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불꽃: 디지털 아고라에서 타오른 오래된 분노, 혹은 영원회귀의 새로운 서곡
역사의 거대한 양피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워지고 다시 쓰이는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와 같다. 그 위에는 동일한 투쟁의 서사가 상이한 시대의 잉크로, 다른 언어의 필체로 각인되곤 한다. 2025년 9월,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네팔의 카트만두 계곡에서 타오른 'Z세대 혁명'은, 표면적으로는 소셜 미디어 금지라는 지극히 현대적인 도화선에서 발화했지만, 그 화염의 근원에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과 욕망, 즉 정의에 대한 갈망, 부패에 대한 혐오, 그리고 낡은 질서의 족쇄를 끊어내려는 카타르시스적 충동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히말라야의 불꽃을 그저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해프닝으로 치부하는 것은, 헤겔의 변증법적 나선을 일직선으로 오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지적 태만일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의 현상학적 표피를 꿰뚫고, 그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역사적 공명과 철학적 함의를 직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제1장: 스파크와 화약고 - 시뮬라크르의 균열이 드러낸 실재의 민낯
모든 혁명은 하나의 상징적 사건, 즉 ‘스파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때로 튀니지의 가난한 과일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일 수도 있고, 보스턴 항구에 던져진 홍차 상자일 수도 있으며, 바스티유 감옥의 돌문일 수도 있다. 2025년 네팔에서 그 스파크는 역설적이게도 비물질적이며 가상적인 공간, 즉 소셜 미디어의 차단이었다. 장 보드리야르가 설파했듯, 현대 사회는 실재가 사라지고 그 기호와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실재를 대체하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시대다. 네팔의 Z세대에게 SNS는 단순한 소통 도구를 넘어, 그들의 자아를 구성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디지털 아고라(Agora)’이자 존재론적 기반이었다.
네팔 공산당 정권이 ‘네포 키즈’라 불리는 권력층 자제들의 과시적 소비라는 불편한 진실, 즉 실재의 추악한 단면을 가리기 위해 그들의 디지털 아고라를 폐쇄했을 때, 그들은 치명적인 오판을 저질렀다. 이는 단순한 정보 통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세대의 존재 방식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가상 공간이라는 마지막 도피처마저 빼앗으려는 권력의 오만한 폭력이었다.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가해진 검열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외면하고자 했던 ‘실재’의 문제—만성적인 부패, 20%에 육박하는 청년실업률, 정치적 무능—를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강제로 지우자, 죄수들이 고개를 돌려 동굴 밖의 눈부신 태양, 즉 진실의 실체를 직면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정부가 차단한 것은 26개의 애플리케이션이었지만, 그들이 폭발시킨 것은 수십 년간 응축된 국민적 분노라는 화약고였다. “소셜미디어가 아닌 부패를 척결하라”는 구호는 이러한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 이는 1789년 프랑스 민중이 “빵을 달라”고 외쳤던 것과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빵의 결핍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그 결핍을 야기한 구조적 모순과 귀족 계급의 탐욕이 본질이었듯, SNS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을 차단해야만 했던 정권의 부패와 비리가 혁명의 진정한 원인이었다. 네팔 정부는 디지털 시대의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그들은 Z세대가 SNS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의 분노가 단순한 ‘툴툴거림’이 아니라 낡은 세계를 전복시킬 수 있는 크토노스적(chthonic) 에너지임을 간과했다.
제2장: 불타는 궁전 - 이콘 파괴 의식과 권력의 탈신성화
9월 9일, 시위대의 분노가 카트만두의 심장부, 싱하 더르바르(Singha Durbar) 청사를 집어삼켰을 때, 혁명은 되돌릴 수 없는 상징적 정점을 맞이했다. 불타는 정부 청사의 이미지는 단순한 기물 파손의 현장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물리적 공간을 파괴함으로써 그 권력에 깃든 신성성(Sacredness)과 영원성에 대한 믿음을 불태우는 장엄한 이콘 파괴(Iconoclasm) 의식이다. 미셸 푸코가 지적했듯, 근대 국가는 감옥, 병원, 학교, 그리고 정부 청사와 같은 건축물을 통해 그 권력의 가시성과 규율을 관철한다. 싱하 더르바르 청사는 네팔 국민에게 군림하는 권력의 구체적인 현현(顯現)이었으며, 그 견고한 벽은 체제의 영속성을 웅변하는 듯했다.
