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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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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모 Oct 11. 2024

너희가 낮술을 아느냐



낮술, 술이야 마음이 동하고 여건이 맞으면 언제고 마실 수 있는 일이지만 낮술이란 말속에 숨어 있는 시니피에는 예사롭지 않다. 퇴근 무렵 삼겹살에 소주 한잔, 늦은 저녁 다정한 그대와의 반주가 놓인 식탁, 벗들과의 유쾌한 술자리, 비 오는 날의 적당히 쓸쓸하고 호젓한 자작 같은 의미와는 조금 다른, 다소 어색할 대낮과 술이 어우러진 풍경은 그래서 수식어와 목적어가 하나의 흥취로 공존하는 낮술이란 말로 구별된다. 말 그대로 낮에 마시는 술. 대부분의 주시酒時에서 삐죽 튀어나온 시간, 벌써 취기가 오른다. 생각보다 여유롭고 나른하면서도 불안한 공감각의 기운이 낮술이다. 밝은 햇빛이나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아니면 덥고 추운 날씨를 핑계로 뜬금없이 시작해서 해동갑에서야 불콰한 얼굴로 끝이 나는 몽롱한 술판이다.


그러나 우리, 낮술의 사연마다 예를 다해 바라보기를. 낮술에는 억울한 심사를 참아 누르는 불편한 심정이 있다. 부도가 나서 도망 다니던 아버지가 남들 눈을 피해 집에 들른 날 김치를 안주 삼아 마시던 소주잔 속에 분명히 그런 게 있었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명예퇴직을 하던 선배들의 눈빛과 술잔 속에서도 그랬고, 어느 날 단호한 결별을 통보받은 어설픈 연애마다 그랬다. 술잔을 비우면서, 그렇게라도 제 몸에 물을 주지 않으면 온몸으로 삐져나오는 분을 삭이기 어려워 치르는 쓰디쓴 의식이다. 어떤 낮술 속엔 무심하고도 나른한 여유가 있다. 특별히 할 일이 없거나 전날의 숙취로 뒹굴거릴 때, 그냥 날씨 탓에라도 한잔 하고 싶거나 마침 변죽이 잘 맞는 친구의 전화라도 있을 때, 조금 멋쩍기는 하지만 이유 없이 시작하는 것이다. 때론 여름 유원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혹은 추운 겨울날 두꺼운 외투를 입고 옹기종기 쪼그려 앉아 마시는 한잔이 그렇다.


다시 낮술에는 애간장을 녹여 마시는 일말의 화기火氣가 있다. 친구와 점심시간에 들어간 식당에서 복어 지리를 주문하곤 보글보글 끓는 시원하고 뜨거운 국물에 현혹되어 '낮술 한잔 할까?'로 따라오는 술 한 병이, 몹시 상했던 마음들이 식탁 너머로 마주했을 때 머쓱한 '미안해'에 온기를 두르게 하던 술 한잔이, 그대와의 애틋했던 시간들이 생각나 멍하던 마음이 들끓기 시작해서, 온갖 불편부당한 것들로 반죽되어 욕이 나오는 세상이 어이없어서, 대책 없이 낮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낮술을 하는 사람들마다 금세 취하고 마는 이유다. 대부분의 낮술은 의도하지 않았던 예상치 못한 계기로 시작되지만 술잔이 비워질 때마다 자꾸 이런저런 사연들이 숨어들어 유쾌하면 유쾌해서 심란하면 심란해서 또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뜨거운 혈관을 타고 도는데 누군들 말짱하니 견딜 수 있으랴. 누가 어리숙한 취생몽사라 단정할 수 있으랴.


그러니 어느 날 문득 할 일이 없어지는 그대도, 살아내는 게 팍팍해서 고단한 그대도, 서글픔에 자주 목이 메는 그대도 한 번쯤은 대책 없이 낮술과 만나 볼 일이다. 진짜 정식 술판은 되지도 못하는, 저기 변두리에 지방방송에 마이너리티였던 우리를 쏙 빼닮은 조촐한 술판을 만나서, 왜 소풍 같다는 인생이 이리도 질기고 가려운지 붉은 얼굴로 더운 가슴으로 한 번쯤은 슬쩍 알아볼 일이다.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 말씀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 말씀도 착하게 기억하고 있겠지만, 떠나간 그대야 죄다 내 잘못이라지만, 억울하고 답답한 심사야 나름 다퉈 본다지만, 세상이 시절이 온통 술에 취한 듯 천지사방 고주망태로 비틀거리는데 이거야 원 불편하고 아니꼽고 더러워서 허구한 날 맨정신으로 견디라면 그냥 견뎌지는 게 아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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