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이 오르고, 역사의 장엄한 무대 위로 한 명의 3류 장사꾼이 난입한다. 그의 등장은 정제된 외교의 언어와 묵직한 약속의 가치를 소음으로 뒤덮는, 거대한 야바위판의 개막을 알리는 소란에 가까웠다. 도널드 트럼프, 그의 시대는 단순히 한 국가의 정치적 변곡점을 넘어,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국제 질서라는 섬세한 유리성을 향해 무대뽀로 돌진하는 불도저의 행진이었다. 그의 행정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부동산 개발업자의 조악한 광고 문구 같은 구호 아래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위대함’이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존경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리더십의 재건이었는가, 아니면 동맹의 주머니를 털고 국제적 약속을 휴지조각으로 만들며 세워 올린, 천박한 황금빛 탑의 신기루였는가.
미국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피와 가치를 나누었던 전통적 우방국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굴욕과 분노 속에서 찾아야만 했다. 뒷골목 흥정만도 못한 그의 무대뽀 정책은 동맹이라는 정교한 직물을 거침없이 잡아 찢었고, 보호무역주의라는 녹슨 철문은 세계 경제의 혈맥을 틀어막았다. 마치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가 채무자를 대하듯,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을 오직 비용과 이익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냉혹한 계산서를 들이밀었다. 이는 단순한 정책의 전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뢰, 명예, 약속과 같은 무형의 가치를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멸하고, 오직 눈앞의 이익을 위해 수십 년간의 연대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장사꾼의 가장 저열한 상술이었다.
본 칼럼은 이 참을 수 없는 천박함의 연대기를 기록하고, 트럼프 행정부가 추구했던 ‘미국 우선주의’라는 극단적 이기심이 어떻게 세계 질서의 근간을 탐욕스럽게 갉아먹고, 동맹의 숭고한 개념을 값싼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는지를 신랄하게 해부하고자 한다. 우리는 정치철학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권력의 본질을 탐문하고,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유사한 과오를 저질렀던 폭군과 암군들의 말로를 되짚어볼 것이다. 또한, 문학적 상징과 비유를 통해 이 시대의 불안과 혼돈,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 군상의 섬세한 감정선을 포착하려 한다. 이것은 한 정치인에 대한 단선적인 비판을 넘어, 우리 시대가 직면한 리더십의 위기, 그리고 상호 연결된 세계에서 고립주의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될 것이다.
1. 고립의 성채, 신기루가 된 위대함: 3류 장사꾼의 철학적 해부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을 관통하는 핵심 기조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였다. 이 구호는 그 자체로 강력한 정치적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세계화의 거친 파도 속에서 소외되고,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낀 미국 내 유권자들에게 이는 구원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세 단어짜리 세일즈 피치의 이면에는 위험천만한 철학적 빈곤이 내재해 있었다. 그것은 세계를 제로섬 게임의 장으로 인식하고, 타국의 이익을 자국의 손실로 간주하는 극단적 현실주의의 발현이었다.
이는 마치 토마스 홉스가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묘사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국제 관계에 그대로 투사한 것과 같았다. 하지만 트럼프에게 이 자연 상태는 피해야 할 비극이 아니라, 가장 힘센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할 수 있는 ‘바이어스 마켓(Buyer's Market)’에 가까웠다. 그의 세계관 속에서 국제기구와 다자간 협약은 이익을 깎아 먹는 불필요한 규제였고, 동맹은 미국의 부(富)를 축내는 '안보 무임승차자'이자 ‘호구’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는 주권이라는 이름 아래 국제적 약속들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오직 힘의 논리에 기반한 양자 간 거래에만 몰두했다. 이란 핵 합의와 파리 기후변화협약 탈퇴는 이러한 철학이 구체화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히 정책적 이견을 표명하는 수준을 넘어, 인류 공동의 과제 해결을 위해 구축된 다자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접근법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설파한 권력 정치의 논리와도 맞닿아 있다.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는 도덕률에 얽매이기보다 국가 이익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 때로는 사자의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을 겸비해야 하는 존재다. 그러나 트럼프가 보여준 것은 군주의 지략이 아닌, 3류 사기꾼의 기만술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바로 이 '거래의 달인'으로 포지셔닝하며, 동맹국들을 상대로 예측 불가능한 압박과 회유를 반복했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는 혈맹이라는 명분을 보호비 갈취와 같은 저급한 행위로 전락시켰으며, 동맹국을 향한 고율의 관세 부과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안보적 신뢰마저도 저버릴 수 있다는 노골적인 선언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조차 군주가 경계해야 할 것으로 '경멸과 미움'을 꼽았다. 예측 불가능성과 신의의 상실은 단기적으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지언정, 장기적으로는 군주 자신을 고립시키고 신뢰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게 만든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동맹국들이 느낀 것은 존경이나 경외가 아닌,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는 깊은 불안과 배신감이었다.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했지만, 그 힘은 상호 존중이 결여된 채 일방적으로 휘둘러질 때 폭력이 될 뿐, 지속 가능한 평화를 구축할 수는 없다. 결국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기는커녕, 스스로를 고립의 성채에 가두고 국제 사회의 신뢰를 잃어버리는 '자멸적인 동맹 파괴'로 귀결되었다.
