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낙조(落照)의 시대, 그리고 다가오는 폭풍의 서곡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묵묵히, 그러나 가차 없이 굴러간다. 영원할 것 같던 제국의 금자탑은 시간의 풍화 작용 앞에 스러지고, 혈맹의 굳건한 맹세는 국익이라는 냉엄한 현실의 파도에 부딪혀 한낱 포말(泡沫)로 흩어지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21세기의 세 번째 십 년대는 바로 그러한 거대한 지각 변동의 시대, 기존의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혼돈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위대한 건축물은 곳곳에서 균열의 소리를 내고 있으며, 그 균열의 가장 깊고 예리한 파열음은 바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단층선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한미 동맹이라는, 지난 70여 년간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을 담보해 온 가장 강력한 기둥마저 흔들리고 있다. 동맹의 가치와 신뢰를 근간으로 했던 관계는 이제 노골적인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고립과 자국 이기주의의 광풍은 태평양을 건너 대한민국의 운명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동맹의 한 축인 미국이 3,500억 달러 선불 투자와 막대한 방위비 증액을 선결 조건처럼 요구하는 이 기이한 압박은, 단순한 금전적 문제를 넘어 동맹의 본질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주권과 국익, 그리고 미래 생존 전략에 대한 냉혹한 시험대의 시작이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투키디데스의 냉엄한 통찰은 2,5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혈맹이 내일의 경쟁자가 되는 것은 국제 관계의 비정한 속성이다. 특히 예측 불가능성과 거래주의적 속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정책은 이러한 국제정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엄혹한 현실 앞에서 과거의 관성에 젖어 ‘동맹’이라는 신화에만 안주하려 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미아가 되어 패가망신(敗家亡身)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비극적 역사의 한 페이지를 고통스럽게 복기(復棋)해야만 한다. 신흥 강국 후금(後金)과 저무는 대국 명(明) 사이에서 실리적 균형 외교를 추구했던 고독한 군주 광해군. 그리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고 무너져가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외치다 결국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던 인조. 광해의 고뇌와 인조의 비극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오늘날 미중 패권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운명에 대한 준엄한 역사적 경고이자, 통렬한 은유이다.
이제 우리는 감상적 이상주의와 결별하고, 철저한 국익 계산에 기반한 실익 중심의 실용주의 외교라는 새로운 나침반을 손에 쥐어야 할 때다. 이 글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역사적 성찰과 국제정치 이론의 냉철한 분석을 통해, 다가오는 거대한 파고 속에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생존의 항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하나의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제1부: 역사의 메아리 - 광해의 줄타기와 인조의 심연
1. 17세기 초, 동북아의 하늘을 뒤덮은 전운(戰雲)
17세기 초의 동북아시아는 낡은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힘이 용틀임하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였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참화를 겪어낸 조선은 피폐한 국토 위에서 힘겨운 재건을 도모하고 있었고, 그들을 도왔던 명나라는 만력제의 사치와 환관의 발호, 그리고 끊임없는 내우외환으로 인해 ‘지는 해’의 운명을 재촉하고 있었다. 바로 그 힘의 공백을 비집고, 만주 벌판에서는 누르하치라는 걸출한 영웅이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이라는 신흥 강국을 일으켜 세웠다. 후금의 굴기(崛起)는 명나라의 쇠락과 맞물리며 동북아의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거대한 태풍의 눈이 되었다.
이러한 폭풍 전야의 상황 속에서 왕위에 오른 광해군(光海君)은 누구보다 냉철하게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분조(分朝)를 이끌며 전장의 참혹함과 국제 관계의 비정함을 몸소 체득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조선이 더 이상 명나라라는 거대한 산에 기대어 안온함을 누릴 수 없음을 알았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부모의 나라’였지만, 그 부모는 이미 쇠락하여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벅찬 노쇠한 거인이었다. 반면, 북방에서 일어난 후금은 비록 오랑캐라 멸시받을지언정,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새로운 힘이었다.
