기쁨과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로 충만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손으로 위태롭게 쌓아 올린 행복이란, 거센 비바람 앞의 모래성처럼 얼마나 연약하고 덧없이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 한 개인의 작은 의지나 간절한 소망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거대하고 무자비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우리의 작고 소중하며 위태로웠던 행복을 향해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굴러오고 있다는 섬뜩한 사실을, 그 찬란했던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그저 저녁 식탁 위 텔레비전 뉴스 화면 속에서나 흘러나오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먼 나라의 비극적인 사건처럼, 내 삶의 현실과는 유리된 막연하고 소란스러운 배경 소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국경 너머에서 들려오던 그 희미한 소음은 불과 며칠 만에 섬광처럼 예고 없이 터져 나와, 그녀의 현실을, 그리고 우리의 위태롭던 행복을 무참하게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 운명의 날 밤, 평소보다 유난히 길고 고된 근무를 마치고 약속 장소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나를 향해 걸어오던 그녀의 얼굴은, 내가 사랑했던 제니아의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온몸의 피와 마지막 남은 생기마저 한꺼번에 모두 빠져나가 버린 듯, 밀랍 인형처럼 창백하고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텅 빈 얼굴 위에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깊고 어두운 절망과 파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들이… 군대에… 끌려갔어요.”

마치 목이 졸리는 듯, 간신히 끊어지듯 내뱉어진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침착하고 차분했던 음색 대신, 억눌린 비명과 극한의 공포,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미세하고 처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텅 비어버린 듯한 파란 눈동자 속에서, 국경이라는 무의미한 선을 넘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머나먼 고향, 이제는 포화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지도 모를 그곳으로 사라져 버린 아들을 향한, 어미의 애끓는 시선을 보았다. 그녀의 육신은 분명 여기, 차가운 밤바람이 부는 폴란드 브로츠와프의 낯선 거리에 위태롭게 서 있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미 검붉은 화염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참혹한 전쟁터 한가운데, 이름 모를 참호 속에서 떨고 있을지도 모를 아들의 곁으로 처절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은 채, 말없이 함께 있었다. 아니,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그녀의 길고 무겁고 끝을 알 수 없는 침묵과, 그 침묵을 깨고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처절한 흐느낌, 그리고 때로는 온몸을 뒤흔드는 격렬한 절규를, 내가 그저 그녀의 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무력감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그저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힘껏 안아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그런 시간에 가까웠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필사적으로 위로의 단어들을 찾아 헤맸지만, ‘전쟁’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거대하고 참혹한 비극 앞에서, 인간의 모든 언어는 얼마나 무력하고 공허하며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한 것인지 처절하게 깨달을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더욱 힘주어 잡는 것, 그녀의 심장이 멎을 듯한 고통을 온전히 함께 느끼며 침묵으로 곁을 지키는 것,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어쩌면 그 순간에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할 무책임한 약속을 바보처럼 반복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11월의 폴란드는 마치 우리의 찢겨진 마음과 예고된 이별을 미리 애도라도 하듯, 그해 겨울 들어 가장 차갑고 냉혹한 비를 도시 전체 위에 퍼붓고 있었다. 빗방울은 마치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밤새도록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고, 거리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은 아스팔트 위에 흥건히 고인 물웅덩이 속에서 속절없이 일그러지고 부서지며 절망적인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음울하고 스산하며 폭력적이기까지 한 날씨는, 우리의 내면을 할퀴고 지나간 거대한 슬픔과 절망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자연의 거대한 통곡처럼 느껴졌다.

그 길고 어두웠던 밤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마치 그것이 마지막임을 예감이라도 한 듯, 서로를 온 힘을 다해, 부서져라 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평소에 익숙하게 맡았던 주방의 향신료와 음식 냄새 대신, 축축하게 젖은 슬픔과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의 예감이 뒤섞인, 낯설고 서늘하며 어딘가 비릿하기까지 한 향기가 배어 나왔다. 그것은 어쩌면 곧 닥쳐올 영원한 상실을 예감한 나의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이 만들어낸, 후각적 환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잠시 후, 아주 천천히, 마치 무거운 쇠사슬을 끊어내듯 힘겹게 내 품에서 빠져나와, 아주 잠시 동안,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복잡하고 심연과 같은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짧고도 영원 같았던 시선 속에는, 말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며 교차하고 있었다. 함께했던 짧은 시간들에 대한 애틋한 감사와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미안함, 찰나였지만 강렬했던 사랑의 기억과 그 기억을 이제는 묻어야 한다는 체념, 포화 속 아들을 향한 어미의 본능적인 모성애와 냉혹한 현실에 대한 깊은 절망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슴 시리도록 명백하고 잔인한,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임을 알리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의 슬픔.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라도 뚫린 듯,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맹렬한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나에게 어떤 작별의 말도, 하다못해 짧은 인사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저 침묵. 그것이 그녀가 이별 앞에서 선택한 마지막 언어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치 홀린 듯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 들어갔다. 검은색 싸구려 우산 아래 위태롭게 가려진 그녀의 작고 연약한 실루엣은, 굵어지는 빗줄기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밤안개 속으로 점점 더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녹아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한 편의 슬프고 아름다운 흑백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1월의 그 지독하고 잔인했던 비는 그 후로도 마치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처럼 며칠을 더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멈추지 않는 비와 함께, 제니아는 내 곁을, 그리고 잠시 동안 그녀의 고단한 삶이 머물렀던 폴란드의 이 낯선 땅을 영원히 떠나갔다. 어디로 갔는지, 그녀의 아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마침내 기나긴 비가 그치고 난 후의 거리는, 언제 그토록 격렬한 비가 쏟아졌냐는 듯, 거짓말처럼 씻긴 듯 맑고 투명한 햇살 아래 눈부시게 반짝였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거센 폭풍우가 멈추지 않고 몰아치고 있었다. 밥집의 주방은 그녀가 떠나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여전히 시끄럽고 분주하게 돌아갔고,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가 서 있던 빈자리는 또 다른 낯선 얼굴, 새로운 사연과 절박함을 가진 또 다른 우크라이나 여성으로 빠르게 채워졌다. 시간은 그렇게 무심하고 냉정하게 흘러갔고, 삶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제의 상처를 망각한 채 오늘의 노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앞으로 그 어떤 새로운 만남이 찾아온다 해도,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 계절이 수없이 바뀐다 해도, 내 기억 속에, 내 영혼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각인된 제니아라는 이름의 빈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온전히 메울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그녀가 내게 남기고 간 고요한 평정의 깊은 여운과, 11월의 그 차갑고 거세던 빗속으로 스러져간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모든 시간 속에서 결코 빛바래거나 희미해지지 않을, 영원히 애틋하고 시리도록 아픈 풍경으로 남아 있을 터였다. 11월의 비는, 이제 내게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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