2. 역사의 메아리: 고립의 길을 걸었던 군주들의 그림자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그 운율은 종종 되풀이된다. 트럼프의 통치 행태는 인류 역사의 장구한 흐름 속에서 등장했던 특정 군주들의 모습을 기시감처럼 불러일으킨다. 고립주의와 국수주의의 깃발 아래 자국의 이익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다 결국 국제적 고립과 내적 쇠퇴를 자초했던 지도자들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서늘한 경고를 던진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명·청 시대 중국의 해금(海禁)정책이다. 명나라 홍무제는 왜구의 창궐을 막고 내부 통제를 강화한다는 명분 아래 바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이는 마치 좀도둑이 무서워 거대한 시장이 열리는 날 창고 문을 걸어 잠근 어리석은 상인과도 같았다. 세계가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역동적으로 팽창하고 변화하는 동안, 중국은 스스로를 역사의 중심에서 밀어내며 장기적인 정체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외부 세계에 대한 무지와 기술 발전의 지체는 훗날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미국 우선주의'가 파리 기후협약이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같은 다자 체제에서 이탈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은, 비록 그 시대와 맥락은 다르지만,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을 외면하고 홀로 성채를 쌓으려 했다는 점에서 명·청의 고립주의와 그 궤를 같이한다.
또한, 트럼프의 리더십 스타일은 법가(法家)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진시황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한비자는 군주가 신하를 다루는 술(術)과 법(法), 그리고 세(勢)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트럼프 역시 동맹을 '비즈니스' 관계로 재정의하고, 관세와 제재라는 채찍을 휘두르며 동맹국들을 압박했다. 그의 통치 방식은 제도와 규범보다는 트위터를 통한 즉흥적이고 개인적인 '결정'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마치 부하 직원을 믿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변덕과 감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무능한 CEO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나 진나라가 가혹한 법치와 대외 팽창으로 단기간에 천하를 통일했을지언정, 그 폭압적인 통치가 민심의 이반을 불러와 불과 15년 만에 멸망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힘에만 의존하는 리더십은 공포를 자아낼 수는 있어도, 자발적인 충성과 지속적인 협력을 이끌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의 자기중심적 리더십은 '나르시시즘'이라는 심리학적 렌즈를 통해 분석될 수 있다. 끊임없이 세상의 관심과 찬사를 갈구하고, 비판을 참지 못하며, 자신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로 묘사하는 그의 언행은 마치 멈추지 않는 자기 홍보 쇼와 같다. 이러한 리더는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타인을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동맹국 정상들과의 회담에서 보여준 무례한 태도나 일방적인 요구는 이러한 성향이 외교 무대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역사는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자신의 판단만을 맹신했던 수많은 군주들이 결국 주변의 충신들을 떠나게 만들고, 현실을 오판하여 파국을 맞이했음을 증언한다. 로마의 칼리굴라나 네로 황제처럼, 절대 권력에 도취되어 숭배를 강요하고 변덕스러운 통치를 일삼았던 폭군들의 말로는, 나르시시즘적 리더십이 개인의 비극을 넘어 국가와 세계에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3. 무너진 신뢰의 파편들: 전통 우방국들의 고통과 각성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 정책이 남긴 가장 깊은 상처는 바로 전통적 우방국들과의 신뢰 관계에 생긴 균열이다. 수십 년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동의 가치를 기반으로 구축되었던 동맹 체제는 '미국 우선주의'의 거친 파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단순히 경제적 손실이나 안보적 불안을 넘어, 오랜 사업 파트너가 하루아침에 사기 쳐야 할 ‘봉’으로 취급당하는 굴욕감과 존재론적 고뇌를 동반했다.
