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지평선은 때때로 기이한 신기루를 투영하여, 과거의 망령이 현재의 실체와 겹쳐 보이는 착란을 일으킨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비극적 사태는 바로 그러한 역사의 가장 잔인하고도 아이러니한 귀결 중 하나일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국가, 인류사 최악의 집단학살의 희생자였던 유대 민족의 후예들이 이제는 가자 지구의 폐허 위에서 '가해자'라는 실랄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집단학살' 혐의로 심판대에 세웠으며, 전 세계의 양심은 분노와 탄식, 그리고 깊은 혼란 속에서 이 참상을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균열의 한가운데, 베냐민 네타냐후라는 인물의 강경한 리더십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금기시된 이름과 더불어 불길한 연상을 자아내고 있다.
물론, 히틀러와 네타냐후를, 나치 독일의 체계적인 인종 말살과 현재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역사적 맥락과 규모, 이데올로기적 본질을 무시하는 위험한 단순화일 수 있다. 그러나 사용자가 제기한 이 도발적인 비교의 이면에는 더 깊고 근원적인 질문이 숨어 있다. 한때 억압받던 자가 어떻게 억압하는 자의 논리를 내면화하게 되는가? 국가적 트라우마는 어떻게 집단적 폭력의 자양분이 되는가? 그리고 권력의 정점에서 한 인간과 그가 이끄는 국가는 어떻게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잠식당하는가?
이 칼럼은 히틀러와 네타냐후를 단순 비교하여 단죄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이 두 인물을 각각의 시대가 잉태한 비극의 프리즘으로 삼아,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어떻게 시오니즘이라는 민족주의적 갑옷으로 변모하고, 그 갑옷이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는 거대한 억압의 감옥이 되었는지를 존재론적, 철학적,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심층적으로 탐색하고자 한다. 이는 폐허의 역사 위에서 또 다른 폐허를 쌓아 올리는 인류의 슬픈 자화상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자, 권력이라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가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지에 대한 니체적 경고의 현대적 재해석이 될 것이다.
1부. 기억의 성채(城砦): 홀로코스트와 '결코 다시는(Never Again)'의 변증법
역사는 기억의 투쟁이다. 유대 민족에게 홀로코스트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론적 불안을 규정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상흔이다.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목도했듯, 인간의 존엄성이 한낱 연기처럼 사라지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순수의 공간일 수 없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부채감이었고,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절멸의 공포는 그들의 집단 무의식 깊숙이 각인되었다. '결코 다시는(Never Again)'이라는 구호는 단순한 슬로건을 넘어, 생존을 위한 절대명령이자 새로운 국가 정체성의 주춧돌이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이러한 절박함의 산물이었다. 2천 년간의 디아스포라와 반유대주의의 질곡을 거쳐 마침내 '약속의 땅'에 세워진 국가는, 유대 민족에게는 나약한 소수자의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주권적 존재로 거듭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시오니즘은 낭만적 민족주의를 넘어, 생존주의적 리얼리즘의 갑옷을 두르게 되었다. 국가는 기억의 성채가 되었고,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그 성채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보루로 신성시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었다. 하나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세워진 성채는 필연적으로 외부를 향한 벽을 높이 쌓아 올린다. 성채 안의 '우리'와 성채 밖의 '그들'을 가르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모든 것을 안보의 논리로 환원시킨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은 희미해지고, 오직 자신들의 생존 논리만이 절대 선(善)으로 군림하게 된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외부 세계를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편집증적 필터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모든 비판은 반유대주의의 또 다른 발현으로 치부되고,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존재를 위협하는 테러리즘으로 규정되었다. 이스라엘은 희생자라는 도덕적 자산을 바탕으로, 그 어떤 군사적 행위도 '자위권'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하는 강력한 자기합리화의 기제를 구축했다. 이는 기억의 비극적 역설이다.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드는 알리바이가 되는 순간, 기억은 구원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2부. 네타냐후의 시대: 불안의 지정학과 권력의 사유화
베냐민 네타냐후는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집단적 불안과 강박적 생존주의가 낳은 시대의 총아다. 그의 정치적 언어는 시종일관 위협과 생존의 서사로 채워져 있다. 이란의 핵 위협, 헤즈볼라와 하마스의 테러,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국가 수립 요구 등, 그에게 이 모든 것은 유대 국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실존적 위협이다. 그의 세계관 속에서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아랍 세계에 둘러싸인 외로운 섬이며, 오직 압도적인 힘과 단호한 결의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
이러한 강경 노선은 이스라엘 사회의 우경화와 맞물려 오랜 기간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가 장기화되면서, 국가의 안보 논리는 점차 개인의 권력 유지 논리와 뒤섞이기 시작했다.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총리직을 유지하려는 그의 시도는 이스라엘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다. 특히 사법부의 권한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행정부와 입법부가 사법부를 통제하려는 시도로, 이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전례 없는 대규모 저항 시위를 촉발시켰다. 이는 네타냐후의 리더십이 더 이상 국가의 안위를 넘어,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징후였다.
하마스의 2023년 10월 7일 기습 공격은 네타냐후에게 최악의 안보 실패라는 오명과 함께, 역설적으로 정치적 재기의 기회를 제공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은 분열된 여론을 하나로 묶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하마스 섬멸'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을 잠재우고 강력한 전쟁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히틀러와의 섬뜩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 방법과 이데올로기는 극명히 다르다. 히틀러가 아리아 민족의 위대성을 내세우며 외부의 적(유대인, 공산주의자)을 상정하고 내부의 결속을 다졌다면, 네타냐후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소환하며 외부의 위협(하마스, 이란)을 극대화하고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한 단결을 호소한다. 둘 다 외부의 적을 통해 내부의 위기를 돌파하고, 국가적 비상사태를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전략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민주적 절차의 약화, 사법부의 무력화 시도, 비판적 언론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국민을 분열시키는 선동적 언어는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보편적인 통치 기술이다.
