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를 던졌어. 모나코로 갈 거야. 세상에 제법 큰비가 내리고 있던 어느 날 오후, 카페를 들어선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우산을 털며 내게 한 말이다. 그 말을 하고는 격앙된 감정을 참기 어려웠는지 냉수부터 단숨에 들이마셨다. 사고를 친 그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사표를 냈다고? 내 가슴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나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누워 희망의 땅을 이야기할 때 프라하와 더불어 상징처럼 꺼내 들었던 이름. 나는 그 동화 같던 일을 고스란히 잊은 채 분주히 뛰어다녔지만 그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듯했다. 나는 굳이 모나코가 아니어도 괜찮았지만, 부조리와 모순이 순화된 땅이라면, 아니 살아 숨쉬기 편하기만 하다면 어디든 괜찮았지만 그는 굳이 모나코여야만 했다. 그때 우리 나이 고작 서른.
그 나물에 그 밥이면 어쩌려고? 은근히 부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거기도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걸 환기시키며 눈치를 살피는 내내 나는 내가 너무 많은 타협과 위선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울해졌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랬다. 어릴 때 후크선장과 싸우던 기억은 이제 죄다 잊은 것이다. 모나코에 갈 거야, 그와 헤어질 때 다시 들어야 했던 말이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지중해에는 절대 지루한 생의 소모전이 없을 것이라고 꿈꾸는 몽상가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사람이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두 가지뿐이라는 걸, 사랑 아니면 환멸뿐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거리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엽서
그녀를 처음 만난 건 해변이었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가 사는 곳. 몬테카를로의 작은 해변에 석양이 지고 따듯한 바람이 불어올 때였어. 그녀는 해변에 무릎을 고이고 앉아 넋을 잃은 것처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지. 머리카락이 휘날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인형이라고 해도 믿었을 거야. 한눈에 반한다는 말 믿어? 그때 그랬거든. 모나코의 왕비가 된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보다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자였으니까. 처음에 그녀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어. 마침 그녀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졌을 때 그녀와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내가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녀와 나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잠시 같은 공간에 머문 게 다였을 거야.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에 내 사랑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정말 하지 못했어. 죽어도 좋아.
다시, 엽서
그녀가 떠났어. 여긴 지옥이야. 처음엔 한동안 떠난 그녀만 생각했어. 얼마 후 교통사고를 당했고 집에는 도둑도 들었어. 한순간에 살기 싫어지더군. 한 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일주일 동안 잠만 잔 적도 있어. 해변에 나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참고 살아.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집에서도 일만 해. 이제 모든 게 천천히 무뎌져 가. 면도를 한지도 오래됐어. 사람 사이에 감정이란 건 사랑과 환멸뿐이라고 했었지? 하나가 더 있다는 걸 발견했어. 무감각. 사람을 떠올리면서도 아무런 감정도 감각도 생기질 않아. 그럴 때면 내 심장이 마치 불투명 비닐로 만든 빵봉지 같다는 생각이 들게 돼. 그래서 죽을 것 같아.
그리고 다시, 모나코
전설은 모나코의 아름다운 곶을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가 건설했다고 전한다. 아직도 그 신화의 힘이 지중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나는 그가 곧 견딜만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감당하기 싫은 것을 참아내는 것은 분명히 고단한 일일테고 간혹 눈물도 고이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악당에게의 심판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모나코는 여전할 테고 미안하지만 그의 근황과 모나코는 별개라는 것. 그는 당분간 죽을 것 같다고 말하겠지만 앞으로 더 죽도록 살 것이 분명하다. 지금쯤은 외출을 하기 위해 말끔히 면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대개 비슷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실체를 대하고 당황할 때 그 사람 또한 내 모난 실체에 가슴이 떨려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맨얼굴과 직접 마주쳤을 때야 오죽하랴. 그러나 절망의 쓴맛을 한두 번 더 보았다고 해서 생의 이력에 큰 흠집이 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엔 사는 데 필요한 뼈다귀 같은 것들만 남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관계는 틈을 사이에 두고 회복되는 것이니 가능성이란 것은 의외로 길을 열어 줄 때가 종종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심심하고 사소한 일이지만 우리의 생을 가르는 분명한 에피파니가 아닐 수 없다. 모나코는 모나코에 있다. 그리고 몬테카를로에는 여전히 섭씨 28도의 바람이 누이의 입김처럼 불고 있을 것이다.
(팩트를 뼈대로 엽서에는 MSG 적당량 함유)
https://youtu.be/QzQS1QUBTKo?si=591CUj1LdQ0mSFz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