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완전무결한 부재
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하던 인플루언서이자, 현 시대의 사상가로 추앙받던 최지훈의 죽음은 한여름 정오의 하늘을 가르는 마른번개처럼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의 부재는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 양쪽에 동시에 거대한 공백을 만들며, 수백만 팔로워들의 타임라인을 순식간에 차가운 비탄으로 물들였다. 서울 강남의 심장부에 위치한 그의 펜트하우스,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오는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그 공간에서 그는 발견되었다. 마치 중요한 연설을 앞둔 사람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슈트 차림이었다. 구두 끝부터 세심하게 매만진 머리카락까지, 모든 것이 마치 마지막 순간을 위해 공들여 연출된 무대 위의 소품처럼 정갈했다. 그의 죽음은 삶의 종결이라기보다, 어떤 의식의 완성을 닮아 있었다.
침실, 고요함만이 감도는 그 공간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마치 인쇄된 것처럼 반듯하고 고른 필체의 유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그의 지적이고 정돈된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듯했다.
"나의 여정은 이 지점에서 멈춥니다. 더 이상 나아갈 의미도, 힘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삶이란 결국 홀로 걸어가야 하는 외로운 길이며, 저는 이제 그 길의 끝에 도착했습니다. 길 위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풍경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부디 각자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진실의 빛을 따라, 자신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 최지훈"
유서는 그의 평소 문체처럼 명료하고, 어딘가 철학적인 여운을 남겼다. 검시관은 사망 추정 시각을 특정했고, 법의학팀은 치명적인 독극물의 흔적을 그의 몸 안에서 발견했다. 아파트의 모든 CCTV 기록은 그가 마지막으로 현관을 들어선 이후, 단 한 명의 외부인도 출입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증명했다. 최첨단 보안 시스템 역시 침입의 미세한 흔적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모든 물리적 증거는 하나의 결론, 즉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찰청 내부에서는 이미 사건 종결 보고서의 초안이 작성되고 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유명인의 비극적 선택', 언론은 곧 그렇게 헤드라인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 중부경찰서 강력팀의 이강민 형사는 그 깔끔하게 봉합된 결론 앞에서 본능적인 위화감을 느꼈다. 25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 동안 그의 손을 거쳐 간 수많은 사건들은 그에게 표면 아래 꿈틀거리는 진실의 맥락을 감지하는 날카로운 직관을 부여했다. 그는 단순히 증거의 나열이 아닌, 사건 전체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 그 미묘한 불협화음을 읽어내는 데 능했다. 최지훈의 펜트하우스를 둘러보던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인위적일 정도로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심혈을 기울여 연출한 연극 무대의 마지막 장면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의 마지막 공간이... 이렇게까지 질서정연할 수 있을까?" 이강민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아직은 사건의 표면만을 읽는 데 익숙한 신참 형사 김태영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선배님, 유서도 명확하고, 독극물 반응도 나왔습니다. CCTV에도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었고요. 모든 정황이 자살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까?"
이강민은 대답 대신, 최지훈의 서재 책상 위에 마치 도서관 사서가 정리한 듯 각 맞춰 정렬된 노트들과 태블릿 PC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 그 물건들에 스며 있을지 모를 마지막 감정의 잔해를 더듬고 있었다.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앞두고 있을 때, 그 심리 상태는 극과 극을 오가네.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듯한 격렬한 혼란에 빠지거나, 아니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듯한 깊은 체념의 상태에 이르거나. 어느 쪽이든, 이렇게 주변을 완벽하게 정리하고, 마치 내일 아침 다시 이곳에 앉을 것처럼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둘 정신적 여유는 없어. 이건…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리 같아."
그의 시선은 다시 침실로 향했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 검시팀이 이미 지문 채취를 마친 상태였지만, 이강민은 장갑 낀 손으로 컵을 조심스럽게 들어 빛에 비춰보았다. 컵 가장자리에는 희미하게 입술 자국과 손가락 끝부분의 지문 일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컵 전체를 단단히 움켜쥐었을 때 남는, 힘이 들어간 선명한 지문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건네받아, 아주 잠시, 가볍게 입술만 축인 듯한 흔적이었다.
"독약을 마신 사람이라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토록 섬세하게 컵을 다루진 않았을 거야. 고통 속에서, 혹은 결연한 의지 속에서, 컵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겠지." 그는 컵을 내려놓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강민은 이 사건이 단순한 자살이라는 결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방법론적인 의문보다, '왜' 죽어야만 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최지훈. 그는 단순한 SNS 스타, 반짝이는 유명세에 기댄 인물이 아니었다. 철학 박사 학위를 소지한 그는 '자기인식의 심층 구조와 의식 확장의 가능성'이라는 난해한 주제로 학계의 주목을 받은 진지한 학자였다. 그의 대중 강연은 아이돌 콘서트 티켓처럼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그가 펴낸 책들은 인문학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의 최상단을 차지했다. 수백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그의 유튜브 채널은 '의식의 거울'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자아, 실존, 의식의 본질과 같은 심오한 철학적 질문들을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는 언어로 풀어내며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법을,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법을 가르쳤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진정으로 '우리'의 것일까요?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정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窓)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되고, 때로는 교묘하게 조작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나'라고 믿는 이 의식의 주체는, 과연 온전히 독립적인 존재일까요?"
