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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Nov 13. 2019

3. 걱정을 미리 당겨한들...

#3  도쿠시마 캠핑장 ~11번사찰 후지이테라(藤井寺)인근 요시노 여관

5시도 안 돼 눈이 떠졌다. 텐트 안에 누운 채 게으름을 피우다가 스트레칭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도쿠시마 공항 활주로가 내려다 보였다. 텐트를 해체하고 떡 라면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7시경 길을 나섰다. 여전히 패니어를 흔들리지 않게 랙에 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말도 서툰 이국의 거리, 가늠키 어려운 과정을 헤쳐갈 일이 조금 두렵고 또 설레었다. 간 밤에 라이터를 사러 왔던 로손에 들러. 물 2리터와 500ml 쵸코 우유를 샀다. 도쿄 같은 대도시는 다르겠지만 시코쿠의 어지간한 편의점들은 대개 과하다 싶게 넓은 주차장을 끼고 있었다. 조례나 법으로 정한 것인지, 어느 점포나 예외 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깨끗한 화장실, ATM, 복사기, 신문과 잡지 등이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편의점 주차장에서 운전석에 앉아 우적우적 혼자 도시락 밥을 먹는 모습들은 쓸쓸해 보였다. 


캠핑장에서 1번 절 료젠지(靈山寺)까지는 직선거리로 10km. 출근길 분주한 차들과 뒤섞여 달리다 대충 방향을 보고 한적한 동네 이면도로로 접어들었다. 지도에 표시된 대로 도로는 바다로 이어진 복잡한 하천들을 건너며 이어져 있었다.

  

나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자주 읽는 편이지만 불교신자라고는 할 수 없다. 산에서 절들을 지나칠 때면 법당에 들러 삼배도 한다. 그러나 종교에 기대어 나의 어떤 결핍을 채우려고 생각은 아직 없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돌이켜보니 군대에 있을 때 늘 종교행사'에 참여했다. 절반 이상은 절에 갔고 때로는 성당에도 교회에도 갔다. 욕설이 난무하는 난폭한 공간을 그때만이라도 피하고 싶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반야심경을 사경한 것도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달아나기 위해서였다. 제대한 뒤에도 피치 못하게 만나게 돠는 고통의 순간이면 새벽에 일어나 반야심경을 베껴썼다. 위로가 되었다. 반야심경은, 그 모든 것이 무상하고 부질없다고 말해주고 있잖은가.


헨로(遍路)라는 시코쿠섬 사찰순례길은 1200여 년 전 일본 진언종을 창시한 구카이(空海, 코우보오 대사弘法大師, 774~835)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코우보오 대사가 수행하고 순례한 곳을 따라 시코쿠 전역에 있는 88개의 절을 돌게 돼 있다. 

시코쿠 섬의 면적은 제주도의 열 배인 약 18,000 제곱킬로미터. 도보 순례 구간은 1,200Km쯤, 하루에 30~40Km씩 40일~50일 동안, 때로는 험한 산을 넘는 고된 길이 이어진다. 1번 사찰에서 88번 사찰까지 도쿠시마에서 시계방향으로 섬을 한 바퀴 돌게 되며, 반대방향으로 돌거나 구간별로 끊어서 도는 이들도 있고 자전거나 승용차 순례자도 많다고 한다.


일본 불교는 분위기도 문화도 우리나라와 많이 달랐다. 진언종은 문자로 된 경전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나라에 일반적인 현교(顯敎)와 구분되는 밀교(密敎)라고 한다. 구카이(空海)는 불교를 현밀이교(顯密二敎)로 구분하고 밀교를 불교의 최고 진리라 천명했다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밀교(密敎)가 생겨난 것은 인도에서 힌두교 등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불교의 어려운 경전을 이해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에 '옴마니 밧메훔' 같은 진언을 외우거나 마니차를 돌리거나, 오체투지를 하며 순례를 하는 일로도 부처의 경지를 깨닫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인데,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대목이다.


구카이(空海)는 불교에 귀의하기 전부터 이미 한문에 능했고, 당나라에 유학한 뒤로는 산스크리트어에도 능통했다 한다. 또 일본에서 문자로 쓰는 가타카나를 만들고 일본 최초의 사립학교라는 종예종지원((綜藝種智院)을 세워 불교와 유교를 가르치다 서기 855년에 입적한 뒤 '코우보오(弘法)대사"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시코쿠에서 만나는 절마다 부처를 모신 본당뿐만 아니라 코우보오 대사를 모신 대사당이 비슷한 규모로 자리 잡고 있었다. 


