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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Dec 16. 2019

4.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걷는 사람들

#4  요시노가와  여관~ 히노 미네오 미코(日峰大神子) 공원시코

# 요시노가와  여관~도쿠시마 히노 미네오 미코(日峰大神子) 공원

11번 후지이 데라(藤井寺)~17번 이도지  주행거리 97.56km


절들은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만 문을 열고 대개 이 시간에만 순례자를 받는다. 여관 아침 식사는 여섯 시였다. 여전히 허둥대며 패니어와 랙 팩을 정리하고 여섯 시가 조금 넘어 식당에 내려갔다. 다른 순례객들은 이미 짐을 꾸려 여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미소 된장국과 베이컨, 계란 프라이, 약간의 채소, 맛없는 일본 김, 열빙어 두 마리. 일본의 '가정식 백반'이 이런 것이려니.  입맛이 없었으나  땀 흘릴 일을 생각해  남김없이 먹었다.


88개 사찰 가운데 가장 높고 험난한 산길 위에 있다는 12번 쇼산지 (焼山寺). 여관 종업원에게 지도를 펼치고 가는 길을 상의했다. "11번 후지이 데라에서 가장 단거리로 표시된 산길로 자전거를 가져갈 수 있나?"  터무니없는 소리 말라는 표정이다. "그러면, 자전거를 여기에 두고 걸어서 갔다 온 뒤 13번 다이니치로 가는 것은 어떨까?", " 왕복 12시간은 걸린다. 무리다.", "그러면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루트는 뭔가요?" "그냥, 도쿠시마 쪽으로 뻗은 192번 도로를 따라 10km쯤 가다가 우회전해서 산을 넘어 20번 도로를 따라 반대편에서 쇼산지로 오르는 게 제일 낫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 그러나 여기도 오르막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 "아... 그렇군요."  아무리 머리를 써도 정해진 만큼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어차피 편한 길을 가자고 시코쿠에 온 것은 아니잖은가.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다시 자전거 순례를 한다면 걸어서 산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뒤 자전거를 타고 다음 절로 가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인 것 같다. 해발 800미터 정도니 왕복 12시간은 과장이고, 너댓시간이면 족하지 않을까. 

어제 정신없이 들렀던 11번 후지이 데라(藤井寺)에 다시 빈 자전거로 올라가 참배를 했다. 상당한 높이라 어제 달린 1번부터 10번까지 절들이 있는 산들이 요시노 강 건너편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11번 절  본당 왼쪽 옆 산길로 쇼산지 가는 길 표지판이 있었다. 어제 10번 절 기리하타지 앞에서 만났던 사내를 다시 만났다.  낡은 자전거를 끌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그도 순례자인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아, 어제 만난 사람이구나. 어디서 잤어요." "요 아래 요시노 여관에서요. 캠핑장도 젠콘야도도 못 찾고 시간도 너무 늦어서... 쇼산지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걱정했는데 함께 가도 될까요" " 그래, 같이 갑시다."

그의 이름은 야마시타(山下), 나이는 56세, 이미 걸어서 세 번 88개 사찰 순례를 했고 자전거로 네 번째 순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여러 번 순례를 한 사람들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 이 길을 걷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여관에 내려와 짐을 매달 동안 그는 나를 기다려주었다. 동행이 있어 위안이 되었다. 그는 내게 오늘은 어디서 잘 거냐고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요. 일단은 17번 절까지 간 뒤에 바닷가 야영장까지 가는 게 목표인데...' ' 무리 아닐까'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마시타상은 어디서 잘 생각인가요?' '어디라도 좋아' 무심한 듯 중저음의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그 모습에서 문득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걷는다는 이들의 사연은 사람마다 다양할 것이다. '그러니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 둬!'라고 외치며 하염없이 걷던 '좀머 씨'와 같은 심정일까. 삶을 휘저어 놓곤 하는 외부의 어떤 힘에 대해 하염없이 걷는 것 말고는 달리 대처할 길이 없는 이들 말이다.