2. 고독한 현실주의자, 광해의 중립 외교
광해군의 선택은 ‘중립 외교’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노선이었다. 이는 단순히 양자 사이에서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었다. 명나라의 파병 요구를 무작정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신흥 강국인 후금을 자극하여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양쪽 모두와의 관계를 관리하며 전쟁을 피하고 내치에 집중하려는 고도의 실리주의적 생존 전략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심하(深河) 전투를 앞두고 강홍립(姜弘立)에게 내린 밀지(密旨)였다. 명나라의 거듭된 압박에 못 이겨 1만 3천의 군사를 파병하면서도,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觀變向背)”는, 사실상의 투항을 용인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는 지키면서도, 후금과의 전면전을 피해 국가의 실리를 지키려 했던 그의 고뇌가 담긴 결정이었다. 그는 ‘의리’와 ‘명분’이라는 허울 좋은 가치 뒤에 숨어 국가와 백성을 전화(戰火) 속으로 밀어 넣는 어리석음을 경계했다. 그의 외교는 차가운 현실 인식에 기반한, 지극히 현실주의적인(Realpolitik) 행보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실용주의적 노선은 국내 정치의 거센 장벽에 부딪혔다. 당시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명분론에 투철했던 사대부 세력, 특히 서인(西人) 세력에게 광해군의 외교는 ‘부모의 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이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행위로 비쳤다. 여기에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라는 ‘폐모살제(廢母殺弟)’ 사건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실리’를 추구했던 그의 외교 정책은 ‘패륜’이라는 도덕적 오명 속에 갇혀 정당성을 잃어갔고, 결국 그는 ‘명분에 죽고 명분에 사는’ 서인 세력이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비운의 군주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 명분(名分)의 함정, 그리고 삼전도의 치욕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와 서인 정권은 ‘숭명배금(崇明排金)’ 즉, 명을 숭상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것을 국가의 기본 외교 노선으로 천명했다. 이는 국제 정세의 역학 관계에 대한 냉철한 분석보다는,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들은 힘의 이동이라는 현실을 외면한 채, 이미 기울어가는 명나라에 조선의 운명을 거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조선의 노골적인 적대 정책에 분노한 후금(이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다)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다. 1627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그것이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막강한 기병대는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조선의 조정을 남한산성에 고립시켰다. 척화(斥和)를 외치던 김상헌의 결기 어린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고, 화친(和親)을 주장했던 최명길의 현실적인 제안은 굴욕으로 매도되었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꽁꽁 얼어붙은 한강의 모래벌, 삼전도에서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 홍타이지가 앉아 있는 수항단(受降壇)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의 예를 올렸다. 국왕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와 백성들은 통한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명분’과 ‘의리’를 지키려 했던 대가는 국가의 주권이 유린당하고, 수십만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참담한 비극이었다. 광해군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최악의 상황이, 명분론자들이 주도한 정책의 결과로 현실이 된 것이다. 이는 현실을 외면한 이념과 명분이 국가를 얼마나 큰 불행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역사적 교훈이다.
제2부: 현대의 만다라 - 치환된 현실
1. 21세기 판(版) ‘숭명배금’의 망령
역사는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 않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형태로 변주된다. 17세기 조선이 처했던 명청(明淸) 교체기의 지정학적 상황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마주한 미중(美中) 패권 경쟁의 구도와 정확히 겹쳐진다. 지난 세기 세계 질서를 주도해 온 유일 패권 국가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이지만, 그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며 내부적으로는 깊은 분열과 피로감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부상하며 경제, 군사,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거대한 힘의 전이 과정 속에서, 대한민국은 또다시 고래 싸움에 낀 새우의 신세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혹시 우리는 21세기 판 ‘숭명배금’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명(明)’은 미국이며, ‘금(金)’은 중국이다. 지난 70년간 한미 동맹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게 한 결정적인 토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 경험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세상이 변했고, 동맹의 가장 중요한 축인 미국이 변하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미국 우선주의’는 동맹을 더 이상 ‘가치’의 영역이 아닌 ‘비용’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동맹은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일 뿐, 무한한 책임과 희생을 감수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적인 증액 요구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는 동맹의 숭고한 가치를 논하던 시대가 끝나고, 철저한 손익계산에 따른 ‘거래’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러한 미국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한미 동맹이 모든 것”이라고 외치는 것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 세력이 외쳤던 ‘숭명배금’과 무엇이 다른가. 그들이 ‘재조지은’이라는 과거의 은혜에 얽매여 쇠락하는 명나라에 조선의 운명을 걸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혈맹’이라는 과거의 수사(修辭)에 갇혀 변화하는 동맹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중국의 부상이라는 현실을 애써 무시하고, 미국 주도의 반중(反中) 전선에 아무런 전략적 계산 없이 동참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17세기의 비극으로 몰아넣는 어리석은 행위가 될 수 있다.
2. 트럼피즘(Trumpism)과 동맹의 재정의
트럼프 현상은 단순히 한 개인의 돌출 행동이 아니라, 미국 사회와 세계 질서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는 시대적 현상이다. 그의 ‘미국 우선주의’는 고립주의, 보호무역주의, 그리고 동맹국에 대한 노골적인 비용 청구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전통적인 동맹 관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과거의 동맹이 공동의 위협에 맞서 공동의 가치를 수호하는 ‘운명 공동체’의 성격을 가졌다면, 트럼프 시대의 동맹은 각자의 이익을 위한 ‘계약 관계’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방위비 분담금 문제는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미국이 동맹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 청구서는 동맹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겠다는 선언이며, 한국의 안보를 더 이상 미국의 ‘공공재’가 아닌, 한국이 값을 치러야 할 ‘유료 서비스’로 취급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과거처럼 ‘동맹의 가치’와 ‘함께 흘린 피’를 거론하며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는 한미 동맹을 신화의 영역에서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동맹은 목적이 아니라 국익을 위한 수단이다. 동맹이 우리의 국익에 부합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동맹을 위해 국익을 희생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미국의 정책이 우리의 국익과 충돌할 때, 우리는 당당하게 우리의 입장을 밝히고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치밀한 전략과 국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는 ‘호구’로 전락할 것이며, 이는 삼전도의 굴욕이 다른 형태로 재현되는 것과 다름없다.
