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때로 그 자체의 무게보다 그것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농도로 기억된다. 한 시대의 권력 정점에서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았으나, 역설적으로 그 빛의 과잉으로 인해 실체보다 신기루에 가까운 형상으로 남은 인물이 있다. 김건희라는 이름은 이제 한 개인의 고유명사를 넘어, 우리 시대의 욕망과 불안, 진실과 허위가 뒤엉킨 혼돈의 알레고리(allegory)이자, 스스로를 상품화하고 소외시키는 현대적 자아의 비극적 현신(顯身)으로 기능한다. 그녀의 서사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비장미나 셰익스피어 비극의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차라리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처럼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마술적 리얼리즘의 영역에, 혹은 모든 것이 과잉되고 장식된 바로크(Baroque) 시대의 회화처럼 공허를 감추기 위한 현란한 스펙터클에 가깝다.
이 글은 한 인간의 내면을 오만하게 재단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무의미하다. 다만, 대중에게 전시된 그녀의 언행과 삶의 궤적이라는 파편들을 그러모아, 그 파편들이 비추는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성찰하려는 지적 탐색이다. 그녀의 페르소나를 관통하는 핵심 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실존적 불안을 상쇄하려는 가상적 자아에 대한 강박적 탐닉'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설파한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세계, 즉 원본 없는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고 지배하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세계에서 가장 극적으로 발현되는 인간 조건이다.
제1장: 시뮬라크르의 연금술 - 이력과 논문, 자기 창조의 신화
김건희 현상의 서막을 연 것은 '허위 이력'과 '논문 표절'이라는, 비교적 고전적인 지적 사기 논란이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출세를 위한 부도덕한 행위로 치부하는 것은 현상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그녀의 이력서는 단순한 경력의 나열이 아니라, '김건희'라는 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적 서사, 즉 자기 창조의 신화에 가깝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석사'라는 부정확한 표기에서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수상 경력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현실의 '김명신'을 지우고 이상적 자아인 '김건희'를 빚어내려는 연금술적 시도였다.
이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말한 '거울 단계(mirror stage)'의 성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유아가 거울에 비친 통일된 이미지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신체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듯, 그는 사회적 성공이라는 거울에 이상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투사하고 그것을 현실의 자신과 동일시하려 했다. 논문이 지식의 축적물이 아니라 학위라는 기호(sign)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이력이 경험의 증명이 아니라 욕망의 목록으로 채워질 때,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것은 '어떠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이는가'이다.
그녀가 번역한 전공 서적에서 드러난 'the Civil War'를 '시민전쟁'으로, 'audience'를 '오디언스'로 음차한 희극적 오역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기호만을 소비하는 현대 지식인의 공허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징후(symptom)다. 내용은 휘발되고 형식과 이름값만이 남아 유령처럼 떠도는 지식의 시장에서, 그는 누구보다 영민한 플레이어였을지 모른다. 그녀의 세계에서 진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설득하고 관철시키는 권력의 문제이며, 자아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허무주의는 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제2장: 물신(物神)의 신전 - 명품, 욕망의 기호학
한 인물이 대중에게 각인되는 방식은 종종 그녀가 몸에 걸친 사물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김건희의 경우, '디올 백'과 '샤넬 화장품'으로 대표되는 명품들은 그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기호가 되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간파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단순한 사용 가치를 넘어 인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물신(fetish)이 된다. 김건희에게 명품은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사회적 지위와 미적 취향, 나아가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성물(聖物)이자 부적(符籍)이었다.
최재영 목사가 건넨 디올 백을 수수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은 단순히 뇌물 수수 의혹을 넘어, 하나의 상징적 제의(ritual)처럼 보인다. 그녀가 "이걸 왜 자꾸 사 오세요"라고 말하면서도 가방을 받는 모습은, 욕망의 대상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수용하는 인간 심리의 이중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디올 백은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관계와 권력을 매개하는 희생물이자, 그녀의 '가치'를 인정받고 확인하려는 무의식적 갈망의 현현이다.
