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가 업이 된 이후 사랑하게 된 무엇
나는 신도림의 한 카페에 앉아 만나기로 한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부 취재가 있는 날엔 카페에서 기사를 보내고 업무를 마무리 하곤 했다. 동생은 하얀 면티에 끈 원피스를 덧입은 차림으로 카페에 들어섰다. 나는 ‘못보던 사이 예뻐졌다’는 말과 ‘왜 이렇게 귀엽냐’는 말을 했고, 동생은 ‘못보던 사이 예뻐졌다’는 말에 ‘직장인 같아졌다’는 말을 덧붙였다. 대화 사이에 어색함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뭐 마실래’하고 물었다. 그 때 동생은 이야기했다.
“올~ 기사 써서 번 돈으로 사주는 거예요?”
그 말은 묘했다. '그래. 내가 먹고 싶은 걸 먹고 사고 싶은 걸 사게하는 데는 쓰기의 역할이 컸지' 문득 생각했다. 나에게 '쓰기' 라는 단어는 ‘자아실현’ 같은 숭고한 단어 주변 어느 곳에 있지 않았다. 매 달 작은 사치를 누리고, 잔고 걱정으로 약속을 미루지 않고, 후배와 만나도 기분좋게 밥을 사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소비'와 '생활'과 같은 단어 언저리에 있었다. 동생의 말이 오래간 달라붙어 있었던 것은, 내가 ‘쓰기’라는 행위와 등가교환 하고 있는 것들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쓰기’와 바꾼 것은 경제적 여유 말고도 또 있었다. '쓰는 것의 부담감'이다. 쓰고 싶은 것을 써내며 해방감을 얻던 과거와 달리, 지금 나는 글을 뱉고 나면 마음이 무겁다. 2년 간 기자로 일하며 배운 것은 글의 이중의미가 가진 무서움이었다. 글은 '내 본 뜻은 이것이다'하고 각주를 달아주거나 말처럼 억양을 더해주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에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거나 적어도 눈살 찌푸리게 하기 쉬웠다.
처음, 나의 기사는 지뢰밭이었다. 아무리 제 스스로 검열을 하고 또 하더라도 말의 이중의미를 잡아내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없었다. 몇 번씩 생각지 못한 것에서 피드백을 받다보니, 나의 언어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겁이 나기도 했다. 내가 기사를 써서 돈을 벌고, 카드값을 내고, 매 달 따로 떼어 모은 돈으로 여행도 가는 사이, 내 이야기를 쓰고 저장해두는 일은 느려졌다. 짧은 글에도 자기 검열이 강해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글을 덜고 나면 몇 단어 남지 않아, 매번 쓰는 일을 그만두곤 했다.
위로인지 소설가 은희경 씨도 글이 너무 안써져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한다. 쓰려던 소설이 너무 안 풀리기에 고민하다, 쓸 수 없는 이 상황을 써보자 마음 먹었다고 했다. 그렇게 써낸 소설이 <태연한 인생>이다. 내 인생 소설로 꼽히는 소설이다.
반면 나는 안 써지는 글은 관두고, 읽는 즐거움을 누리기로 마음 먹었다. 나에게 '쓰기'는 '읽기'의 반면교사 같았다. '쓰기'가 어렵고 부담스러울수록 '읽기'는 즐거웠다. 쓰는 일은 이렇게 고되고 고민스러운데, 낮은 값으로 귀한 걸 내어주는 게 고마웠다. '읽기'는 내 마음을 나 대신 언어로 번역해주기도 하고, 답을 내기 어려운 것도 대신 곱씹어 고민해주곤 했다. 쓰는 게 왜 좋으냐 묻는다면 '감사히 읽게 하기 때문에'라고 답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열심히 기사를 써서 돈을 벌고, 열심히 책을 사 읽는다. '읽기'가 의미있게 느껴질 수록, 읽기위해 지불하는 '쓰기'도 가치있어 진다는 상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