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전거 순례 준비, 서울~ 다카마쓰 토요코인 호텔
나이 쉰. 다시 가슴 뛸 일이 있을까.
어느새 쉰 살이 넘었다. 실감 나지 않는 나이다. 하지만 나이를 실감하게 만드는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 해 봄 친구 S마저 갑자기 죽었다. 암에 걸렸다고 쓸쓸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그랬다. 학교를 졸업한 뒤 우리는 한동안 경기도 안산에 살며 함께 공장에 다녔다. 잔업이 없던 수요일 저녁마다 우리는 벌집 같은 자취방에서 만나 '학습'을 하고, 원곡동 마트에서 3천 원짜리 생닭을 사다 백숙을 끓여먹곤 했다.
S가 죽기 불과 열흘 전, 경주 외곽에 있는 자연치유원에서 그가 귀농해 살던 경남 거창으로 그를 데려다 줄 때 차 중에서 그가 말했다. "책임감 강한 체 해왔지만 아무것도 못했어. 정말 책임감이 강하다면 건강하게 살아남아야 하는데... " 불과 다섯 살밖에 안 된 늦둥이 아들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다.
그토록 자랑하던 고향 벌교에 그를 묻고 오던 차 안에서 누군가는 골프 이야기를 누군가는 주식투자와 자식 유학 보낸 이야기를 열띠게 늘어놓았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졌다.
그의 죽음은 내게도 충격이었다. 당장 무엇이라도 하자 싶었다. 시코쿠 순례길을 떠올리고는 쓸 엄두를 못 내던 안식월휴가를 신청했다. 일본의 네 개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에는 88개의 사찰을 도는 순례길이 있다고 했다. 1,200 Km. 걸어서 45일 이상 걸리는 먼 길. 자전거를 타고 돌면 한 달 안에 순례를 마칠 수 있겠다 싶었다.
어떻게 갈 수 있을지 막막했다. 자전거를 가지고 일본에 가 한 달 가까이 이국땅을 여행할 일. 잠은 어디서 자야 할지. 차라리 걷는 일이라면 홀가분하겠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언제나 제일 넘어서기 어려운 것은 내 마음
가끔 세검정에 있는 집에서 장충동 사무실까지 자전거로 출퇴근 하는 일도 내겐 벅찼다. 차도에 자동차들에 뒤섞여 그 정도를 달리는 일도 두렵고 타이어 펑크라도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지금은 용산으로 옮겨가 있지만 당시 강동구청 인근에 있던 '바이클리'에서 여행자를 위한 자전거 정비교실을 열고 있었다. 5주 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퇴근 후에 부리나케 강동구청을 향해 달려갔다.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내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 설레임.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설렘도 달뜬 흥분도 없이 그렇게 살아왔구나 싶었다.
교육은 타이어 펑크, 체인이 끊어졌을 때의 대처법, 브레이크와 기어 장력 조절, 자전거 분해와 조립, 그리고 항공 수하물로 발송하기 위해 포장하는 법 등 여행자에게 필요한 정보들로 알차게 짜여 있었다.
동기생들은 모두 6명이었다. MTB를 개조해 유럽의 고성 등 건축 순례 하겠다는 건축사, 네팔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해 놓고 티베트와 인도 네팔을 여행하겠다는 50대 초반의 사내, 6개월에 걸쳐 캐나다를 횡단하겠다는 서른일곱 살 학원강사, 제대 후 복학 전에 도쿄에 워킹홀리데이 일자리를 잡고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젊은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여행을 준비하다 바이클리 알게 되고 내친김에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 동남아 여행하겠다는 청년, 미국 횡단과 종단을 한 번에 하겠다며 매주 부산에서 올라오던 청년.
알고 보니 바이클리는 전 세계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거쳐가는 플랫폼이었다.