이것은 그가 죽기 며칠 전, 마지막 라이브 강연에서 던졌던 화두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차분함에 더해, 어딘지 모를 긴장감과 절박함마저 느껴졌었다.
최지훈의 펜트하우스를 나서며, 차갑게 식어버린 도시의 바람을 맞으며 이강민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이건 표면 아래 거대한 빙산이 숨겨진 사건이야. 단순한 자살이 아니야. 여기에는 훨씬 더 깊고, 어두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어.' 그의 오랜 형사적 직감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최지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는 거대한 미스터리의 서막일 뿐이었다.
제2장: 디지털 메아리와 속삭이는 일기
서울 중부경찰서 강력팀 사무실은 언제나처럼 미해결 사건 서류들과 희미한 담배 냄새, 그리고 밤샘 수사의 피로가 뒤섞여 묵직한 공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강민의 책상은 특히 더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는 그의 오랜 경력을 증명하는 훈장이자 족쇄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모든 서류들을 거칠게 한쪽으로 밀어낸 채, 차갑고 매끈한 표면의 최지훈의 노트북과 태블릿 PC를 올려놓았다. 디지털 시대의 범죄는 종종 보이지 않는 데이터의 흐름 속에 결정적인 단서를 숨겨놓는다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경험해왔다. 지워진 파일, 암호화된 메시지, 숨겨진 메타데이터… 그 속에는 때로 피해자의 마지막 외침이 담겨 있기도 했다.
"선배님, 사이버 수사팀에서 최지훈의 디지털 기기 1차 분석 결과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김태영 형사가 얇은 보고서 한 부를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왜 이렇게까지?' 하는 의문이 서려 있었지만, 이강민의 집요함에 대한 존중 또한 담겨 있었다.
이강민은 말없이 보고서를 집어 들고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최지훈의 노트북 하드 드라이브는 그의 지적 활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대한 아카이브였다. 철학, 심리학, 신경과학, 인공지능에 대한 방대한 연구 자료, 미완성 논문들, 강연 준비 파일, 그리고 그가 운영하던 유튜브 채널 '의식의 거울' 시리즈의 편집 영상들이 가득했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일상적인 연구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보고서 말미에 기록된,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업로드한 영상 파일 목록이 이강민의 날카로운 시선을 붙잡았다.
"이 마지막 영상… 업로드 시간 좀 정확히 확인해봐. 사망 추정 시각과 얼마나 차이가 나지?"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김태영은 재빨리 자신의 태블릿으로 경찰 내부망에 접속해 정보를 확인했다. "네, 선배님. 검시 결과 나온 사망 추정 시각으로부터 정확히 6시간 12분 전에 업로드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의 채널에 올라간 마지막 영상입니다."
이강민은 주저 없이 최지훈의 노트북을 열어 해당 영상을 재생했다. 화면 속 최지훈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차분하고 지적인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배경은 그의 서재였고, 조명은 부드러웠다. 영상의 주제는 '의식의 경계와 자아의 통합: 분열된 자아에서 통합된 인식으로'였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고 말이죠. 하지만 어쩌면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라고 불리는 이 존재가 과연 하나의 단일한 실체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여러 의식의 복합체인가? 현대 뇌과학과 심리학, 그리고 동양 철학의 통찰은 우리의 의식이 생각보다 훨씬 더 유동적이며,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경계는 사실, 매우 희미하고 투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명료했고, 논리는 정연했다. 영상은 약 30분 동안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평소처럼 시청자들에게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가지길 권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모든 것이 평소의 최지훈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영상을 끝까지 지켜본 이강민의 미간에는 의혹의 그림자가 깊어졌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이질감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영상을 처음부터 다시 재생했다. 이번에는 볼륨을 최대로 높이고, 사운드에 집중했다.
최지훈의 마지막 인사말, "여러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끝나고 화면이 검게 변하기 직전, 아주 짧은 정적 뒤에 무언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노이즈나 마이크의 미세한 울림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작아서 의식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소리였다. 하지만 이강민의 단련된 감각은 그것이 단순한 기술적 결함이 아님을 감지했다.
"김 형사, 이 영상 파일 원본, 지금 당장 국과수 음성 분석팀으로 보내. 최첨단 장비로 정밀 분석 의뢰하고, 특히 마지막 부분, 엔딩 크레딧 올라가기 직전의 미세 음원 분리 및 증폭을 최우선으로 요청해."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다음 날 오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음성 분석팀의 긴급 보고서가 도착했다. 이강민은 사무실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려는 듯 헤드폰을 깊숙이 눌러쓰고, 분석팀에서 보내온 증폭 및 필터링된 음성 파일을 재생했다.
처음에는 여전히 지직거리는 배경 소음과 최지훈의 희미한 마지막 숨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몇 초간의 집중 끝에, 그 소음의 막 뒤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소리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최지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훨씬 낮고, 차갑고, 기계적인 느낌마저 드는, 변조된 듯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마치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속삭임처럼, 그러나 섬뜩할 정도로 명료하게 말했다.
"나를 멈출 수는 없다."
이강민은 순간 등골을 타고 오르는 차가운 전율을 느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불길한 예감. 그는 헤드폰을 벗어 던지듯 내려놓고, 재생된 음성 파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최지훈의 마지막 영상, 그의 마지막 메시지 뒤에 숨겨진 이 섬뜩한 목소리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누가, 어떤 의도로 이런 끔찍한 흔적을 남겼단 말인가?
