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 흥망성쇠의 냉엄한 법칙 앞에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로마가 그러했고, 몽골과 대영제국이 그 뒤를 따랐다. 20세기와 21세기 초반,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Hyperpower)으로 군림하며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를 열었던 미합중국 역시 그 거대한 흐름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징후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내부로부터의 분열, 구조적 한계에 봉착한 경제, 깊어지는 사회적 갈등, 그리고 변화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미국의 절대적 패권은 명백한 균열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의 귀환과 그의 극단적 언행은 쇠퇴하는 제국의 불안과 혼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발악(發惡)으로 해석될 수 있다.
1. 내부로부터의 붕괴: 극심한 정치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미국의 쇠퇴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지표는 바로 그들의 정치 시스템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파열음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설계한 견제와 균형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이제 기능 부전에 빠진 듯 보인다.
통계로 본 분열의 심각성: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장기 추적 조사에 따르면, 1994년 당시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의 정치적 가치관 중위값(median)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약 30년이 흐른 지금, 두 집단의 가치관 분포는 거의 겹치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벌어졌다. 2023년 조사에서는 민주당 지지자의 63%와 공화당 지지자의 72%가 상대방 정당의 정책이 미국에 해를 끼친다고 믿고 있으며, 상대방 지지자들을 "비도덕적"이라고 여기는 비율도 각각 47%, 55%에 달했다.
이러한 분열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부정적 당파성(negative partisanship)', 즉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을 동력으로 삼는 정치 형태로 변질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UC Davis)의 2022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의 약 20%가 특정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응답했으며, 약 50%는 향후 몇 년 안에 미국에서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공유하는 기본적 합의가 얼마나 붕괴했는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수치다.
트럼프의 역할:
이러한 양극화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인물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다. 그는 '우리'와 '그들'을 명확히 구분하고, 정치적 반대자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며 분열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했다. 최근 그가 군 고위 장성들을 소집해 "내부의 적(enemy from within)"과의 전쟁을 언급한 것은 이러한 위험한 사고방식의 연장선에 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국가의 물리력을 정치적 반대파를 겨냥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은 미국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연방정부 셧다운을 공무원 대량 해고의 기회로 삼겠다는 발상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 시스템의 마비를 정적 제거와 권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는 더 이상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나 통합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외부의 위협이 아닌, 내부의 리더십에 의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2. 구조적 경제 취약성과 흔들리는 달러 패권
미국의 패권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함께 달러라는 기축통화가 떠받치는 막강한 경제력에 기반했다. 그러나 이제 그 경제의 펀더멘털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천문학적 부채와 재정 절벽:
미국 재무부에 따르면, 2025년 회계연도 기준 미국의 국가 부채는 35조 달러를 돌파했다. 이는 미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120%를 훌쩍 넘는 수치로, 2차 세계대전 직후를 제외하면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현 추세가 이어진다면 2034년에는 부채 비율이 130%에 육박할 것으로 경고한다.
이처럼 막대한 부채는 미국의 재정 정책에 심각한 족쇄가 된다. 금리가 1%만 올라도 연간 이자 부담은 수천억 달러씩 늘어난다. 이는 미래 세대에 대한 착취일 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 시 정부가 쓸 수 있는 정책적 여력을 고갈시킨다. 신용평가사 피치(Fitch)가 2023년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강등한 것은 반복되는 부채 한도 증액 협상과 정치적 불안정성이 더 이상 미국 경제의 신뢰를 담보하지 못함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흔들리는 제조업과 무역 적자:
'러스트 벨트(Rust Belt)'라는 말이 상징하듯, 한때 미국 경제의 심장이었던 제조업은 수십 년간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1960년대 미국 GDP의 약 25%를 차지했던 제조업 비중은 현재 11%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 자리를 금융과 서비스업이 대체했지만, 이는 양질의 중산층 일자리 감소와 소득 불평등 심화로 이어졌다.