12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강을 건너고 여린 모들이 하늘거리는 논들을 지나 드디어 반도 역 근처에 있는 1번 절 료젠지(靈山寺)에 도착했다. 일주문을 지나 미즈야(水屋)에서 물을 떠 손과 입을 씻고 본당에 가서 향 한 촉을 사서 사른 뒤 반야심경을 독경을 하고 잠시 묵상을 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두 분 형님, 그리고 아주 친했던 친구들 가운데 최근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을 떠올리며 그들의 안식을 기원했다. 

일기장

주차장 앞에 있는 매점에 가서 납경장(納經帳, 2천엔)을 사서 납경을 받았다. 절마다 들러 붓글씨와 낙관으로  참배 확인을 받는 것을 납경이라고 한다. 300엔씩 돈을 내야 하기에 나는 하루에 한 번 정도 띄엄띄엄 납경을 받기로 했다. 한글 안내 지도가 있어 한 권 샀다(2천엔).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도보길과 자전거 길을 구분해 안내한 상세한 지도와 순례길 인근 숙소 연락처가 수록된 헨로보존협회에서 펴낸 가이드북 지도를 샀어야 했다.

매점 앞 주차장에 들어갈 때 못 본 폴더블 자전거가 놓여있었다. 작은 자전거와 단출한 차림이 부럽기도 했다. 꼭 필요한 것만 지니자면 짐은 한없이 가벼워질 수 있겠다 싶었다. 늘 과한 걱정이 짐을 늘린다. 짐 때문에 고통을 겪고 나서야 이것들이 내게 꼭 필요한 것이었나 깨닫게 된다.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은 철로변 공구박스 정도면 충분한데 불필요한 욕망이 가구를 늘리고 이 때문에 더 넓은 집을 사고 이들의 월부금을 갚느라 평생 고생한다는 소로우의 말이 떠올랐다. 

절 안에서 스쳐 지나쳤던 자전거 쫄바지를 입은 청년이 주인이었다. 타이완에서 왔다는 서른 살쯤 돼 보이는 그는 순례를 모두 마치고 대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했다. 막 길을 나서려는 나를 보면서 뭔가 해줄 말이 많은 표정이 되더니 그저 '조심하세요. 힘내세요' 인사만 남기고 도쿠시마 시내 방향으로 달려갔다. 



 2번 고쿠라쿠지(極楽寺)는 료젠지에서 1.4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임산부의 순산을 기원하는 절이라고 했다. 료젠지부터는 길모퉁이마다 순례길을 안내하는 헨로 스티커가 붙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고쿠라쿠지 매점에서 순례자들이 입는 흰 옷 가운데 소매 없는 '오이즈루'(2천엔)를 샀다. 료젠지에서 만났던 타이완 청년의 옷이 빛바래고 얼룩이 진 것이 생각났다. 새로 산 내 옷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다. 


대개 절 옆에는 묘원이 있었다. 연달아 사별을 겪으면서, 점점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외 없이 누구나 죽는다. 어린 시절에는죽음은 두려움이었고 좀 더 자란 뒤에는 슬픔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잘 죽어야겠다. 나이 든 뒤에  평생 지켜온 신념과 인간관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3번 곤센지(金泉寺)는 지도에 고쿠라쿠지에서 2.6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본당에 들렀다 나오려고 보니, 버스를 타고 온 단체 순례객들이 합창을 하듯 함께 반야심경을 독경하는 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왔다. 반야심경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문자로는 똑같이 260자 한자지만 그들이 독성하는 소리는 '방묘싱교...' 하는 식으로 달랐다. 순례자들은 더러 내게 어디서 왔느냐 묻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줄곧 자전거로 순례를 할 거냐며 대단하다, 조심해라. 응원의 말을 해주었다.


4번 다이니치지(大日寺)는 곤센지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곤센지를 나와 아직 충분히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버거운 언덕을 만나 꽤 당황했다. 이 오르막은 앞으로 펼쳐질 고행에 대한 암시이기도 했다.  5번 지조우지(地蔵寺)는 다이니치지에서 곧장 내리막길을 2km쯤 내려와 만나게 된다. 지옥의 중생들까지 다 구원하겠다는 원을 세운 지장보살의 이름과 나를 이 여행으로 나서게 한 친지들을 떠올렸다. 절 앞 길가에 무인 판매대가 있길래 아기사과 한 봉지(100엔) 귤 2개 (50엔)를 샀다.