"김 형사," 이강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아져 있었다. "최지훈의 자택에서 수거해 온 물품 중에… 그의 개인적인 기록물, 일기장 같은 건 없었나?"
김태영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수사 기록을 확인하고는 창고에서 커다란 압수물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상자 안에는 두툼한 가죽 표지의 노트들이 여러 권 들어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선배님. 정말 방대한 양이네요. 거의 매일 일기를 쓴 것 같습니다. 철학자라 그런지 기록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나 봅니다."
이강민은 상자를 열어 가장 최근 날짜의 일기부터 꺼내 펼쳤다. 최지훈의 일기는 그의 성격처럼 지극히 논리적이고 분석적이었다. 마치 스스로를 대상으로 한 임상 연구 보고서처럼, 그는 자신의 연구 진행 상황, 떠오르는 철학적 사유들, 그리고 내면의 감정 변화까지 매우 상세하고 정교하게 기록해 내려갔다. 그러나 최근 몇 주간의 기록으로 넘어오면서, 그의 글 속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변화, 불안과 혼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날짜 생략) …이상하다. 요즘 들어 내 생각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마치 누군가가 내 머릿속 생각의 흐름에 몰래 개입하여, 아주 미묘하게 방향을 틀고 있는 듯한 느낌. 이것이 내가 그토록 탐구해왔던 '의식의 침투성' 혹은 '정신적 간섭'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란 말인가? 아니면 과도한 연구로 인한 망상인가? 분간하기 어렵다." - 약 3주 전 일기
"(날짜 생략) …그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내 연구, 특히 '프로젝트 E'에 대한 나의 이론적 결과물들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류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들은 이미 내 연구의 핵심을 파악했고, 이제는 나를… 나 자신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감시가 아니다." - 약 2주 전 일기
"(날짜 생략) …나는 이제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심지어 내 영상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내가 최종 편집을 마친 영상 파일에, 내가 넣지 않은 미세한 소음이나 시각적 왜곡이 나타난다. 누군가 내 시스템에 원격으로 접근하고 있다. 내 작업물들이 오염되고 있다. 이것은 경고인가, 아니면 조롱인가?" - 약 1주 전 일기
이강민은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며 점점 더 깊고 어두운 미로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최지훈은 단순한 피해망상에 시달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정체불명의 '그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으며, 정신적으로 침식당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그들'은 그의 연구, 특히 '프로젝트 E'라고 명명된 무언가와 깊은 관련이 있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일기는 그가 사망하기 바로 전날 밤에 작성된 것이었다. 그의 필체는 이전의 반듯함을 잃고, 다급함과 절망감이 뒤섞여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들은 내 이론을 현실에 구현하려 한다. 인간의 의식을 원격으로 조작하고 통제하는 기술. 내가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으로 탐구했던 그 위험한 가능성이, 이제 현실의 괴물이 되어 나를 삼키려 한다. 그들은 이미 나에게도 그 기술을 시험하고 있다. 내 의지의 방어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낀다. 생각이 흐려지고, 감정이 멋대로 요동친다. 더 이상 저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면… 적어도 이 진실을 세상에 알릴 증거라도 남겨야 한다. 누군가, 부디, 이 메시지를 발견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저항이다."
이강민은 무겁게 일기장을 덮었다. 최지훈이 남긴 마지막 절규는 그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가 언급한 '그들'은 과연 누구이며, 그토록 두려워했던 '의식 조작 기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의 죽음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영상 속의 섬뜩한 목소리와 일기장의 절망적인 기록은 하나의 거대한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최지훈의 죽음은 자살로 위장된, 훨씬 더 치밀하고 끔찍한 음모의 결과일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제3장: 의식의 미로, '프로젝트 E'의 실체
최지훈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단순한 자살 사건이 아닐 수 있다는 확신이 짙어지면서, 이강민은 수사의 방향을 그의 학문적 연구 자체로 돌렸다. 그의 죽음의 실마리는 그의 삶의 정수였던 연구 속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강민은 최지훈이 개인 연구실로 사용했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내의 한 공간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측의 협조를 얻어 들어선 그의 연구실은, 그의 펜트하우스처럼 놀랍도록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화려함 대신 지성의 깊이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책장에는 철학 고전부터 최신 신경과학, 인공지능, 양자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을 보여주는 방대한 서적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벽에는 복잡하게 얽힌 신경망 회로도, 다양한 뇌 활동을 시각화한 fMRI 스캔 이미지, 그리고 그가 고안한 것으로 보이는 의식의 다층적 구조에 대한 다이어그램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단순한 철학자의 서재라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을 탐험하려는 첨단 연구소의 축소판 같았다.
연구실 한쪽 구석에는 일반적인 연구실에서는 보기 드문 고성능 컴퓨터 시스템과 복잡한 데이터 분석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강민은 직감적으로 이 시스템이 최지훈 연구의 핵심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사이버 수사팀에서 파견된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와 함께 컴퓨터 시스템을 부팅하고, 최지훈의 연구 자료들을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학술 논문 초고, 연구 노트, 시뮬레이션 데이터 파일들이 발견되었다. 대부분은 그의 공식적인 연구 주제인 '자기인식과 의식의 확장'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러던 중, 이강민의 눈에 유독 눈에 띄는, 강력한 암호로 보호된 폴더 하나가 발견되었다. 폴더의 이름은 단 두 글자, 'Project E'였다. 최지훈의 마지막 일기에서 언급되었던 바로 그 프로젝트였다.
