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무너진 파르테논, 눈먼 테미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 유구한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서구 문명의 이성과 합리성을 묵묵히 증언하던 파르테논 신전의 도리아식 기둥들이 포연에 무너져 내리는 환영을 본다. 정의의 여신 테미스는 스스로 눈을 가린 채, 진실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내동댕이치고, 응징의 칼날을 부러뜨렸다. 지금, 지중해의 동쪽 끝, 역사의 갈피마다 피와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땅,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은 인류가 쌓아 올린 이성의 신전과 정의의 법궁(法宮)이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음을 폭로하는 통렬한 실존적 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지정학적 분쟁이나 국지적 무력 충돌을 넘어, 21세기 인류의 집단적 양심을 시험대에 올린 거대한 윤리적 파탄이며, 우리가 ‘인간성’이라 부르던 가치의 총체적 붕괴를 예고하는 디스토피아적 전조이다.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이라는 완곡한 외교적 수사 뒤에 가려진 현실은, 국제법이 명백히 규정한 ‘집단학살(Genocide)’의 정의에 섬뜩하리만치 부합하는 행위들의 집합체다. 특정 민족, 즉 팔레스타인인들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명백한 의도 아래 자행되는 무차별적인 살해, 신체적·정신적 위해, 삶의 조건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들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망령을 현대사 한복판으로 소환한다.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 최악의 비극을 딛고 세워진 국가가, 이제는 그 비극의 가해자와 닮은 모습으로 역사의 거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실로 통탄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작금의 사태를 얄팍한 정치적 프레임이나 해묵은 종교적 갈등의 연장선으로만 치부하려는 모든 시도에 단호히 저항하며, 펜을 칼 삼고, 잉크를 피 삼아 이 야만적 광기에 대한 지식인의 준엄한 고발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는 어느 한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맹목적 비난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種) 전체의 존엄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으로 동조하는 것 또한 공범의 죄를 짓는 것임을 알기에, 역사의 법정 앞에 서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제1장: 잿빛 연기 속의 얼굴들 - 현상학적 접근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잔해 더미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울음조차 잃어버린 아이의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모든 정치적 수사와 이데올로기의 허울은 힘을 잃는다. 그 눈동자는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 우리에게 무한한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는 ‘타자의 얼굴(le visage d'autrui)’이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는 타자의 얼굴이 “살인하지 말라”는 절대적인 계율을 담지한 채 나에게 현현(顯現)한다고 설파했다. 얼굴은 나의 소유와 지배의 논리를 무너뜨리고, 나의 자유를 문제 삼으며, 나를 ‘나를 위한 존재’에서 ‘타자를 위한 존재’로 전복시키는 윤리적 사건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 ‘얼굴’의 철저한 말살이다. 이스라엘의 최첨단 군사 시스템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개별적 존엄과 고유한 서사를 지닌 ‘얼굴’로 인식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거부한다. 그들은 스크린 위에 떠오르는 열 감지 센서의 ‘점’이거나, ‘하마스’라는 거대하고 비인격적인 집단 명사 뒤에 숨겨진 추상적 숫자에 불과하다. 영국 가디언지의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의 83%가 민간인이라는 충격적인 통계는 이 ‘얼굴의 지움’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이는 보스니아 내전(57%), 시리아 내전(29~34%) 등 현대의 다른 참혹한 분쟁들과 비교해도 이례적으로 높은 수치로, 단순한 ‘부수적 피해’가 아닌, 민간인 자체를 겨냥한 의도적 공격, 즉 ‘전쟁범죄’의 혐의를 짙게 드리운다.