그의 자전거는 기어가 없었다.  오르막이 시작되자 그는 내게 20번 도로를 따라 가면 길을 잃을 염려가 없으니 먼저 가라고 했다. 헤어지는 게 서운해 함께 가자고 했지만 폐 끼치고 싶지 않다며 극구 사양해 헤어졌다. 터널을 지나  작은 산맥 뒤편으로  뻗은 하천을 따라 산골 마을들이 펼쳐져 있다. 하천을 끼고 열 시 반까지 줄곧 달렸다.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도보 순례자들이 점점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히로노 소학교 (広野小学校) 인근 마을에서 구멍가게에 들어가 선블록 (600엔) 생수 2리터(240엔)를 샀다. 산골이라 모든 게 비싸다. 지나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었다. 가장 고즈넉한 이 구간이었던 것 같다. 노란 모자를 쓴 초등학생들의 하교를 위해 동네 경찰과 교사 학부모들이 나와서 차량 통행도 없는 도로에서 무슨  대단한 작전이라도 펼치듯 하교지도를 하고 있었다. 도로공사를 하는 곳에는 꼭 양쪽에 두 사람이 교통 통제를 했다. 굴삭기 기사 한 명에 교통통제 인원은 두세 사람. 이 것이 매뉴얼을 중시하는 이들의 원칙인 모양이었다. 그런 일본도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피하지 못했다. 그 사고는 지진이나 쓰나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나라에도 허점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조세 고교 가미야마 분교(城西高等学校 神山分校) 부근에서 강을 건넌 뒤 본격 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어제 사 둔 밀감과 에너지바, 1.5리터가량의 물을 마셔야 했다. 쇼산지를 4km 정도 남겨둔 지점부터는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헉헉대며 올라오는 나를 두 사람이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본인 준과 스페인 사람 카를로스. 준은 일본을 오토바이로 일주하는 중에 시코쿠에서는 걸어서 45일 예정으로 88개 사찰 순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스페인 사람 카를로스는 시코쿠 순례를 위해 일본에 왔다고 했다. 그는 내 자전거에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나라 제냐?' '제이미스오로라, 여행용 자전거, 미국 메이커이지만 메이드 인 차이나' 'ㅎㅎㅎ 세상 모든 게 메이드 인 차이나 아니냐?'


두 사람은 내려오는 길이었다. '두 시간 더 올라가라' 카를로스가 하는 말을 들으니 다리에 힘에 쪽 빠지는 것 같았다. 경사가 너무 가팔라져 더 이상은 무리였다. 오백 미터쯤 더 오르다 해발 400m 지점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맨몸으로 걸어 올랐다. 짐 무게까지 40kg은 족히 나갈 자전거를 떼 놓자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쇼산지는 해발 790m 지점에 있다. 거의 북한산 백운대 높이다. 절 입구에 어른 대여섯 사람이 손을 맞잡아도 품기 벅찰 것 같은 거대한 삼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절 앞에서 갑자기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렸다. 여행길에서 내게 말을 거는 할아버지들의 말투와 태도가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비슷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한 뒤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절망적인 가난에도 낙담하지 않고 마루에 앉아 묵묵히 붓글씨를 쓰시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승상사당 하처심 (丞相祠堂何處尋) 금관성 외 백삼삼(錦官城外柏森森)... 장사영웅 루만금(長使英雄淚滿襟) 결국 천하를 통일하는데 실패한 제갈공명의 사당을 찾아 쓸쓸한 심경을 노래한 두보의 시를 되풀이해서 쓰시던 그 심정이 어떠셨을지. 우리 가족이 서울에 올라와 정착한 곳은 전차 종점이 있던 돈암동이었다. 창 밖으로 멀리 인수봉이 내다보이던 허름한 시멘트 블록 집.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제갈공명이며 조자룡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천하제일 청빈(天下第一 淸貧)'이니 '군자는 무소불위(無所不爲) 해야 한다'는 말씀을 국민학생인 나는 채 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장 끼니가 막연한 상황에서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 때문에 속을 끓이셨다. 가난은 군자 다운  마음이나 관념으로 극복하기에  너무 가혹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내게 '어떻게 그 세월을 헤쳐 나왔나 꿈만 같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래도 너희들 교육시키고 남들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살아낸 게 기적 같다.'

걷는 길과 차도가 수시로 갈라졌다 합쳐지며 산록에 있는 쇼산지까지 이어져 있었다. 시코쿠 미찌(四国の道) 를 안내하는 표지판을 순례를 마칠 때까지 지겹도록 만나게 된다. 절에 올라갔다가 자전거를 세워놓은 지점까지  내려오니 오후 1시. 눈물이 날 만큼 고된 길이었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내리막길을 한참 달렸다. 올라갈 때 고생한 걸 생각하면 내리막은  허무하게 짧았다.


쇼산지에서 13번 다이이치지(大日寺)까지는 27km. 과연 아침에 이 길을 달렸단 말인가 싶게 길었다. 강변길에서 야마시타 상을 다시 만났다. 그는 천진한 표정으로 길 안내 표지판을 보고 있었다. 피난길에 헤어진 형제라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너 12번 쇼산지 갔다 왔냐?' '야마시타상도?' '길이 엇갈렸나? 이제 다이이치가 바로 근처다. 너 참 빨리 달리는 것 같으니 네가 말한 대로 17번 이도지(井戸寺)까지 간 뒤에 캠프 할 수 있겠다.'