암호 해독에는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최지훈은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연구를 보호하기 위해 다중 암호화 기법을 사용한 듯했다.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포렌식 전문가가 암호 해독에 성공했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강민은 긴장된 마음으로 폴더의 내용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단 하나의 파일, 아직 미완성 상태로 남겨진 방대한 분량의 논문 초고가 들어 있었다. 파일명은 그의 지적 야심과 동시에 섬뜩한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인공지능 기반 의식 동조화 및 변조 기술: 이론적 토대, 실험적 검증 및 윤리적 고찰'.
이강민은 숨을 죽인 채 논문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것은 단순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었다. 최지훈은 최신 뇌과학 연구, 인공지능의 딥러닝 알고리즘, 그리고 특정 주파수의 음파 및 시각적 패턴 자극을 결합하여, 인간의 무의식적 영역에 접근하고, 나아가 감정과 생각, 심지어는 행동 패턴까지 미묘하게 조작하거나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기술의 이론적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었다. 그는 특정 알고리즘으로 처리된 미디어 콘텐츠(영상, 음악, 텍스트 등)가 어떻게 수용자의 잠재의식에 침투하여 감정적 반응이나 인지적 편향을 유발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을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고 구체적인 방법론과 함께 제시하고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기술이 개인 수준을 넘어 집단적 수준에서 적용될 경우, 사회 전체의 여론이나 집단 심리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잠재력까지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일이… 정말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강민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저명한 철학자의 연구 논문이라는 형태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논문의 마지막 부분, '윤리적 고찰 및 제언' 섹션에서 최지훈의 깊은 고뇌와 두려움이 드러났다. 그의 어조는 학자적 냉철함에서 벗어나 경고와 우려로 가득 차 있었다.
"본 연구에서 제시된 기술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가능성을 열어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특히 이 기술이 권력이나 자본의 손에 들어가 악용될 경우, 개인의 자유 의지를 침해하고 사회 전체를 통제하려는 시도에 이용될 수 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교묘하고 강력한 형태의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특히 소셜 미디어와 같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이 기술이 광범위하게 전파될 경우, 그 파급력과 통제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 결과를 공표하는 것에 대해 극도의 신중함이 요구된다. 이 기술의 실제적 구현 가능성과 잠재적 위험성에 대한 더 깊은 사회적 논의와 엄격한 윤리적 통제 장치가 마련되기 전까지, 이 연구는 봉인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이 이론이 실험실 수준에서 실제로 작동하는지, 그 효과와 부작용은 무엇인지 명확히 검증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검증 과정 자체의 위험성 또한 통감한다."
이강민은 논문을 읽고 난 후 깊은 충격과 함께 섬뜩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최지훈의 일기에서 언급된 '그들'은 바로 이 위험천만한 기술, '프로젝트 E'에 눈독을 들인 세력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최지훈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의 이론을 현실화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최지훈 자신도 그들의 실험 대상이 되었거나, 혹은 그들의 계획에 협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제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은 더 이상 단순한 자살이나 우발적인 사고가 아닌, 거대한 음모의 일부일 가능성이 99% 이상으로 치솟았다.
다음 단계로, 이강민은 최지훈의 개인 이메일과 연구 관련 통신 기록을 샅샅이 뒤졌다. 대부분은 학계 동료들과의 연구 교류, 학회 참석 요청, 출판사와의 연락 등 평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개월 사이에 유독 빈번하게 등장하는 발신자가 있었다. '띵커스랩(Thinkers Lab)'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민간 연구소였다.
이메일 기록에 따르면, '띵커스랩'은 인공지능과 인간 심리, 행동경제학의 융합 연구를 표방하며 최지훈에게 처음 접근했다. 그들은 최지훈의 '의식의 구조'에 대한 연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초기 메일에서 최지훈은 이 제안에 상당한 학문적 호기심과 열정을 보이며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몇 차례의 미팅과 자료 교환이 이루어진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최지훈의 메일 톤은 점차 신중함과 경계심으로 바뀌어갔다.
그가 '띵커스랩' 측에 보낸 마지막 이메일은 그의 우려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박진우 수석 연구원님께. 지난번 미팅에서 논의된 귀 연구소의 궁극적인 연구 목표, 특히 '사회적 영향력 극대화를 위한 대중 의식 최적화 솔루션 개발'이라는 프로젝트 방향성에 대해 심각한 윤리적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제가 추구하는 학문적 이상과 연구 윤리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따라서 더 이상의 협력은 어렵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 연구 자료에 대한 접근 권한 역시 철회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메일에 대한 '띵커스랩'의 수석 연구원, 박진우라는 인물로부터 온 답장은 짧지만 섬뜩할 정도로 단호했다.
"최지훈 교수님, 교수님의 결정은 유감스럽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협력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교수님의 혁신적인 이론은 이미 저희 '프로젝트 E'의 핵심 아키텍처로 통합되었으며, 초기 단계의 파일럿 테스트는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귀하의 우려는 이해하지만, 때로는 더 큰 선(善)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도 있는 법입니다. 곧 저희의 성과에 대한 더 구체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실 겁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이 마지막 이메일은 최지훈이 사망하기 정확히 2주 전에 수신된 것이었다. '프로젝트 E'라는 명칭이 다시 한번 등장했다.