유럽은 그 충격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한 대륙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쓸모없는 동맹'이라 폄하하며, 회원국들의 방위비 분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는 NATO의 집단방위체제를 규정한 조약 5조의 신성한 약속마저도 거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관세 폭탄에 신음했으며, 이란 핵 합의의 일방적 파기는 유럽의 외교적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한때 '미국은 더 이상 동맹이 아니라 적'이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제기될 정도로 대서양 동맹은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경험은 유럽으로 하여금 '전략적 자율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미국이라는 '세계의 경찰'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는 냉엄한 현실 인식 속에서, 유럽은 독자적인 군사력 증강과 외교 노선 구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동맹국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은 예측 불가능한 대북 정책과 끊임없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한국을 상대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철강과 자동차 등 주력 수출 품목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며 한국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마치 악덕 사채업자가 빚을 빌미로 온갖 이권을 빼앗으려는 듯, 안보를 담보로 경제적 이익을 약탈하려는 ‘약탈적 통상 압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오랜 동맹국을 단순한 이익 창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행태였으며, 동맹의 근간인 상호 존중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캐나다와 멕시코마저도 무역 전쟁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폐기하고 새로운 협정(USMCA)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가해진 고율의 관세는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북미 경제 공동체의 기반을 흔들었다. 캐나다의 한 전문가는 "트럼프는 미국이 본질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나라라는 캐나다 외교 정책의 깊은 가정을 깨뜨렸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동맹국들이 겪은 고통은 단순한 정책적 마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이 주도해 온 전후 국제 질서의 기본 전제, 즉 미국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이며 동맹의 안보를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이었다.
이 고통의 시간 속에서 동맹국들은 중요한 각성을 경험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미국의 '보호'가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제 미국과의 관계를 재조정하고, 외교 및 안보 정책의 다변화를 꾀하며, 독자적인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절박한 과제 앞에 서게 되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남긴 무너진 신뢰의 파편들은 역설적으로 동맹국들의 자립과 성찰을 촉진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4. 결론: 폐허 위에 던지는 질문, 우리는 어떤 세계를 원하는가
역사의 한 막이 내리고, 무대는 한바탕 소란을 피운 3류 장사꾼이 남기고 간 값싼 소품과 찢겨진 계약서들로 어지럽다. 도널드 트럼프의 시대가 남긴 것은 '위대한 미국'이라는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신뢰의 붕괴가 초래한 국제 질서의 깊은 균열과 전통적 동맹국들이 겪어야 했던 쓰라린 고통의 기억이다. 그의 행정부가 휘두른 '미국 우선주의'라는 칼날은 상호 연결된 세계의 복잡한 그물망을 난도질했으며, 협력과 연대라는 가치를 조롱하며 고립과 대결의 시대를 선동했다.
우리는 이 칼럼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들이 얼마나 빈곤한 철학적 기반 위에서 작동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역사의 무대에서 반복되었던 어떠한 과오들과 맞닿아 있는지를 성찰했다. 홉스의 자연 상태를 연상시키는 냉혹한 현실주의, 마키아벨리적 권모술수의 노골적인 사용, 그리고 명·청 제국의 고립주의나 진시황의 폭압적 법치에서 발견되는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통치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인류가 오랜 시간 경계해왔던 위험한 정치적 본능의 발현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동맹국들이 겪어야 했던 구체적인 고통의 연대기는 이러한 정책이 단순한 수사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운명에 실질적인 상처를 남기는 행위였음을 증언한다.
문제는 트럼프라는 한 개인이 아니다. 그의 등장은 세계화의 그늘, 깊어지는 불평등, 그리고 기존 질서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이라는 우리 시대의 복잡한 문제들이 응축되어 폭발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자양분 삼아 성장한, 시대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과거를 단죄하는 것을 넘어, 미래를 향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어떤 세계를 원하는가? 모든 국가가 자국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정글과 같은 세계인가, 아니면 이견과 갈등 속에서도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하고 협력하는 규범에 기반한 세계인가?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예측 불가능한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기술인가, 아니면 신뢰와 비전을 통해 자발적인 동의와 존경을 이끌어내는 예술인가?
트럼프 시대가 남긴 폐허 위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안고 있다. 무너진 신뢰를 재건하고, 찢겨진 연대의 그물을 다시 잇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립의 성채 안에는 결코 진정한 위대함이 깃들 수 없으며, 타자의 희생 위에 세워진 평화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세계를 향한 길을 다시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은 거짓된 위대함을 향한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존엄과 상생을 향한 진실하고도 굳건한 발걸음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