폐허가 된 병원의 복도에서,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절규하는 아버지의 모습, 끊어진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녀의 신음, 가족의 주검 앞에서 넋을 잃은 노인의 침묵. 이 모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고통의 얼굴들은 ‘안보’라는 추상적 명분 아래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유엔 보고서는 백기를 흔들며 항복 의사를 밝힌 민간인마저 사살되는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며, 이스라엘의 행위가 집단학살에 해당할 수 있음을 명시적으로 경고했다. 우리는 이 무수한 ‘타자의 얼굴’ 앞에서 레비나스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나의 존재가 타인의 죽음을 대가로 한 것이라면, 나의 존재 이유는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가자의 잿빛 하늘 아래 스러져간 수만 개의 얼굴들은 인류 전체를 향해 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제2장: 악의 평범성, 그 관료주의적 학살의 메커니즘
홀로코스트의 총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거대한 악이 특별한 악마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思惟)하기를 멈춘 평범한 인간들에 의해 기계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통찰, 즉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심 때문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에 성실히 복종하고 주어진 임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모범적인 관료’였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의 죄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한 ‘무사유(thoughtlessness)’에 있었다.
오늘날 가자에서 자행되는 대규모 살상은 아렌트의 분석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뼈아프게 증명한다. 폭격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 정밀 유도 폭탄의 좌표를 입력하는 기술자, 드론을 조종하는 병사들은 어쩌면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평범한 개인일지 모른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테러리스트 기반 시설 파괴’, ‘적대 세력 무력화’와 같은 고도로 추상화되고 탈인격화된 언어로 포장된 임무뿐이다. 이 거대한 관료주의적 살인 기계 속에서 개인의 도덕적 책임감은 희석되고, ‘명령 이행’이라는 논리가 모든 비판적 사유를 마비시킨다.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라는 ‘절대악’을 상정하고, 이들과의 전쟁은 선과 악의 싸움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끊임없이 유포한다. 이러한 선전은 자국민과 군인들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앗아가고, 가자 지구의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잠재적인 ‘인간 방패’ 또는 ‘테러 동조자’로 낙인찍는 효과를 낳는다. 학교와 병원, 유엔 난민기구(UNRWA) 시설까지 ‘하마스가 군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주장 하나만으로 폭격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러한 주장의 진위 여부를 독립적으로 검증할 길은 차단된 채, 의심은 곧 반역으로 치부된다. 이는 사유의 포기를 강요하고, 악을 평범한 일상의 과업으로 전락시키는 전체주의 시스템의 전형적인 작동 방식이다.
슬픈 진실은 대부분의 악이 선과 악에 대해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를 포기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아렌트의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 섬뜩한 현실로 다가온다. 가자의 비극은 단지 몇몇 광신적인 지도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의 의무를 방기한 채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되기를 자처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침묵과 동조가 빚어낸 합작품이다.
제3장: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유령과 오리엔탈리즘의 재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뿌리는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의 탐욕과 기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랍 민족에게는 독립을, 유대인에게는 국가 건설을 이중으로 약속한 벨푸어 선언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 팔레스타인 땅은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외부 세력의 지정학적 계산에 따라 분할되고 거래되는 대상에 불과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역사의 타자로 전락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발생한 ‘나크바(Nakba, 대재앙)’는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영원한 난민으로 만들었다.
현재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이러한 식민주의적 폭력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에 대한 오랜 봉쇄 정책은 사실상 거대한 ‘옥외 감옥’을 만들어 냈으며, 주민들의 이동의 자유, 경제 활동, 심지어 식수와 전기에 대한 접근권까지 통제하는 식민 통치의 현대적 변용이라 할 수 있다. 가자 주민들은 주권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이 공공연하게 팔레스타인인들을 ‘인간 짐승’에 비유하며 비인간화하는 언설을 사용하는 것은, 식민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며 폭력을 정당화했던 오리엔탈리즘의 망령을 떠올리게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통렬하게 비판했듯이, 서구는 동양을 신비롭지만 비이성적이고, 관능적이지만 나태하며, 잠재적으로 위험한 ‘타자’로 재현함으로써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을 ‘문명화된’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일반화하는 방식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하마스의 폭력은 규탄받아 마땅하지만, 이를 빌미로 팔레스타인 민중 전체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삶과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는 명백한 인종주의적 폭력이다.