이른바 '철티비'로 불리는 내 생활자전거로는 장거리 여행이 힘들겠다 싶어 '제이미스 오로라' 여행용 자전거도 새로 장만했다. 여행용 자전거는 튼튼한 크로몰리 바디에 패니어를 걸 수 있는 랙이 부착돼 있고 고장이 적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여행지에서 대처가 쉽게 구조가 간단한 것이 특징이랄 수 있다. 도로에서 날렵하게 달리는 카본 자전거들이 훌쩍 1천만원이 넘는데 비하면 1백만원 가량으로 가격도 비교적 착했다.
여행 준비는 엉성하게 진행됐다.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일정 별로 진행 구간 등 세부 계획을 세우려고 했으나 일에 쫓겨 제대로 못 했다. 정보도 부족했다. 스마트폰에서 바로 구글맵 오프라인 지도를 저장하고 이것을 로커스라는 앱에 불러온 뒤 시코쿠 88개 사찰과 시코쿠 섬 야영장 GPS 좌표를 얹은 것 정도가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5월 21일. 드디어 떠나는 날이 밝았다. 한여름을 방불케 더운 날씨였다. 아침을 먹고 강동구청 앞 바이클리로 짐을 들고 지하철로 갔다. 전날 미리 자전거를 타고 가서 분해해 박스에 포장을 해두었기에 나머지 짐만 꾸려 랙 팩과 핸들바 백에 담았다. 먹을거리와 옷가지, 그리고 텐트 버너 침낭 등 캠핑장비들. 어깨가 빠지게 무거웠다.
자전거 박스에는 기내 반입이 어렵지 싶은 텐트 폴과 팩, 자전거 수리공구, 주머니칼 등을 함께 포장하니26Kg. 아시아나항공 수하물 기준 20kg을 훌쩍 넘겼다. 바이클리 '트랄라'님이 삼성동 터미널까지 승합차로 짐을 옮겨 주었다. 삼성동 공항터미널 항공사 직원은 초과된 무게를 힐끗 보더니 '네 잘 다녀오세요' 하며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짐을 부치고 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비행기는 한 시간 남짓 만에 시코쿠섬 위를 날았다. 창밖으로 언뜻 내려다보기에도 평지는 별로 없고 온통 산과 계곡의 굴곡들뿐이라 덜컥 겁이 났다. 꼼짝없이 심장을 동력으로 저 주름진 굴곡들을 이십여 일 달려야 하는 것이다.
여섯 시가 다 돼 다카마쓰(高松) 공항을 빠져나왔다. 이미 해가 기울고 있어 공항에서 자전거를 조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택시에 박스 채 싣고 예약해둔 다카마쓰 나카진초 토요코인 호텔까지 갔다. 낯선 거리에 퇴근길 시민들이 자전거 물결을 이루며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택시비 4천 엔.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자전거를 조립했다. 빗물받이와 렉을 몇 번 풀었다 조였다 하면서 헤맸다. 돌아갈 때는 어쩌나 걱정이 컸는데 뜻밖에도 호텔 프런트에서 자전거 포장용 빈 박스를 맡아주겠다고 했다. 섬을 한 바퀴 돌고난 뒤 서울로 돌아가는 전 날인 6월 13일 호텔 숙박을 예약해두길 잘 했다 싶었다. 조립을 마치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저녁 8시가 넘었다. 밥도 먹고 시운전도 해볼 겸 다카마쓰(高松) 시내를 달려보았다. 잘 구획된 자전거도로를 따라 다카마쓰 항구까지 달려가 밤바다를 보았다. 전철역과 항구가 이어진 번화한 동네, 초여름의 청량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벌써부터 향수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역사에 딸린 꽤 큰 마트에서 밤10시 폐점에 임박해 신선식품은 할인 판매하는 도시락, 맥주와 운행 중 먹을 초콜릿 등 간식거리와, 쌀 1kg을 샀다. 물가가 비싼지 싼 지 아직은 전혀 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