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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모 Oct 15. 2024

젊은 여자, 울 준비는 되어있다



집으로 가는 길목, 갑작스러운 비를 피해 뛰어 들어간 곳은 이층 주점로 올라가는 출입문 앞이었다. 이 계절에 국지성 소나기라니. 국지성이라는 건 어쩌면 비를 피해 간 사람들의 그럴듯한 무용담이나 과장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온몸으로 그 비는 맞는 동안은 도무지 국지성이라든지 단지 지금 뿐이라든지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랑처럼, 혹은 진종일 통점뿐인 이별처럼. 또 한 사람이 머리를 가리고 황급히 뛰어와 선다. 

               

두어 번 가보기도 했던 근처 카페을 운영하는 젊은 여자다. 젊은 여자라는 말은 다분히 자극적이다. 여자라서 예뻐서 자극적인 것이 아니라 젊기 때문에, 모든 사연을 향해 열려있는 '젊다'라는 이유 때문에. 머리를 가리고 있었던 것은 한 권의 책이었고 그래서인지 젊은 여자의 머리카락엔 적당한 물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쿠니 가오리, 울 준비는 되어 있다. 한 손에 내려든 책을 바라보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보며 손이 운다고 생각했다.  

              

읽어보셨어요? 책을 보고 있던,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손가락을 보고 있던 나는 기습적인 작은 목소리에 놀란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 책, 읽어보셨나 해서요. 약간의 안면에 기대어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아니오. 물론 읽어 보았지만 거의 초면의 대화가 멋적게 이어질 것을 염려한 내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빗줄기는 아직도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나는 내가 너무 멍청하게 대답을 했나 싶기도 했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던 건 이런 일시적인 공간과 침묵이 어색해서였으리라.                


그런 저런 이유로 나는 입을 다물고 비 내리는 거리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다시 말을 했다. 아니, 말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무료해서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 생각엔 관계의 딜레마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 같아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책 말이에요. 사람의 관계가 곧바로 결핍으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쩌면 사람을 절실히 사랑하지도 못하고 또 사랑받지도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특별하게 할 말은 없었다.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선방을 날렸거니와, 젊은 여자의 뜻밖이고도 자조적인 감상에 끼어들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가 조금 약해지자 젊은 여자는 가려는 듯 매무새를 고쳤고 나는 담배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거 읽어보시겠어요? 그녀가 내게 책을 건네며 말했다. 네? 그래도 되겠어요? 난감한 표정으로 약해진 비처럼 수동적인 내게 그녀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요. 전 이미 두 번이나 읽었고 또 아직 울 준비가 안되어 있으니까요.

                

한껏 멋을 부린 짧고 시니컬한 인사와 함께 책을 건네 준 젊은 여자 하나가 얌전해진 빗줄기 저편으로 단편소설처럼 사라져 갔다. 울 준비는 되어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책은 아직 표지에 빗물이 마르지 않았다. 횡재다. 일단은 우산 대용으로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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