6번 안라쿠지(安楽寺)는 12번 도로를 따라 5.3km가량 떨어져 있었다. 헨로미치 스티커는 도로 이면으로 난 마을 길을 가리키고 있어 따라다녔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적막한 마을을 묵언 수행하는 심정으로 달렸다.

7번 주라쿠지(十楽寺)는 안라쿠지에서 1.2Km 떨어져 있다. 일주문 옆에 대형 숙소가 마련돼 있어 순례자들이 이용할 수 있게 돼 있었다. 88개 사찰 어디나 초입에 미즈야(水屋)가 있어 먼저 손과 입을 씻고 본당과 대사당에 참례하게 돼 있었다. 손과 입. 욕망 때문에 죄업을 짓는 것도 스스로를 모욕하는 것도 손과 입이구나 싶었다. 자극은 눈으로도 오고 코로도 오겠지만 욕망이 조응하는 기관은 손과 입이겠지.


순례 초반에는 본당의 부처님께만 참배하고 대사당은 그냥 지나쳤다. 코우보오대사(弘法大師)가 여전히 낯설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7번 쥬라쿠지 앞 우동집에서 냉우동(500엔)을 먹었다. 자전거 순례자의 점심 요기로는 허전했다. 8번 쿠마타니지 (熊谷寺)는 4.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해 산 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길이 헷갈려 우왕좌왕하다가 트럭 운전자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절로 오르는 길을 찾았다. 중간에 일주문이 있길래, 금방인 줄 알았더니 일주문을 통과한 뒤에 다시 도로를 건너고 한참을 올라가서야 본당이 있었다.


본당에서 참배를 하고 내려오니 졸음이 쏟아졌다. 납경소 앞 벤치에 앉아 잠깐 졸고 있자니 일흔도 더 돼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몇 마디 하고 '순례하면 죽어서 좋은 데 간다, 나는 14번째다. 간밧데! (頑張って) 간밧데라는 말 알고 있나?' 이렇게 격려를 해주고 갔다. 묘하게 힘이 났다. 말투와 표정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닮아 있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은 일본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일제 치하에서 생계가 막연했던 친가 외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불과 아홉 살 네 살의 어머니를 데리고 일본에 건너가 공장에서 일하며 자식들을 길러냈다. 7남매의 장남이던 아버지는 아홉 살 때부터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릴 때 부모님은 종종 일본어로 대화를 하시곤 했다. 두 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하는 게 싫어서 나는 해찰을 부리곤 했다.


다시 힘을 내 달렸다. 7번 쥬라쿠지에서 마주쳤던 도보 순례자 (아루키 헨로步き遍路)가 잠깐 조는 사이에 나를 추월해서 앞에 걸어가고 있었다. 도보 순례자들의 속도가 짐작보다 상당히 빨랐다. 자전거 평지에서는 시속 25~30Km, 완만한 오르막에서는 10~15km 정도는 유지했다. 걷는 속도는 빨라야 6km  남짓일 텐데 이럴 수 있나 싶도록 빨랐다. 시코쿠 사찰 일주에 자전거로는 20일 내외, 걸어서는 40일 내외라고 할 때부터 내심 그 정도 차이밖에 안 나나? 싶었는데 걸어서는 최단거리로 산길을 넘기도 하고, 짐을 매단 자전거는 오르막에서 헐떡이며 도로를 따라 우회할 수밖에 없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9번 호린지 (法輪寺)는 구마니타지에서 2.4km 떨어져 있었다. 오후 4시가 다 돼 가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면서 마음이 바빠졌다. 절 앞에 탁발승이 있길래 100엔 동전을 시주했더니, 어디서 왔냐며 11번 절 앞에는 무료 숙소가 있으니 거기서 자면 될 거라고 알려주렀다. 또 13번 다이니치지(大日寺) 안주인이 한국 여자니 만나보라고 했다. 절에 안주인이라니? 무슨 말인가? 싶었다.


순례자들을 위한 무료 또는 아주 싸게 이용할 수 있는 숙소 젠콘야도(善根宿)가 곳곳에 있다는 글은 읽었지만 도대체 그런 것들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 정보가 없었다. 그렇다고 남의 나라에서 아무데서나 텐트를 치고 자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호텔에서 잘 수도 없어 조금 막연한 상태였다. 물론, 1~20km 인근에 캠핑장이 있다면 서슴없이 달려갈 생각이었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10번 기리하타지 (切幡寺)에 도달할 즈음 점점 불안한 마음이 가중되고 있었다. 해가 거의 저물어 가고 있었다. 기리하타지 아래 사하촌은 꽤 고풍스러운 목조주택들, 상점과 여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순례를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오르막길 입구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려던 순박한 표정의 사내가 거의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오는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냐? 오늘 어디서 잘 거냐? ' '한국에서 왔다. 어디서 잘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11번 절 앞에 무료로 잘 수 있는 숙소가 있고 강변에 '캼프'할 수 있는 곳도 있으니 심려 안 해도 된다.' '아, 그래요?' '그럼 또 만나자.' 그는 이런 '쿨한' 인사를 남기고 내리막길로 달려갔다.  이 사내는 뒤에 두 번 더 만나게 되는 야마시타(山下)상이다.


