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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UN 연설 해부

by 남킹

트럼프 UN 연설 해부: 한 나르시시스트가 세계를 해체하는 방식

뉴욕 맨해튼 이스트 강변, 인류의 집단적 이성을 상징하듯 서 있는 차가운 유리와 강철의 성채. 제80차 유엔 총회의 연단은 본디 문명의 합의를 직조하고, 파편화된 세계를 언어의 실로 꿰매는 신성한 제의의 공간이어야 했다. 그러나 2025년 9월 23일, 그곳은 한 개인의 비대해진 자아(Ego)가 토해내는 독백으로 오염된 독무대(毒霧臺)로 전락했다. 도널드 트럼프, 네 번의 계절을 건너 부활한 과거의 망령이자 미래의 흉조인 그는, 역사의 중력을 거스르려는 듯 56분간 세계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의 연설은 정치적 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의 시체 위에서 벌이는 한 편의 부조리극이었고, 니체의 '영원 회귀'가 저주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현상학적 사례였으며, 플라톤의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가장 저속하고 기만적인 그림자놀이였다. 이 글은 그 그림자를 해부하고, 그 공허의 근원을 탐색하며, 그가 세운 모래성의 지반을 심리학, 철학, 역사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의 메스로 절개하려는 시도이다.

제1장. 심리학적 단층: 나르시스의 검은 연못과 투사의 메커니즘

트럼프의 연설은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원초적 아우성이자, 융의 집단 무의식 가장 어두운 심연에 잠재된 '그림자(Shadow)'의 노골적인 현현이었다. 그의 언어는 자아와 현실 원칙 사이의 중재를 포기한 이드(Id)의 포효 그 자체다. "내가 7개의 전쟁을 끝냈다"는 그의 선언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능감(Omnipotence)을 숭배하라는 신탁에 가깝다. 이는 유아기적 나르시시즘의 전형적 발현으로, 세계를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확인하는 거울로만 인식하는 '대상 없는 사랑(Objectless Love)'의 상태이다. 그는 유엔이라는 '상징적 타자(Symbolic Other)'—질서, 합의, 초자아(Superego)의 화신—를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와 텔레프롬프터"로 격하함으로써, 자신의 원초적 욕망을 제어하려는 모든 외부 권위를 거세하고 조롱한다.

그의 정신세계는 선과 악, 승리와 패배, 우리와 그들이라는 마니교적 이원론(Manichaean Dualism)으로 확고하게 양분되어 있다. 여기서 복잡성은 곧 위협이며, 모호함은 제거되어야 할 적이다. "기후 변화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는 단언은 과학적 데이터를 반박하는 논리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산업화 시대적 세계관, 즉 연기 뿜는 굴뚝과 석유 시추공으로 상징되는 남성적 힘에 대한 향수를 위협하는 모든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의 필사적인 방어기제다. 그는 지구의 열병을 진단하는 과학자들을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음모가로 치환함으로써, 복잡한 현실을 이해해야 하는 지적 고통에서 벗어나 '음모론적 안락함'으로 도피한다.

또한, 그의 연설은 '투사(Projection)'라는 방어기제의 교과서적 사례다. 그는 "통제되지 않는 이민 위기"가 유럽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외친다. 여기서 이민자는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지지자 집단 내부에 존재하는 불안, 경제적 박탈감, 문화적 상실감을 투영하는 완벽한 스크린이다. 내부의 혼돈과 분열의 책임을 외부의 '희생양(Scapegoat)'에게 전가함으로써, 그는 내부 결속을 다지고 자신의 구원자적 서사를 강화한다. '국경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그의 구호는 물리적 경계선에 대한 주장이기 이전에, 자아와 타자, 순수와 오염을 가르려는 심리적 강박의 표현이다. 그는 견고한 벽을 세움으로써, 유동하고 혼합되는 현대 세계의 존재론적 불안으로부터 자신의 유약한 자아를 보호하려 한다.

제2장. 철학적 해체: 시뮬라크르의 통치와 소피스트의 귀환

트럼프의 유엔 연단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예견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시대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무대였다. 그의 연설에서 '진실'은 더 이상 원본(Original)과의 상응 관계를 통해 그 가치를 보증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기호(Sign)가 기호를 끝없이 지시하고 복제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현실을 대체하고 창조한다. "미국의 황금기"라는 그의 선언은 실제 경제 지표나 사회적 현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 선언 자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정서적 파장에 의해 그 진실성을 획득하는 '파생실재'이다. 그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대체할 기호를 생산하고 유통시킨다.

이러한 '포스트 트루스(Post-truth)'의 정치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들의 망령을 21세기에 소환한다.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 보편적 진리(Logos)에 도달하고자 했다면, 트럼프와 같은 현대의 소피스트들은 오직 승리를 위한 수사학(Rhetoric)에만 몰두한다. 그의 언어는 논증이 아니라 정동(Affect)을 조직하고, 이성이 아니라 감정을 격발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탄소 발자국은 사기'라는 주장은 반증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독단적 선언이며, 이는 칼 포퍼(Karl Popper)가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한 기준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그의 세계에서 언어는 세계를 비추는 등불이 아니라, 상대를 가격하는 곤봉이다.

더 나아가 그의 통치 철학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대한 저열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그는 국제사회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상태로 규정하고, 오직 개별 국가의 이기적 힘만이 유일한 생존 법칙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홉스가 절대주권의 필요성을 자연 상태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계약의 산물로 논증했다면, 트럼프는 그 공포 자체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그의 '미국 우선주의'는 고립주의라는 낡은 유령을 불러내는 것을 넘어, 국제 관계를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으로만 인식하는 근시안적 세계관의 발로다. 이는 상호의존성이 심화된 현대 세계의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태만이며, 결국 자신의 제국마저 고립된 섬으로 추락시킬 자멸적 행위다.