이강민은 즉시 '띵커스랩'이라는 조직에 대한 공식적인 조회를 지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띵커스랩'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등록된 연구소나 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했던 웹사이트는 존재했지만, 방문자를 현혹하는 세련된 디자인과 추상적인 비전 제시 외에는 연구소의 실제 위치, 연구원들의 구체적인 신상 정보, 자금 출처 등 실질적인 정보는 전무했다.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마치 유령 조직 같았다.
'이건…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비밀 조직이야.' 이강민은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수사의 다음 방향으로, 그는 최지훈이 활동했던 온라인 학술 포럼이나 익명 커뮤니티의 기록을 추적했다. 대부분은 건전한 학문적 토론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지만, 극소수의 전문가들만 접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암호화된 익명 기반의 심층 웹 포럼에서 의미심장한 흔적을 발견했다. 최지훈은 '옵저버(Observer)'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프로젝트 E'의 위험성에 대해 익명의 누군가와 논쟁을 벌인 기록이 남아 있었다.
"E 프로젝트가 현실화된다면, 인류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쏘아 올린 작은 탐구의 화살이 이런 끔찍한 괴물을 불러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이미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초기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들의 폭주를 멈출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글에 달린, '의식의 방랑자(Wanderer of Consciousness)'라는 섬뜩한 닉네임의 사용자가 남긴 답변은 더욱 불길했다.
"옵저버, 당신은 이미 E 프로젝트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실험 대상일지도 모르죠. 그들은 당신의 생각마저 읽고, 당신의 의식을 조금씩 조작하고 있을 겁니다. 그 미묘한 변화를 스스로 감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저는 이미 그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멈추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그들의 감시망은 당신의 상상 이상으로 촘촘합니다."
이강민은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나가며 거대한 그림의 윤곽을 그리기 시작했다. 최지훈은 단순한 철학자나 인플루언서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라는 성역(聖域)을 침범할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잠재력을 지닌 이론을 창조해낸 과학자였고, 그의 발견은 '띵커스랩'이라는 정체불명의 비밀 조직의 주목을 받았다. 이 조직은 최지훈의 이론을 탈취하여 '프로젝트 E'라는 이름 아래 위험한 실험을 시작했고, 최지훈 자신마저 그 실험의 희생양이 되었거나, 혹은 그들의 계획을 막으려다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바로 그때, 이강민의 사무실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국과수 디지털 포렌식 팀이었다.
"이강민 형사님, 방금 최지훈의 마지막 영상 파일에서 추가적인 분석 결과를 얻었습니다. 아주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수화기 너머 젊은 분석가의 목소리는 흥분과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뭔가? 말해보게."
"영상 파일의 메타데이터 영역 깊숙한 곳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도록 교묘하게 숨겨진 데이터 스트림을 발견했습니다. 분석 결과, 특정 지리 좌표값이 암호화되어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명백히 의도적으로 누군가 남긴 메시지로 보입니다."
이강민은 즉시 좌표값을 받아 적었다.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울 외곽, 인적이 드문 공업단지 내의 특정 창고 건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쩌면 최지훈이 남긴 마지막 단서, '그들'의 본거지를 가리키는 이정표일지도 몰랐다.
제4장: 숨겨진 연구소, 차가운 진실의 현장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도시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저녁, 이강민과 김태영은 최지훈의 영상 파일 메타데이터에 숨겨져 있던 좌표가 가리키는 장소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은 그들을 서울 외곽, 낡고 오래된 공장들과 창고들이 즐비한 인적 드문 공업단지로 안내했다. 좌표가 지목한 곳은 주변 건물들 사이에서도 유독 더 낡고 버려진 듯한 외관의 거대한 창고 건물이었다. 녹슨 철제 셔터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깨진 유리창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누가 보아도 수년간 방치된 폐건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강민의 예리한 눈은 그 위장된 모습 너머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놓치지 않았다. 건물의 외벽 곳곳,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에 설치된 것은 명백히 최신형 고성능 감시 카메라들이었다. 또한, 건물 주변에는 미세한 움직임까지 감지할 수 있는 적외선 센서들이 교묘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버려진 창고라고 하기에는 과도할 정도로 철통같은 보안 시스템이었다.
"선배님, 이런 폐건물에 왜 이렇게 첨단 보안 장비가 설치되어 있는 걸까요?" 김태영이 의아함과 긴장이 뒤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젊은 눈에도 이곳의 부자연스러움은 명백하게 느껴졌다.
이강민은 권총의 안전장치를 확인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뻔하지.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세상의 눈으로부터 완벽하게 숨기고 있다는 증거야. 우선 건물 주변을 조용히 정찰하며 다른 출입구를 찾아보자. 정문은 분명 내부에서 전자적으로 통제되고 있을 테니."