가자 지구에 대한 ‘완전한 봉쇄’를 선언하며 식량, 물, 의약품, 연료의 반입을 차단한 이스라엘의 조치는 국제인도법상 명백한 ‘집단 처벌’에 해당한다. 이는 가자 주민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며, 기아를 전쟁 무기로 사용하는 반인도적 범죄이다. 국제구조위원회(IRC)와 같은 구호 단체들은 인도주의적 지원 통로마저 차단된 절망적인 상황을 호소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안보 조치를 넘어, 한 민족의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파괴하려는 식민주의적 지배 논리의 극단적 발현이다. 따라서 가자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묵은 종교적 갈등의 프레임을 넘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인종주의라는 근대사의 어두운 유산이 어떻게 21세기에 되살아나 작동하고 있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제4장: 역사의 법정, 그리고 지식인의 책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실의 편린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르완다와 스레브레니차의 집단학살이 그랬듯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그랬듯이, 오늘날 가자에서 벌어지는 참상 또한 언젠가는 역사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수많은 경고와 비판, 그리고 휴전 촉구 결의안들은 비록 당장의 무력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훗날 역사의 법정에서 이 범죄를 단죄할 중요한 증거로 기록될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이스라엘에 대해 집단학살 방지를 위한 임시 조치를 명령한 것은, 이미 국제법의 잣대가 이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식인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 되어 권력의 헤게모니에 봉사할 것인가, 아니면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처럼 권력의 거짓을 폭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길을 걸을 것인가? 선택은 자명하다. 지식인의 첫 번째 의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권력이 만들어내는 ‘공식적 진실’에 가려진 고통받는 이들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자의 비극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심지어 ‘중립’을 표방하는 것조차 기만적인 행위일 수 있다. 압도적인 군사력의 불균형 속에서 한쪽은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다른 한쪽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양비론’은 강자의 폭력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지금은 복잡한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지기 이전에, 무고한 생명이 무참히 스러져가는 이 참혹한 현실 자체에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때이다.
따라서 전 세계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를 넘어 연대해야 한다. 법학자들은 국제법 위반 사실을 낱낱이 고발하고, 역사학자들은 식민주의의 맥락을 밝혀내야 한다. 철학자들은 인간 존엄의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학자들은 폭력의 사회적 메커니즘을 분석해야 한다.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잊혀가는 고통을 기록하고, 언론인들은 권력의 방해를 뚫고 현장의 진실을 전해야 한다. 이러한 지식의 연대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정부와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구축한 거짓의 성벽에 균열을 내고, 세계 시민들의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
결론: 올리브 나무 아래, 다시 평화를 노래할 날을 위해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는 노래했다. “우리는 이 땅에 머물 것이다… 우리의 뿌리는 이 땅 깊숙이 박혀 있다.” 그의 시처럼, 팔레스타인 민중의 삶에 대한 의지와 존엄을 향한 열망은 결코 포격으로 파괴될 수 없다. 폐허 속에서도 올리브 나무는 다시 싹을 틔울 것이고, 아이들은 다시 웃음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쟁’이 아니다. 이는 한 민족을 상대로 자행되는 체계적인 ‘학살’이다. 희생자들의 숫자가 단순한 통계로 치부되고, 아이들의 죽음이 ‘부수적 피해’로 정당화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존엄을 말할 자격이 없다. 이제 세상의 모든 지식인, 그리고 깨어있는 모든 시민은 함께 일어나 외쳐야 한다.
이 광기를 멈추라.
살인을 멈추라.
가자 지구에 대한 봉쇄를 즉각 해제하고, 조건 없는 인도주의적 지원을 허용하라.
국제법을 유린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른 책임자들을 역사의 법정에 세워라.
그리고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도 다른 모든 민족과 동등하게, 자신들의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라.
이 목소리가 미약하게 들릴지라도, 수많은 목소리가 모일 때 거대한 함성이 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잿빛 하늘이 걷히고, 올리브 나무 그늘 아래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이 함께 웃으며 뛰어노는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결코 이 진실의 외침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윤리적 책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