해가 기울고 있었기에 서둘러서 330개 계단을 밟고 본당에 올라가 참배를 했다. 계단에는 액막이로 놓은 하얀 동전들이 놓여있었다. 주로 1엔짜리 백동전들이다. 

11번 절 후지이데라(藤井寺)까지는 지도상으로는 10km 남짓 떨어져 있는데, 과연 다섯 시 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안 되면, 도중에 강변에 있다는 캠핑장을 찾아봐야겠다. 그런데 GPS에는 그 캠핑장이라는 것이 전혀 나와있지 않았다. 무슨 수로 찾아간단 말인가. 시내를 관통한 뒤 요시노 강을 건너 맞은편 산기슭에 있다는 절을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요시노 강(吉野川)을 건너기 전 야와타 (八幡)라는 동네에서 우체국을 만났다. "당신, 다른 선물은 아무것도 필요 없지만 엽서는 꼭 써 보내야 해요."  여행 경비를 건네주며 아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한국을 떠난 지 이틀밖에 안 지났지 서울의 가족들이 벌써 그리웠다. 그림엽서 다섯 장과 일반 엽서 다섯 장 등 열 장을 샀다. 우체국 직원은 땀범벅이 된 내가 안쓰러웠는지, 기념품이라며 '가제수건'을 한 장 건네 주었다. '우체국 계단'에 앉아 첫 엽서를 썼다.


요시노강은 아름다웠다. 갈대가 무성했고 석양에 반짝이는 강 위에서 플라이 낚시를 하는 태공들이 몇 사람 보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길게 뻗은 산맥들. 이 산들을 오르내려며 험한 길을 갈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이 무렵 핸드폰 배터리마저 모두 방전됐다. 이제 GPS도 없다. 1번 료젠지에서 산 한글판 지도책을 펼쳐보며 답답한 운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을 건넌 뒤 좌회전해서 시가지를 2,3Km쯤 지난 뒤 산 쪽으로 우회전하면 쉽게 11번 절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충분히 달렸다 싶어도 절을 안내하는 표지판은 없었다. 마침 여자 중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길래, 후지이데라를 아냐고 물어보니 모른단다. 중1, 2학년쯤 돼 보이는 귀여운 꼬마들이었다. 내가 당황스러워하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하고는 근처에 있는 슈퍼에 들어가 한참을 물어보고 나온다. 흰색 헬멧을 쓰고 펑퍼짐한 교복을 입은 모습이 여간 귀엽지들 않다. 잠시 뒤 헨로미찌 스티커를 발견했다. 캠핑할 수 있는 장소는 발견하지 못했다.


절에 도착하니  이미 다섯 시 반이 지났다. 헨로미찌 스티커를 따르다 마지막에는 자전거를 들고 산속으로 난 오솔길을 지나야 했다. 이때까지도 도보순례길과 자전거 갈 길이 다르다는 것도 미처 몰랐다.

납경은 포기하고 본당에 가서 향을 사르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납경소 노인에게 숙소를 문의하니 돈을 약간 지불해도 괜찮냐고 묻고는 오토바이로 앞장서서 숙소를 안내해주었다. 조용한 시골 동네 2층 건물 요시노 여관. 하룻밤 5천엔. 저녁은 다 떨어졌으니 나가서 먹고 오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체크인을 하고 요시노가와시 시내로 달려갔다.

어둠이 짙어진 거리에 가끔 박쥐들이 펄럭이며 날아다녔다. 192번 도로변에서 한 접시에 99엔, 회전 초밥집에서 양껏 저녁을 먹고 어두운 거리를 달려 여관으로 돌아왔다.

아래 층 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카메라, 자전거 전조등, 핸드폰을 모두 충전해 놓고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셨다. 순례 첫날이 이렇게 지나갔다. 하루에 무려 10개 사찰을 순례했다. 내일, 가장 험난 하다는 12번 쇼산지 (燒山寺)를 어떻게 갈 것인지. 걱정을 안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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