3부. 악의 평범성: 가자지구의 비극과 무사유(Thoughtlessness)의 제국
"슬픈 진실은 대부분의 악이 선악에 대해 결단을 내리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관찰하며 도달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이해하는 데 섬뜩한 통찰을 제공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악마적 괴물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평범한 관료였다. 그의 죄는 사유(思惟)의 부재, 즉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하고 성찰하는 능력을 상실한 데 있었다.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봉쇄는 '하마스 섬멸'이라는 군사적 목표 아래 자행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인들과 정책 결정자들은 아마도 스스로를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조국의 안보를 위해, 테러리스트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수만 명의 민간인 사망, 그중 절반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이며, 200만 명 이상이 식량과 물, 의료 서비스 부족으로 고통받는 인도주의적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사유하지 않는 악', 즉 악의 평범성이 시스템으로 작동할 때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개별적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하마스'라는 집단과 동일시되거나 '부수적 피해'라는 비인격적인 용어로 환원된다. 가자지구는 구체적인 삶의 터전이 아니라, 지도 위의 '소탕 작전 구역'으로 대상화된다. 이러한 비인간화의 과정 속에서 폭력은 일상화되고, 관료적 절차와 군사적 논리에 의해 정당화된다. 아렌트의 통찰처럼, 가장 위험한 것은 광신자가 아니라, 시스템에 순응하며 비판적 사고를 멈춘 '전형적인 공무원'과 군인들이다.
네타냐후 정권은 이러한 '무사유'의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 그의 언어는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한다. 오직 이스라엘의 희생과 안보만이 강조될 뿐이다. 국제사회의 비판은 '위선'으로, 유엔의 경고는 '편향'으로 일축된다. 이러한 태도는 이스라엘 사회 전체에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을 확산시키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방어기제를 강화한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 세운 국가가, 이제는 타인의 고통을 사유하기를 거부하는 국가가 되어버린 이 비극적 현실이야말로 '악의 평범성'이 빚어낸 가장 참혹한 결과물이다.
4부. 몰락의 전조: 균열하는 제국과 고립의 심연
역사상 모든 제국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균열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현재 네타냐후의 '악의 제국' 역시 여러 측면에서 심각한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첫째, 내부적 분열이다. 사법부 무력화 시도로 촉발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이스라엘 사회가 결코 철옹성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세속주의자와 종교주의자, 좌파와 우파,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시민들과 권위주의로 회귀하려는 정권 사이의 갈등은 전쟁이라는 비상사태 아래 잠시 봉합되었을 뿐, 언제든 다시 터져 나올 수 있는 활화산이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인질 구출이 지지부진하며, 경제적 피해가 누적될수록 네타냐후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은 다시 고조될 수밖에 없다.
둘째, 국제적 고립이다.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미국조차 가자지구의 인도주의적 위기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이스라엘과 미묘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유럽 각국에서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으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연일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를 규탄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이스라엘을 ICJ에 제소한 것은 이러한 국제적 여론의 변화를 상징하는 결정적 사건이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를 경험한 국가가 이스라엘을 집단학살 혐의로 고발한 것은,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누려왔던 '희생자'로서의 도덕적 특권이 완전히 소멸했음을 의미한다.
셋째, 도덕적 파산이다.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몰락의 전조다. '결코 다시는'이라는 홀로코스트의 교훈은 특정 민족에게만 적용되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윤리 명령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가하는 억압과 폭력은 이 보편적 교훈을 스스로 배반하는 행위다. 희생자의 후예가 가해자의 논리를 따를 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모든 정신적 유산은 빛을 잃고 만다. 마치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이스라엘은 안보를 얻는 대가로 영혼을 잃어가고 있다.
결론: 잿빛 거울을 깨뜨릴 용기
우리는 지금 잿빛 거울 앞에 서 있다. 한쪽에는 홀로코스트의 참상 속에서 절규하는 유대인의 모습이, 다른 한쪽에는 가자지구의 폐허 속에서 신음하는 팔레스타인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네타냐후는 이 거울을 통해 오직 과거의 희생자로서의 자기 모습만을 보려 하지만, 세상은 거울 뒷면에 비친 현재의 가해자로서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다. 히틀러의 망령은 인종적 증오와 광기라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오늘날 그 망령은 안보와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시스템과 관료주의의 가면을 쓴 채 '평범한 악'으로 우리 곁에 현현하고 있다.
네타냐후 정권의 몰락은 단순히 한 정치인의 퇴장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에 기생하여 폭력과 배제를 정당화해 온 강경 시오니즘의 파산을 의미해야 한다. 또한, 희생자라는 이름이 더 이상 무소불위의 도덕적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역사의 비극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비극을 자양분 삼아 더 교묘하고 복잡한 형태로 변주된다. 히틀러의 제국이 광기의 오페라였다면, 네타냐후의 제국은 무사유의 레퀴엠(진혼곡)이다. 이 슬픈 노래를 멈추기 위해서는 잿빛 거울을 깨뜨릴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나의 고통만큼 타인의 고통도 소중하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역사는 시작될 수 있다. 그렇지 않는 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는 역사가 파놓은 거대한 무덤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인류의 이름으로 자행된 거대한 실패를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