두 사람은 어둠을 엄폐물 삼아 창고 건물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예상대로 정문은 육중한 전자 잠금장치로 봉쇄되어 있었고, 강제로 열려고 시도했다가는 즉시 경보가 울릴 것이 뻔했다. 그러나 건물 뒤편, 쓰레기 더미와 폐자재들 사이에 가려진 작은 비상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물쇠는 비교적 구식이었고, 이강민은 25년 형사 경력 동안 익힌 손기술과 휴대용 만능키를 이용해 소리 없이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삐걱거리는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두 사람은 숨을 삼켰다. 건물 내부는 겉모습의 황량함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버려진 창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은 마치 SF 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눈부실 정도로 밝고 차가운 최첨단 연구 시설이었다. 넓은 홀의 벽면에는 수십 개의 대형 모니터들이 설치되어 복잡한 데이터 그래프와 실시간 영상들을 띄우고 있었고, 중앙에는 강력한 성능의 서버 컴퓨터들이 낮은 냉각 팬 소음을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홀 중앙에는 마치 치과 진료 의자처럼 생긴 특수 제작된 의자들이 여러 대 놓여 있었고, 각 의자에는 복잡한 전선으로 연결된 헤드셋과 VR 고글처럼 보이는 장비들이 달려 있었다.
"이게… 대체…?" 김태영은 눈앞의 광경에 압도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곳은 단순한 비밀 연구소가 아니었다. 무언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강민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지시했다. "김 형사, 주변 경계하고 통신 상태 확인해. 난 여기 시스템을 좀 살펴봐야겠어." 그는 가장 가까운 제어 콘솔로 다가가 주변을 살폈다. 한쪽 벽면에 걸린 거대한 화이트보드에는 알아보기 힘든 복잡한 수식들과 뇌 구조 다이어그램, 그리고 알고리즘 순서도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도표들의 중앙 상단에, 굵은 글씨로 프로젝트 명칭이 적혀 있었다. '프로젝트 E - 의식 동조화 시스템 v3.7 - 임상 실험 단계'.
"찾았다… 최지훈이 말한 프로젝트가 바로 이거였어." 이강민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은 연구실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홀과 연결된 복도를 따라 들어가자, 작은 방들이 여러 개 나타났다. 각 방의 문은 두꺼운 방음 처리가 되어 있었고, 외부에서는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작은 관찰창만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강민은 첫 번째 방의 관찰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젊은 여성 한 명이 중앙의 특수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머리에 복잡한 센서가 달린 헤드셋을 쓰고 있었고, 눈에는 VR 고글 같은 것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특수한 패턴의 영상이 빠르게 재생되는 듯한 디스플레이가 놓여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마치 마네킹처럼.
"이 사람…!" 김태영이 옆에서 숨을 헉 삼켰다. "임수아… 맞죠?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뷰티 인플루언서인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이강민은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두 번째 방에는 유명 게임 스트리머가, 세 번째 방에는 시사 평론으로 이름을 날린 중년의 유튜버가 앉아 있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방에도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분야에서 높은 인지도를 가진 인플루언서들이 첫 번째 방의 여성과 똑같은 모습으로, 의식 없는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띵커스랩'의 '프로젝트 E' 실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최지훈의 일기에서 언급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한 초기 실험'이 바로 이것이었다.
마지막 복도 끝에 위치한 방, 다른 방들보다 조금 더 크고 제어 장비들이 더 복잡하게 설치된 듯한 방에 이르렀을 때, 이강민은 관찰창 너머의 광경을 보고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방의 대형 스크린에는… 최지훈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강연 영상의 일부인 듯했다. 그의 차분하고 지적인 목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스크린 앞, 특수 의자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헤드셋과 고글을 착용한 채, 최지훈의 영상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띵커스랩'의 수석 연구원, 박진우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자기들이 만든 시스템에 자기가…?" 이강민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위이이이이잉-!
연구소 전체에 날카롭고 요란한 침입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붉은 경광등이 사방에서 번쩍이며 어둠과 빛의 격렬한 교차를 만들어냈다. 그들의 침입이 마침내 감지된 것이다.
"젠장! 빨리 증거를 확보하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이강민이 소리쳤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메인 컴퓨터 시스템으로 달려갔다. 이강민은 품에서 미리 준비해 온 대용량 USB 저장 장치를 꺼내 컴퓨터 포트에 꽂고, '프로젝트 E'와 관련된 모든 파일들을 닥치는 대로 복사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실험 데이터, 피험자 정보, 기술 설계도, 그리고 '띵커스랩'의 내부 보고서로 보이는 문서들이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파일 복사가 절반 정도 진행되었을 때, 복도 저편에서 여러 명의 육중한 발소리와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연구소 보안팀이 그들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선배님, 시간이 없습니다! 거의 다 됐습니다!" 김태영이 초조하게 외치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의 손에는 이미 권총이 들려 있었다.
이강민은 파일 복사 진행률 표시 막대만 노려보았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마침내 '복사 완료' 메시지가 화면에 뜨자마자, 그는 USB를 뽑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지금이야! 비상구 쪽으로!"
두 사람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검은 제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 여러 명이 나타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의 손에는 전기 충격기와 진압봉이 들려 있었다. 도망칠 길은 막혔다. 숨겨진 연구소의 심장부에서, 이강민과 김태영은 이제 정체불명의 적들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최지훈의 죽음에 얽힌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섰지만, 그 대가는 혹독할 것 같았다.
제5장: 그림자 속의 추격자, 드러나는 배후
창고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온 격렬한 몸싸움은 짧고 격렬했다. 이강민과 김태영은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오랜 강력계 형사의 경험과 젊은 패기를 바탕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강민은 상대의 공격을 노련하게 피하며 급소를 가격했고, 김태영은 몸을 날려 길을 막는 보안 요원들을 제압했다. 몇 분간의 혼란스러운 격투 끝에, 두 사람은 간신히 보안 요원들을 따돌리고 처음 들어왔던 비상구를 통해 연구소 밖으로 뛰쳐나왔다.