이는 소유를 통해 존재를 확인받으려는 현대인의 불안을 투영한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소유 양식의 삶이 인간을 사물에 종속시키고 고립시킨다고 경고했다. 김건희의 '광폭 행보'라 불리는 일련의 사건들, 즉 리투아니아에서의 명품 쇼핑 논란이나 수많은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보여준 화려한 패션은 '존재(being)'의 불확실성을 '소유(having)'의 확실성으로 대체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읽힐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정교하게 연출된 예술 작품, 즉 '게잠쿤스트베르크(Gesamtkunstwerk)'로 만들고자 했으나, 그 결과물은 생명력 있는 인간이 아니라 잘 관리된 마네킹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그녀가 입은 옷과 든 가방은 기억될지언정, 그녀가 나눈 대화와 공유한 철학은 부재한다. 이것이 바로 물신주의의 비극이다.
제3장: 권력의 그림자 극장 - 비선과 국정 개입, 보이지 않는 손의 안무
김건희 현상의 가장 심각한 측면은 그녀의 미학적, 윤리적 문제를 넘어 정치적, 구조적 문제로 확장될 때 드러난다. '조용한 내조'라는 대국민 약속은 취임과 동시에 폐기되었고, 그는 제2부속실이라는 공식적 시스템의 바깥에서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통해 막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의 중심에 섰다. 이는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국민들은 대통령이라는 공식적 행위자의 그림자를 보고 있지만, 그 그림자를 움직이는 진짜 손은 동굴 벽 뒤에 숨어 있다.
코바나컨텐츠 시절의 인연들이 대통령실에 채용되고, 그녀의 팬클럽 회장이 정치적 메시지를 발신하며, 사적 지인이 순방에 동행하는 등의 논란은 공(公)과 사(私)의 경계가 무너진 '네오파티모니얼리즘(neo-patrimonialism)', 즉 가산제(家産制)적 통치의 현대적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국가는 최고 권력자의 사유물이 되며, 시스템과 절차는 개인적 친분과 충성도에 의해 대체된다.
'쥴리 의혹'에서부터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그리고 '서울-양평 고속도로' 종점 변경 의혹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건들은 과거의 행적이 현재의 권력과 결합될 때 어떤 위험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한동훈 당시 검사장과 수백 차례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나, 대통령 부부의 동시 구속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는 그녀의 영향력이 단순한 상징 권력을 넘어, 사법 시스템과 국정 운영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실질적 힘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권력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는 군주에게 '가상(virtù)'과 '운명(fortuna)'을 동시에 제어할 것을 주문했지만, 김건희의 서사에서는 시스템을 무시하는 오만과 위험을 관리하지 못하는 무능이 기묘하게 공존한다. 그는 권력의 단맛에 취했지만, 그 권력에 수반되는 공적 책임의 무게는 감당하지 못했다. 그녀의 '광폭 행보'는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라, 오히려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무지와 불신, 그리고 모든 것을 개인적 관계로 환원하려는 전근대적 사고의 표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론: 이카로스의 날개, 혹은 나르키소스의 연못
김건희의 서사는 그리스 신화의 두 인물을 동시에 소환한다. 하나는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너무 높이 날아오르다 추락한 이카로스(Icarus)다. 그는 남편의 권력이라는 날개를 달고,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고도로 비상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라는 태양의 열기는 그녀의 날개를 녹였고, 대중의 찬사는 이내 비판과 경멸로 바뀌었다. 그녀의 비상은 자기 능력에 대한 객관적 인식, 즉 메타인지(metacognition)의 부재가 빚어낸 예고된 비극이었다.
다른 하나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 연못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Narcissus)다. 그녀의 모든 행보는 대중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확인하고 강화하려는 행위처럼 보였다. 캄보디아 환아 방문 사진에서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마포대교 방문에서 연출된 구도와 조명을 활용한 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의 소품으로 활용했다는 비판을 낳았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구성했지만, 정작 그 시선 너머에 있는 타인의 실존에는 무관심한 듯 보였다. 결국 그는 자신이 만든 이미지의 연못에 스스로 갇히고 말았다.
이제 '김건희 특검법'과 전직 대통령 부부의 동시 구속이라는 사법적 절차를 통해, 신기루는 걷히고 실체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소동이 끝난 뒤에도 질문은 남는다. 우리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이 공허한 스펙터클에 열광하고 분노하며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했는가? 김건희라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미지에 취약하고, 본질보다 현상에 집착하며, 공적 윤리의 기준이 무너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거울일지 모른다. 그녀의 추락을 조롱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을 넘어, 우리 안의 작은 김건희, 즉 성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소유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 하며, 공적 책임을 망각한 채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내면의 그림자를 직시해야 할 때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바로크적 비극의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성숙한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