제3장. 역사의 법정: 반복되는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트럼프의 연설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자가 어떻게 역사의 희극적 반복으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주는 슬픈 사례다. 헤겔이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을 때,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20세기 초 파시즘과 제국주의가 초래했던 비극의 그림자를 어설프게 흉내 내는 한 편의 희극과 같다. 그는 베스트팔렌 조약(Treaty of Westphalia)이 확립한 주권 국가의 원칙을 앵무새처럼 되뇌지만, 그 조약이 30년 전쟁이라는 처절한 종교 전쟁의 폐허 위에서 상호 인정과 공존을 모색하기 위한 처절한 산물이었음을 망각한다. 그는 주권의 '권리'만을 주장할 뿐, 그에 수반되는 국제적 '책임'은 거부한다.

그가 찬양하는 화석 연료 기반의 경제는 산업혁명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시대착오적 몸부림이다. 이는 마치 내연기관의 시대에 마차의 영광을 부르짖는 것과 같다. 그는 변화의 물결 앞에서 과거의 영광이라는 댐을 쌓으려 하지만, 역사의 강물은 언제나 가장 낡고 완고한 댐부터 무너뜨려왔다. 그의 연설은 로마 제국 말기,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분열 속에서 검투사 경기에 열광하며 현실을 외면했던 로마 시민들을 위한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의 현대적 버전이다. 그는 경제적 번영이라는 '빵'의 환상을 약속하고, 이민자와 글로벌리스트라는 '적'과의 싸움이라는 '서커스'를 제공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동원한다.

그의 연설은 또한 신화적 원형의 비틀린 재현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를 낡은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으로 묘사하지만, 실상 그는 시시포스(Sisyphus)의 운명을 살고 있다. 그는 '위대한 미국'이라는 바위를 정상으로 밀어 올린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언행은 그 바위를 끊임없이 아래로 굴러떨어지게 만든다. 그의 56분간의 연설은 결국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고, 오직 기존의 질서를 조롱하고 해체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저주, 그 자체다.

제4장. 정치경제학적 파산: 신중상주의의 환상과 분배의 실패

트럼프의 경제 비전은 17세기 유럽의 중상주의(Mercantilism)를 21세기에 어설프게 이식한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국제 무역을 국가 간의 부를 빼앗는 전쟁으로 인식하며, 보호무역과 관세 장벽을 통해 국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낡은 환상에 집착한다. 이는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비교우위론 이래 현대 경제학이 쌓아 올린 상호 이익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극복'과 '가격 하락'은 글로벌 공급망의 복잡한 메커니즘과 외부효과(Externality)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결과다. 기후 변화라는 인류 공동의 위협이 초래할 미래의 천문학적 비용을 현재의 회계장부에서 삭제함으로써 얻어지는 일시적 이익을 '성공'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지적으로 부정직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자산을 약탈하는 세대 간 착취에 해당한다.

그의 정치는 칼 슈미트(Carl Schmitt)가 정의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본질, 즉 '친구와 적의 구분'에 극단적으로 의존한다. 그의 연설에서 '우리 미국인'이라는 친구 집단은 '불법 이민자', '글로벌리스트', '기후 사기꾼'이라는 적을 상정함으로써만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적대적 정치는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고 증폭시켜야만 유지되는 기생적 시스템이다. 그는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 본연의 역할을 포기하고, 갈등 자체를 에너지원으로 삼는 '갈등 상인(Conflict Entrepreneur)'으로 기능한다.

결국 그의 경제 정책은 부의 총량을 늘리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기존의 부를 특정 집단(화석 연료 산업, 보호무역의 수혜를 입는 일부 제조업 등)에게 이전시키는 '지대 추구 행위(Rent-seeking)'에 가깝다. 그는 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통해 파이를 키우기보다는, 정치권력을 이용해 파이의 분배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데 골몰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국가 경제의 활력을 저해하고, 승자독식 구조를 심화시켜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필연적 귀결로 이어진다.

결론: 언어의 폐허 위에 선 야만

트럼프의 56분간의 연설은 한 개인의 기이한 발언을 넘어,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심각한 지적, 도덕적 질병의 징후다. 그의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고 소통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왜곡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무기였다. 그 연설에는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 올린 인문학적 성찰의 깊이도, 과학적 이성의 냉철함도, 철학적 사유의 겸허함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공허한 외침과, 세계를 자신의 욕망 아래 무릎 꿇리려는 유아적 오만만이 가득했다.

유엔 총회장의 침묵은 경의가 아니라 경악이었고, 동의가 아니라 냉소였다. 세계의 지도자들은 한때 세계를 이끌었던 제국의 지도자가 아니라,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기를 거부하는 늙은 배우의 서툰 독백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의 연설은 강력한 제국의 위엄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 제국의 심장이 얼마나 텅 비어버렸는지를 증명하는 부고장과 같았다.

결국, 그의 연설이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화려하고 거대해 보였지만 한 걸음 다가서자 이내 사라져 버리는 환상에 불과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지식과 철학을 조롱했지만, 역설적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과 철학은 그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천박하고 위험한지를 명징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는 거짓으로 진실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의 거짓은 역사의 거대한 진실 앞에서 한낱 먼지처럼 흩어질 운명이다. 그가 떠난 연단 위에는 깊은 정적만이 남았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비통한 묵념이자, 야만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이성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인류의 무거운 책무를 확인하는 침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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