"헉… 헉…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김태영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입가에는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난 괜찮아. 자네는?" 이강민 역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그의 옆구리에는 격투 중 입은 타박상으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USB는… 확실히 챙겼나?"
이강민은 주머니 속 USB 저장 장치를 꽉 움켜쥐었다. "그래. 여기 안전하게 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그들은 서둘러 차에 올라타 공업단지를 벗어났다. 백미러를 통해 뒤쫓아오는 차량이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다행히 추격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강민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순히 도망치도록 내버려 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띵커스랩', 혹은 그 배후 세력은 이미 그들의 신원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그들은 단순히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가 아니라, 거대한 음모의 표적이 된 것이다.
경찰서로 복귀하는 대신, 이강민은 인적이 드문 외곽의 안전가옥으로 차를 몰았다. 경찰 내부에도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전가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사이버 수사팀의 가장 신뢰하는 후배에게 연락해 보안이 확보된 노트북과 분석 장비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밤새도록 이강민과 김태영, 그리고 사이버 분석 전문가는 USB에 담긴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안에는 충격적인 내용들이 가득했다. '프로젝트 E'는 단순한 의식 조작 기술 연구가 아니었다. 특정 인물(주로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플루언서, 언론인, 심지어 일부 정치인까지)을 대상으로 '의식 동조화'를 통해 그들의 생각과 발언을 미묘하게 통제하고, 이를 통해 사회 여론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는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 단계가 담겨 있었다. 붙잡혀 있던 인플루언서들은 모두 이 시스템의 '베타 테스터'였으며, 그들의 SNS 활동, 발언 내용, 심지어 표정 변화까지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되고 분석되고 있었다.
데이터 속에는 '띵커스랩'의 조직 구조와 핵심 인물들에 대한 정보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예상대로 박진우가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였으며, 그 위에는 '위원회'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상위 조직이 존재함을 시사하는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자금 출처는 여러 개의 유령 회사를 통해 복잡하게 세탁되고 있었으며, 국내외의 거대 기술 기업 및 투자 자본과 연관된 정황도 포착되었다.
"이건… 상상 이상입니다, 선배님." 김태영은 모니터에 떠 있는 '위원회' 관련 문서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순한 민간 연구소가 아니라, 거대한 배후 세력이 움직이는 프로젝트였군요."
"최지훈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이강민은 최지훈의 마지막 일기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자신의 연구가 이런 끔찍한 일에 이용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그래서 제거된 거겠지. 자살로 위장해서."
데이터 분석 중, 분석 전문가는 최지훈의 개인 폴더에서 암호화된 음성 파일을 하나 더 발견했다. 최지훈이 사망 직전, 자신의 목소리로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이 녹음을 듣는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파일을 찾았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내 의지를 완전히 빼앗긴 상태일 겁니다. '띵커스랩'과 박진우는 내 연구를 악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는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나에게도 '동조화' 실험을 강행했습니다. 내 생각이 흐려지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감정이 유도되는 것을 느낍니다. 저항하려 했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 목소리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유서까지 준비시킨 후에요. 모든 증거는 자살을 가리키도록 조작될 겁니다. 부디… '프로젝트 E'의 실체를 세상에 알려주십시오.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의식의 방랑자'… 그를 찾으십시오. 그는… 어쩌면…" *
음성 파일은 거기서 갑자기 끊겼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녹음을 중단시킨 것처럼. '의식의 방랑자'. 최지훈이 익명 포럼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 닉네임이었다. 그는 이 사태의 또 다른 열쇠를 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바로 그때, 안전가옥 외부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차량 접근 소리가 들렸다. 이강민은 창문 틈으로 밖을 살폈다. 검은색 세단 두 대가 소리 없이 다가와 안전가옥 주변을 포위하듯 멈춰 섰다. 차에서는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내렸다. 경찰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빛과 자세는 일반인과는 다른, 훈련된 자들의 그것이었다.
"젠장, 벌써 꼬리가 잡혔어!" 이강민이 낮게 욕설을 뱉었다. "모든 데이터 백업하고, 즉시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
그들은 서둘러 장비를 챙기고 뒷문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미 뒷문 쪽에도 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안전가옥은 완벽하게 포위된 상태였다.
"선배님, 이제 어떡하죠?" 김태영이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강민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정면 돌파는 무모했다. 그들의 목적은 아마도 USB 데이터 회수와 증인 제거일 것이다. 그렇다면…
"김 형사, 자네는 분석관 데리고 저쪽 창문으로 탈출해. 내가 시간을 벌겠다. 이 USB, 자네가 반드시 지켜야 해. 그리고 즉시 경찰청장 직속 감찰팀에 연락해서 이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해. 내 이름 대고, '프로젝트 E' 사건이라고 말하면 알 거다." 이강민은 USB를 김태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선배님!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명령이다!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야. 국가 안보와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어. 반드시 살아남아서 이 진실을 알려야 한다!" 이강민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그는 권총을 고쳐 잡고 앞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어서 가!"