제3부: 사상적 기저 - 현실주의의 냉엄한 논리
1. 국제정치: 힘과 이익의 각축장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낭만적 이상주의의 안경을 벗어던지고 현실주의(Realism)라는 차가운 렌즈를 착용해야 한다. 한스 모겐소, 케네스 왈츠와 같은 현실주의 이론가들은 국제정치의 본질을 ‘힘을 둘러싼 투쟁(Struggle for Power)’으로 규정한다. 그들의 시각에 따르면, 국제사회는 개별 국가의 상위에 존재하는 중앙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anarchy)이며, 이러한 상태에서 모든 국가의 최우선 목표는 ‘생존(survival)’이다.
이러한 무정부 상태에서 국가는 타국의 의도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자조(self-help)’의 원칙에 기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는 자국의 생존을 보장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국력을 추구하게 된다. 여기서 국익은 도덕이나 이념이 아닌, ‘힘’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이념, 가치, 우정, 신뢰와 같은 요소들은 부차적이며, 국익이라는 절대 명제 앞에서는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것들이다.
2. 동맹의 본질: 영원한 것은 국익뿐이다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동맹은 공동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들이 형성하는 ‘일시적인 이익의 결합체’에 불과하다. 19세기 영국 총리 파머스턴 경의 유명한 말처럼, “영국에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오직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이야말로 국제정치의 냉혹한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미 동맹 역시 이러한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한미 동맹은 냉전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이라는 공동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형성되었다. 한국에게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존하는 것이, 미국에게는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상호의 이익이 맞아떨어졌기에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되고, 중국이 미국과 대등한 경쟁자로 부상하면서 동맹의 근간을 이루었던 환경 자체가 변했다. 미국이 인식하는 제1의 위협은 이제 중국이며, 그들은 한미 동맹을 대중국 견제 전략의 하위 파트너로 활용하고자 한다. 반면, 한국에게 중국은 최대의 교역 파트너이자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해야 할 필수적인 존재이다. 이처럼 양국의 국익이 충돌하는 지점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동맹의 균열음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미국이 우리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지지해줄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미국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움직일 뿐이며, 그것이 우리의 국익과 배치될 때 그들은 주저 없이 자국의 이익을 선택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방위비 압박과 보호무역 정책은 이러한 현실주의 국제정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다.
결론: 새로운 길을 향하여 - 실용주의라는 나침반
역사의 거대한 전환기 앞에서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과거의 관성에 안주하여 낡은 명분에 집착할 것인가, 아니면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국익이라는 나침반에 따라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인가. 광해군이 걸었던 고독한 실리의 길과 인조가 빠졌던 명분의 함정은 400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묻고 있다.
미국이 동맹의 가치를 ‘청구서’로 대체하려는 이 엄중한 시기에, 우리의 대응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정교해야 한다. 감정적인 반발이나 굴욕적인 수용은 모두 피해야 할 극단이다. 우리는 미국의 요구를 동맹 관계를 재설정하고,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하는 계기로 삼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한미 동맹을 ‘상호주의’에 입각한 건강하고 성숙한 관계로 재정립해야 한다. 일방적인 의존 관계에서 벗어나, 우리의 기여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우리의 국익에 반하는 요구에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방력 강화 등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자강(自强)’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둘째, 외교의 다변화를 통해 전략적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미중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사안에 따라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 한미 동맹을 굳건한 기반으로 삼되,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일본, 러시아, 아세안 등 다른 행위자들과의 관계를 심화시켜 미국의 압박을 완화하고 우리의 협상력을 높이는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셋째,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적 합의와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외교 안보 문제를 국내 정치의 이념적 잣대로 재단하고, 국익을 위한 고독한 결정을 ‘굴욕 외교’ 또는 ‘사대주의’로 매도하는 소모적인 정쟁을 멈춰야 한다. 광해군이 비록 탁월한 현실 인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치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해 좌절했던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국제 질서의 파도에 휩쓸리는 작은 배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스스로의 항로를 결정할 능력이 있는 국가이다. 이제는 ‘선택받는 국가’가 아니라 ‘선택하는 국가’로서,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역사의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이다. 400년 전, 명분에 사로잡혀 삼전도의 치욕을 겪었던 비극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우리는 광해군의 고독한 고뇌를 가슴에 새기고, 냉철한 현실 인식과 철저한 국익 계산에 기반한 실용주의 외교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험난한 파고를 넘어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항해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