고질적인 무역 적자 역시 문제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2023년 미국의 상품 및 서비스 무역 적자는 약 7,734억 달러에 달했다. 특히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은 심각한 수준이다. 트럼프가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며 고율 관세를 부과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만, 이는 글로벌 공급망에 혼란을 초래하고 동맹국과의 갈등을 유발했을 뿐,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는 미국 소비자의 부담 증가로 이어졌고, 중국은 미국의 관세를 우회할 새로운 수출 경로를 개척하며 영향력을 유지했다. 조선업과 같은 전통적인 중공업 분야에서 이미 중국이 미국을 추월한 것은 물론, 전기차, 배터리, 인공지능 등 미래 산업에서도 중국의 추격은 미국의 기술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
3. 심화되는 사회 불평등과 내부로부터의 붕괴
'아메리칸 드림'으로 상징되던 기회의 땅 미국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선진국 중 하나가 되었다. 경제적 양극화는 사회적 유대를 끊고 내부 갈등을 증폭시키는 시한폭탄과 같다.
통계로 보는 불평등의 민낯: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데이터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미국 상위 1%가 전체 부(wealth)의 30.4%를 차지하는 반면, 하위 50%의 자산은 다 합쳐도 2.5%에 불과하다.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 역시 2022년 0.49로, 주요 7개국(G7) 중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러한 불평등은 교육, 의료, 주거 등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특히 미국의 기형적인 의료 시스템은 심각한 문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지만, 기대 수명이나 영아 사망률과 같은 공중 보건 지표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 의료보험이 없거나 불충분한 수천만 명의 국민에게 질병은 곧 파산을 의미한다. '절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라 불리는 약물 과다복용, 자살, 알코올성 간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특정 계층과 지역에서 급증하는 현상은 경제적 절망이 사회 전체의 건강을 어떻게 좀먹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이 낳은 분노와 소외감은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그는 기득권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고, 이민자와 소수자를 희생양 삼아 백인 노동자 계층의 좌절감을 파고들었다.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향수를 자극했지만, 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보다는 사회적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4. 다극화 시대의 도래와 미국의 리더십 약화
냉전 종식 후 약 30년간 지속된 미국 중심의 단극(unipolar) 체제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중국의 부상, 러시아의 재기, 그리고 인도, 브라질과 같은 지역 강국들의 등장은 국제 질서를 다극(multipolar) 체제로 재편하고 있다.
중국의 도전과 미국의 대응:
중국은 이제 단순한 '세계의 공장'이 아니다.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 구상을 통해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경제 벨트를 구축하고 있으며,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을 통해 미국 중심의 브레튼우즈 체제에 도전하고 있다. 군사적으로도 항공모함 전단을 확대하고 극초음속 미사일과 같은 첨단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서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적 우위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에 대한 트럼프의 대응 방식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고립주의적, 거래적 외교로 나타났다. 그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하고, 파리 기후변화협약, 이란 핵 합의(JCPOA) 등 다자간 협력의 틀을 무너뜨렸다. 동맹국들을 향해서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며 '안보 무임승차론'을 제기했다. 이러한 행동은 동맹의 신뢰를 훼손하고, 미국의 리더십에 공백을 초래했다. 그가 최근 캐나다를 "51번째 주"로 편입하는 방안을 다시 거론한 것은 동맹을 동등한 파트너가 아닌, 미국의 이익에 종속되는 존재로 보는 그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 역시 예측 불가능하다. 러시아 본토 타격을 위한 정보 제공을 지시하는 강경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언제든 지원을 끊고 러시아와 손잡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동맹국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이러한 일관성 없는 외교 정책은 국제 사회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며, 미국의 동맹국들이 독자적인 생존 방안을 모색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있다.
결론: 쇠락의 가속 페달을 밟는 트럼프의 발악
미국이 직면한 위기는 단기적인 경기 순환이나 특정 행정부의 정책 실패를 넘어선,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쇠퇴의 징후다. 정치적 내분, 재정적 취약성, 사회적 분열, 그리고 국제적 리더십의 약화라는 네 개의 거대한 파도가 동시에 미국이라는 제국을 덮치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전환기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재등장과 그의 언행은 문제 해결을 위한 처방이 아니라,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키는 독약에 가깝다. 그는 분열을 통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조장하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외부의 적과 내부의 희생양을 만들어 대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다. 그의 "위대한 미국"은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일 뿐,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트럼프의 발악은 어쩌면 쇠퇴하는 제국이 겪는 마지막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방식이 미국의 연착륙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추락의 속도를 높이는 가속 페달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세계는 이제 '팍스 아메리카나' 이후의 시대를 준비해야 하며, 그 과정은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초강대국의 불안한 마지막 그림자와 함께 상당한 혼돈을 예고하고 있다. 역사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