그것이 화염에 휩싸이는 순간, 권력은 추상적 이념에서 한낱 불타는 돌과 나무의 집합체로 전락한다. 이는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단지 7명의 죄수를 해방시킨 사건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바스티유 함락의 진정한 의미는 수감자의 해방이 아니라, 왕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없다는 ‘신화’의 파괴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네팔 시위대가 대통령 관저를 불태우고, 총리 공관을 습격하며, 대법원 건물을 전소시킨 행위는 국가기관의 물리적 파괴를 넘어, 법과 질서라는 이름 아래 군림하던 기존 권력 체계의 정당성 자체를 소각하는 상징적 퍼포먼스였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정치 지도자들의 비참한 모습은 권력의 탈신성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강에 뛰어들었다가 붙잡혀 알몸으로 끌려다닌 부총리, 자택에 난입한 시위대에 폭행당한 전 총리 부부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등장하는 폐위된 왕들의 초라한 말로를 연상시킨다. 권력이라는 화려한 의복이 벗겨진 채, 한 명의 나약한 개인으로 군중 앞에 내던져진 그들의 모습은, 권력이란 인민의 동의라는 가변적 토대 위에 세워진 허상에 불과함을 폭로한다. 이는 토머스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의 해체 과정이다. 사회 계약을 통해 자신의 주권을 양도했던 인민이, 그 계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자연 상태의 주권을 되찾아오는 혁명의 원초적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대한 가장 생생한 알레고리인 것이다.
제3장: 칼의 침묵 - 프라이토리아니즘의 부재와 레짐 체인지의 결정적 순간
모든 혁명의 성패는 궁극적으로 총구의 방향에 의해 결정된다. 국가가 지닌 폭력의 독점적 사용권, 즉 군대와 경찰이 어느 편에 서느냐가 낡은 질서의 붕괴와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네팔 혁명의 과정에서 네팔군이 보여준 ‘정치적 중립’과 ‘유혈 진압 거부’는 이 혁명이 단순한 폭동을 넘어 성공적인 레짐 체인지로 귀결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었다. 아쇼크 라즈 시그델 육군참모총장이 “군이 국가 통합과 영토 보전을 위해 전념하고 있다”며 사실상의 개입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은, 정권이 아니라 ‘국가’라는 더 큰 공동체에 대한 충성을 선택한 것이며, 이는 정권의 사유화된 폭력기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혁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패턴이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당시,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마지막 연설을 할 때 군중의 야유가 터져 나오자, 국방장관 바실레 밀레아가 시위대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자살(혹은 암살)함으로써 군부가 시민의 편으로 돌아서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반면, 1989년 중국의 톈안먼 사태에서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을 때, 민주화의 열망은 탱크의 궤도 아래 무참히 짓밟혔다. 이처럼 군의 선택은 혁명의 향방을 결정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같다.
네팔군의 침묵은 로마 제국의 근위대(Praetorian Guard)가 황제를 시해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던 프라이토리아니즘(Praetorianism)의 유혹을 이겨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스스로를 정치의 영역에서 분리하고 질서 유지라는 최소한의 역할에 머물렀다. 이는 군부가 특정 정권의 수호자가 아닌, 국민 전체의 수호자라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을 내재화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후 시위가 진정되자 신속하게 원대로 복귀하고 경찰이 버린 무기를 회수하는 모습은, 그들의 중립이 단순한 기회주의적 방관이 아니라, 국가의 장기적 안정을 위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었음을 증명한다. 4.19 혁명 당시, 이승만 정권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정치적 중립을 선언했던 한국군의 모습과도 오버랩되는 이 장면은, 가장 첨예한 위기의 순간에 국가의 근간을 지키는 것은 결국 폭력이 아니라 원칙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제4장: 디스코드 공화국 - 디지털 합의와 아날로그 통치의 변증법
혁명이 낡은 것을 파괴하는 단계에서 새로운 것을 건설하는 단계로 넘어갈 때, 혁명은 가장 큰 시험대에 오른다. 네팔 혁명은 이 전환 과정에서 전례 없는 실험을 감행했다. 바로 ‘디스코드(Discord)’라는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 플랫폼을 통해 과도정부의 수반을 사실상 추대한 것이다. 시위대가 디스코드 투표를 통해 73세의 전직 여성 대법원장 수실라 카르키를 임시 총리로 지지했고, 람 찬드라 파우델 대통령이 이를 수용한 사건은, 인류 정치사에 기록될 만한 기이하고도 심오한 장면이다. 이는 고대 아테네의 민회가 21세기 디지털 공간에서 유령처럼 재현된 것이자,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가 서버와 알고리즘을 통해 발현된 초유의 사태였다.