김태영은 눈물을 삼키며 분석관을 부축해 창문을 통해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강민은 깊은 숨을 내쉬고, 앞문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다가오면 발포하겠다! 나는 서울 중부경찰서 이강민 형사다!"
문밖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박진우의 목소리였다.
"이강민 형사님, 오랜 경험으로 잘 아시잖습니까.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순순히 협조해주시면… 이야기가 좀 더 쉬워질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당신이 가진 '자료'뿐입니다."
이강민은 대답 대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길고 어두운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림자 속의 추격자들은 이제 그 모습을 드러냈고, 진실을 향한 마지막 싸움이 임박해 있었다.
제6장: 진실의 메아리, 그리고 남겨진 질문
안전가옥을 둘러싼 대치는 길지 않았다. 이강민은 노련하게 엄폐물을 활용하며 시간을 벌었지만, 수적으로 압도적인 '띵커스랩'의 요원들은 결국 문을 부수고 내부로 진입했다. 격렬한 총격전 대신, 그들은 비살상용 가스탄과 전기 충격기를 사용하여 이강민을 제압하려 했다. 이강민은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그들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의 눈앞이 흐려지기 직전, 그는 창문 너머로 김태영과 분석관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됐다… 그걸로 됐다…'
이강민이 다시 의식을 찾았을 때는 차갑고 딱딱한 의자에 몸이 묶인 채였다. 눈앞에는 예상대로 박진우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연구실에서 보았던 공허함 대신, 차가운 지성과 잔인함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강민 형사님, 깨어나셨군요." 박진우는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쓸데없는 저항은 서로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USB는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젊은 파트너가 가져갔겠죠?"
이강민은 대답 대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네놈들의 추악한 계획은 이미 세상에 알려질 거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박진우는 손수건으로 침을 닦아내며 픽 웃었다. "세상에 알려진다? 형사님, 세상은 진실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익숙하고 편안한 이야기를 원할 뿐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만들어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데이터는 그저 작은 소음에 불과해요. 곧 사라질 겁니다."
그는 옆에 있던 요원에게 눈짓했다. 요원은 특수한 헤드셋을 들고 이강민에게 다가왔다. '프로젝트 E'에 사용되던 바로 그 장비였다.
"최지훈 교수처럼 고통스럽게 가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박진우가 속삭였다. "협조하시면…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당신의 의식이 서서히 잠식당하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파멸하는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최 교수는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시스템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란 생각보다 훨씬 취약하더군요."
이강민은 눈을 감았다. 최지훈의 마지막 음성 메시지, 그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시스템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것이 최지훈 죽음의 진실이었다. 그는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E' 시스템에 의해 자살하도록 '명령'받고, 그 명령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서까지 자신의 손으로 쓰도록 강요당했을 것이다.
"네놈들 마음대로 해라." 이강민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내 정신까지 빼앗지는 못할 거다."
헤드셋이 그의 머리에 씌워지는 순간, 이강민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저항했다. 하지만 기계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음파와 시각적 자극은 그의 의식의 방어벽을 교묘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영상과 불쾌한 소음,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의 파편들이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한편, 김태영은 이강민의 희생 덕분에 무사히 안전가옥을 탈출하여 약속된 장소에서 경찰청장 직속 감찰팀과 합류했다. 그는 USB 데이터를 넘기고 그동안의 상황을 모두 보고했다. 감찰팀은 즉시 비상 체제에 돌입했고, 청장 직권으로 특수부대가 동원되어 이강민이 잡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띵커스랩'의 또 다른 비밀 시설을 급습했다.
급습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특수부대는 시설 내 요원들을 제압하고 박진우를 현장에서 체포했다. 이강민은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프로젝트 E'의 핵심 서버와 데이터는 모두 압수되었고, 실험 대상이었던 인플루언서들도 무사히 구출되었다.
사건의 전모는 극비리에 수사되었지만, 일부 내용이 언론에 유출되면서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띵커스랩'의 배후에 있던 '위원회'의 실체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내외의 거대 자본과 권력이 연루되었다는 정황 증거는 충분했다. 박진우를 비롯한 핵심 관계자들은 구속되었고, '프로젝트 E'는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최지훈의 죽음은 '띵커스랩'에 의한 계획된 살인으로 재수사되었고, 그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그의 마지막 영상에 숨겨져 있던 목소리 "나를 멈출 수는 없다"는, 어쩌면 최지훈을 조종하던 시스템의 오만한 선언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진실을 밝히려는 최지훈 자신의 마지막 저항의 메아리였을 수도 있다. 그 의미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몇 달 후, 건강을 회복한 이강민은 다시 강력팀으로 복귀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지만, 이제 그는 세상을 조금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종종 창밖의 도시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최지훈이 던졌던 질문,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진정으로 우리의 것일까?"
'프로젝트 E'는 막았지만, 그 기술의 씨앗은 이미 세상에 뿌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교묘한 방식으로 인간의 의식을 조종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 소셜 네트워크, 인공지능 알고리즘…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일까?
김태영이 커피를 들고 이강민의 곁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또 무슨 생각 그리 하십니까?"
이강민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커피를 받아들었다. "아니, 그냥… 세상이 참 복잡하다는 생각을 좀 하고 있었네."
그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화면에 몰두한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 보였지만, 어쩌면 그들 모두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영상 속에서 들려왔던 그 섬뜩한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진실의 메아리는 이강민의 귓가에,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최지훈의 죽음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했다.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