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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원의 비극

by 남킹


초코파이 하나에 투영된 우리 시대의 자화상


서장(序章): 차가운 새벽의 서곡, 혹은 모든 비극의 씨앗

2024년 1월 18일, 지상의 모든 온기가 아직 새벽의 푸른 그늘 아래 잠들어 있던 시간, 오전 4시 6분. 전북의 한 물류창고는 거대한 기계 장치의 폐(肺)처럼, 조용하지만 규칙적인 시스템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인공의 정적(靜寂) 속을 유령처럼 배회하던 한 사내가 있었다. 협력업체 소속의 보안 직원 A(41)씨. 그의 임무는 이 거대한 자본의 성채(城砦)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것이었으나, 정작 그 순간 그를 위협하고 있던 것은 외부가 아닌, 가장 원초적인 내부의 적, 즉 허기였다. 순찰의 고단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위장(胃臟)을 공허하게 만들었을 때, 그의 시선은 사무실 한구석, 문명의 오아시스처럼 놓인 냉장고에 멎었다.

그가 손을 뻗어 쥔 것은 인류의 거대한 서사(敍事)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극히 사소하고 달콤한 위안이었다. 오리온 초코파이 한 개, 그리고 롯데 커스터드 한 개. 도합 1,050원. 그것은 존재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물질이었고, 한 인간의 허기를 잠시나마 달래줄 최소한의 칼로리였다. 그 행위에는 어떠한 악의(惡意)의 전조(前兆)도, 치밀한 계획의 흔적도 없었다. 다만 한밤의 노동자가 느낀 생리적 결핍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었을 뿐,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찾고 졸린 자가 잠을 청하는 것과 같은, 자연의 섭리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그는 알지 못했다. 그 1,050원의 미미한 가치가 자신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 거대한 재앙의 진앙(震央)이 되리라는 것을. 그가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이미 현대 사회라는 거대한 파놉티콘(Panopticon)의 눈, 즉 방범카메라(CCTV)는 그의 모든 행위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디지털 데이터로 기록하고 있었으며, 그 데이터는 곧 법(法)이라는 이름의 차가운 제단 위에 희생양으로 바쳐질 운명이었다.

제1장: 법의 그물과 비정한 이성(理性)의 시대

사건의 발단은 물류회사 소장 B씨가 A씨의 '범죄' 현장을 포착한 CCTV 영상을 112에 신고하면서부터였다. B씨의 진술은 간명하고도 단호했다. “도난품의 회수와 변상을 원하지 않고, A씨에 대한 처벌을 원한다.” 이 문장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정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용서나 화해, 혹은 인간적 유대를 통한 갈등의 비공식적 해결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직 규칙의 위반과 그에 상응하는 공식적 처벌이라는, 냉정하고 비정한 절차만이 존재할 뿐이다. 1,050원의 과자 두 개가 일으킨 미미한 파문은 이제 개인 간의 사소한 마찰을 넘어, 국가의 공권력이 개입하는 형사사건으로 비화(飛化)했다.

A씨의 항변은 법의 논리 앞에서 무력했다. "평소 탁송 기사들로부터 '냉장고 간식을 먹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는 공동체적 신뢰와 암묵적 허용이라는 '정(情)'의 문화에 기반한 주장이었으나, 법정은 그러한 모호한 감성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문제의 냉장고가 탁송 기사들의 대기 공간이 아닌, 직원의 '사무 공간'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공간의 구획(區劃), 출입의 권한, 물품의 소유권. 근대적 합리성이 구축한 이 명징한 경계선들 앞에서, 배고픈 노동자의 소박한 기대는 '불법적인 점유의사', 즉 '불법영득의사(不法領得意思)'라는 법률 용어로 차갑게 재단(裁斷)되었다.

이는 마치 칸트(Immanuel Kant)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 현실 세계에서 가장 왜곡된 형태로 발현된 모습과도 같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이 숭고한 도덕률은, '어떠한 경우에도 타인의 재물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원칙으로 환원되어 A씨에게 적용되었다. 그 행위의 동기, 결과의 경미함,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될 한 개인의 파멸적 상황 등은 모두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오직 규칙은 규칙이기에 지켜져야 한다는 형식주의적 논리만이 지배할 뿐이다. 이러한 기계적 법 적용의 이면에는, 인간을 구체적 삶의 맥락 속에 존재하는 인격체가 아닌, 추상적 법 조항의 적용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근대 법치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제2장: 800원, 그리고 장발장의 빵 한 조각에 대한 변주곡