그러나 이 ‘디스코드 공화국’은 심각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네팔 시민이 아니어도 참여 가능한 익명의 투표로 형성된 합의가 과연 정치적 정당성(Legitimacy)을 가질 수 있는가? 디지털 공간의 휘발적이고 유동적인 여론이 아날로그 세계의 견고하고 지속적인 통치 구조로 성공적으로 이식될 수 있는가? 이는 가상(Virtuality)과 현실(Reality)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에 대한 질문이다. 디스코드 채널의 관리자가 “임시 총리는 선거를 감독할 임시 지도자 정도의 역할”이라고 선을 그은 것은, 그들 스스로도 이 디지털 합의의 한계와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선택한 인물이 젊은 래퍼 출신 시장이 아닌, ‘부패에 엄격한 판결을 내린 것으로 유명한’ 73세의 원로 법조인 수실라 카르키였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Z세대의 혁명이 단순히 낡은 세대에 대한 반감을 넘어, ‘원칙’과 ‘정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갈망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가장 보수적인 가치, 즉 법치와 청렴을 구현할 인물을 찾아낸 것이다. 이는 혁명의 파괴적 에너지와 건설의 이성이 기묘하게 조우하는 변증법적 순간이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그릇에 ‘정의’라는 가장 오래된 내용을 담으려는 이 시도는, 기술 결정론을 넘어 인간의 의지와 가치가 여전히 역사의 주체임을 웅변한다.
결론: 새벽의 청소부들 - 혁명 이후의 혁명을 꿈꾸며
혁명의 가장 감동적인 이미지는 불타는 궁전이나 쓰러지는 동상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난 다음 날 새벽, 거리로 나와 잔해를 치우는 시민들의 모습일 때가 많다. 네팔 혁명에서 시위대가 스스로 도시를 청소하고 하루 만에 평온을 되찾은 모습은 이 혁명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목표는 무질서와 파괴 자체가 아니라, 더럽혀진 집을 청소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이었다.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나 사유재산 파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 또한, 그들의 분노가 맹목적인 증오가 아니라, 부패한 권력이라는 특정 대상을 향한 ‘정의로운 분노’였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역사는 혁명의 순수한 이상이 권력투쟁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오염되고 변질되는지를 무수히 목격해왔다. 프랑스 혁명은 공포정치와 황제의 등장으로 귀결되었고, 러시아 혁명은 전체주의 독재로 이어졌다. ‘아랍의 봄’은 대부분 ‘아랍의 겨울’로 끝났다. 2026년 3월 5일로 예정된 네팔의 총선은 이 혁명이 진정한 ‘새로운 새벽’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혼란의 서막이 될지를 결정할 시험대가 될 것이다. 디스코드 의회는 해산되었고, 이제 그들은 헌법과 선거법이라는 아날로그의 규칙 속에서 자신들의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
네팔의 Z세대는 세계를 향해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된 신세대는 더 이상 지정학적 경계나 낡은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으며, 불의에 맞서 전 지구적으로 연대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의 시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것처럼, 이 히말라야의 불꽃은 남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억압받는 청년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불씨가 될지 모른다.
결국 2025년 네팔 혁명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인간은 세대가 바뀌고 기술이 발전해도 영원히 같은 것을 욕망하고, 같은 것에 분노하며, 같은 꿈을 꾼다. 정의, 자유, 그리고 더 나은 삶에 대한 꿈. 카트만두의 젊은이들은 가장 현대적인 도구로 가장 오래된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그들의 혁명이 인류의 기나긴 실패의 역사에 또 하나의 각주를 더할지, 아니면 마침내 그 고리를 끊어내는 새로운 장의 서문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불태운 것은 낡은 정부 청사만이 아니라, 기성세대의 냉소와 무력감이었으며, 그들이 청소한 것은 거리의 쓰레기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체념의 먼지였다는 사실이다. 히말라야의 설산 위로 떠 오르는 새로운 태양 아래, 역사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다음 걸음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