A씨의 사건은 우리에게 기시감(旣視感)을 불러일으킨다. 오석준 대법관이 과거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시절 내렸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정당' 판결이 그것이다. 7년간 근속한 버스기사가 운송수익금 800원을 누락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사건에서, 재판부는 "승객들이 내는 요금 외에 별다른 수익금이 없으므로, 기사가 수익금을 전액 납부하리라는 신뢰가 기본이 된다"며 해고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800원이라는 금액의 다과(多寡)를 떠나, 신뢰라는 조직의 근간을 훼손한 행위 자체를 중대한 비위로 판단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사소한 금액의 절도 혹은 횡령에 대한 단호한 처벌이라는 점에서 유사해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더 깊은 사회적, 철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비례의 원칙(Principle of Proportionality)'과 '최소침해의 원칙'이 무너진 사회의 비극이다. 법의 목적이 단순히 규칙 위반자를 응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다면, 그 법의 적용은 위반 행위의 중대성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해악에 비례해야만 한다. 1,050원의 과자를 먹은 행위로 인해 한 개인이 실직의 위기에 내몰리고 1,000만 원이 넘는 변호사비를 지출해야 하는 상황, 800원의 실수로 인해 한 노동자가 7년의 경력을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생계수단을 박탈당하는 상황은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또 다른 한 명의 '절도범'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의 주인공 장발장(Jean Valjean)이다.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징역형을 살았던 그의 이야기는, 맹목적인 법 집행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더 큰 사회적 비극을 낳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19세기 프랑스의 장발장과 21세기 대한민국의 A씨 사이에는 200년의 간극이 있지만, 사소한 생계형 범죄에 대해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가혹하고 비인간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들은 시대를 초월한 쌍생아(雙生兒)와 같다.

물론,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자는 주장이 아니다. 절도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 그러나 법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법의 여신 디케(Dike)가 눈을 가린 것은 법 적용의 공정성을 상징하기 위함이지, 구체적 현실과 인간의 고통에 눈을 감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검찰이 동종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기계적으로 기소를 결정하고, 법원이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벌금 5만 원이라는, 사실상 그 행위의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듯한 모순적인 판결을 내리는 이 일련의 과정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떠올리게 한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개인들이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파괴적 결과에 대해 성찰하지 않을 때, 악은 특별한 괴물이 아닌 평범한 관료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제3장: 감시 자본주의와 '정(情)'의 소멸

이 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방범카메라(CCTV)'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에서 묘파(描破)했듯이, 현대 사회는 규율 권력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감시를 통해 개인을 통제하는 '감시 사회'의 특징을 띤다. 과거에는 교도소나 군대 같은 특수한 공간에 한정되었던 감시의 시선이, 이제는 CCTV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우리의 일상 모든 곳을 빈틈없이 파고든다. 물류창고의 CCTV는 더 이상 단순한 방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직원들의 모든 행위를 감시하고 평가하며, 잠재적 일탈을 통제하는 규율의 눈이다.

이러한 전방위적 감시 시스템은 우리 사회의 전통적 가치였던 '정(情)'과 '신뢰'의 문화를 잠식한다. '정'이란 합리적으로 계산되거나 언어로 명확히 규정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하고 정서적인 유대감을 의미한다. 과거의 공동체에서는 "배고프면 이것 좀 먹어라"라는 말이 자연스러웠고, 사무실 냉장고의 간식은 굳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암묵적인 공유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소유권과 규칙으로 엄격하게 규정되고, 모든 행위가 감시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이러한 '정'의 문화는 설 자리를 잃는다.

초코파이는 더 이상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회사의 자산 목록에 등재된 '비품'이 된다. 동료에 대한 신뢰는 CCTV 기록이라는 객관적 데이터로 대체된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특정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파트 이웃 간에도 층간소음 문제로 살인이 벌어지고, 식당에서는 '노쇼' 손님에 대한 법적 대응이 일상화되며, 모든 관계가 계약과 증거에 기반하여 재구성되고 있다. 우리는 효율성과 투명성,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관계의 온기를 스스로 제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법과 시스템의 잣대로만 재단하려는 경향은, 결국 우리 사회를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아주 사소한 잘못도 용납되지 않는, 삭막하고 각박한 사막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항소심 재판장이 내뱉은 "각박하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탄식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에 대한 사법부의 양심적 고백이자 통렬한 자기반성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종장(終章):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1,050원의 초코파이와 커스터드. 이 사소한 음식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모든 것이 디지털로 기록되고, 모든 규칙이 한 치의 예외 없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며, 인간적 정서나 연민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완벽한 시스템의 사회인가? 아니면 때로는 비효율적이고 모호하더라도, 서로의 실수를 너그럽게 감싸주고 배고픈 자에게 기꺼이 빵 한 조각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공동체인가?

A씨의 변호사가 "진짜 과자를 훔치려고 했다면 (과자 상자를) 통째로 들고 가지 초코파이 한 개, 커스터드 한 개 이렇게 갖고 가겠느냐"고 항변했듯이, 그의 행위에는 절도라는 법률적 구성요건을 충족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반사회성'이나 '범죄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검찰 출신 변호사가 "기소유예로 종결하면 됐을 사안"이라고 비판했듯, 이 사건은 우리 사법 시스템이 가진 재량권과 유연성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A씨일지도 모른다. 무심코 저지른 아주 작은 실수, 혹은 사회적 통념에 기댄 사소한 행동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법의 심판대에 올라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상황.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한 21세기 감시 자본주의 사회의 맨얼굴이다.

차가운 새벽, 물류창고의 적막을 깨고 들려왔던 것은 과자 봉지를 뜯는 미세한 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은 그 소리가 아니라, 한 노동자의 뱃속에서 울렸을 공복(空腹)의 소리이며, 1,050원의 과자 때문에 직장을 잃고 전과자가 될 위기에 처한 한 인간의 절망적인 비명이다. 이 비명에 응답하지 못하는 사회, 초코파이 하나를 너그럽게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법전(法典)의 가장 깊숙한 곳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 가장 따뜻한 곳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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