야마시타 상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강변으로 뻗은 21번 도로를 달려... 오후 3시경 13번 다이니치지(大日寺)에 도착했다. 이 절은 길가에 붙어 있어 자전거를 대고 사진을 찍기 어려웠다. 첫날 언덕 위에 있던 4번 사찰도 다이니 치지(大日寺)였다. 다이니치(大日)라는 말이 야마토(大和)나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대한(大韓)처럼 국가정체성을 강조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야마시타 상이 납경소에 들어가 뭔가 이야기를 했더니 납경을 해주던 노인이 나에게 들어와 보라고 했다. 한국사람이었다. 자신의 딸이 이 절의 주지 김묘선씨인데 지금은 절에 없다고... 자신은 한국에 살며 가끔 절에 와서 납경장에 글도 써주고 있다고 했다. 어렴풋이 전날 9번 절 호린지 앞에서 탁발승이 말해준 한국인 '옥상'(おくさん, 奥さん) 이 이 절 주지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싶었다.

김묘선 주지는 절 인근에 한국전통무용 강습소를 지어서 운영하기도 하고 한국과 일본에서 공연도 자주 하는 유명한 고전무용가라고 한다. 다이니치지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대규모 숙박시설도 있었다. 얼핏 듣기에 저녁과 아침밥을 포함해 1박에 7500엔쯤 한다고 했다.

80 넘었다는 김 선생은 이미 이 절을 거쳐간 한국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러는 아는 이름도 있었다. 한국 사람이 시코쿠 88 순례를 하다니 대단하다며 무료로 납경을 해주고  빵과 떡, 사탕이 들어 있는 간식꾸러미를 건네주며 지칠 때는 단 게 필요할 테니 순례 중에 먹으라고 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동포를 만나 반가웠다. 국가니 민족이니 넘어서야 한다는 말을 쉽게 많이 했는데, 위축된 상태로 낯선 공간을 여행하다가 한국사람을 만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으니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다이니치 지를 나오며 야마시타 상은 또 '다시 만나자'며 앞서 가라고 했다. 순례길이 어차피 한 길이니 또 만날 일이 있겠지... 하며 이번에도 범상하게 헤어졌다.


14번 절 죠라쿠지(常樂寺), 15번 고쿠분지(国分寺) 모두 다이니치지에서 2~3km 근방에 있었다. 고쿠분지에서 만난 단체 참배객 중 한 할아버지가 '너 어디서 왔냐? 한국에는 88개 절 순례가 없냐? 나는 부산에 가봤다. 날이 더우니 물을 자주 마시고 자주 쉬고 저녁 다섯 시까지만 달린 뒤에 꼭 멈춰서 쉬어야 한다. ' 이런 말을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아리가또', '간밧데!' 친절한 이들이 많다. 


고쿠분지에서 16번 간온지(観音寺)까지는 1.8km 작은 골목길 사이로 달려야 했다.  이날부터 오후 4시는 심리적인 제한선 같은 게 되었다. 4시부터는 새 절을 찾아가기보다 잠자리를 물색해야 한다. 첫날 엉겁결에 요시노 여관에서 자면서 깨달은 점이다. 실은, 바이클리 트랄라님도 이 점을 강조했었다.


16번 간온지(観音寺) 부터는 도쿠시마 시내 주택를 달려야 했다.오전에 달리던 호젓한 산길들을 떠올리면 웅성거리는 시가지와 전차와 밀려다니는 자동차. 밀집해 있는 주택들 모두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17번  이도지(井戸寺)에 저녁 5시경 도착했다.  목표로 삼은 히노미네오 미코(日峰大神子) 공원 해변 캠프장까지, GPS에서 가리키는 직선거리 9km 미터. 어두워지기 전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힘을 냈다. 한 시간쯤 달려 도쿠시마 시내 마트에서 연어 세 토막 (180엔) 우유 500ml 두 개 작은 팩 1개 김치 한통 (260엔)을 샀다. 저녁 6시가 되니 자전거 물결이 거리를 메웠다. 다들 바쁘게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틀 전에 묵었던 곳도 도쿠시마시였다. GPS가 가리키는 캠핑장을 향하다 보니 곳곳마다 바다와 강물이 막아섰다.

눈 앞에 보이는 저 다리를 넘어가면 최단거리로 캠핑장에 도달할 수 있겠다 싶어 다가갔으나 자동차 전용 다리였다. 또다시 5km가량을 시내 쪽으로 되돌아와  바닷가에 있다는 히노미네오미코(日峰大神子) 공원 캠핑장에 접근해보려고 노력했다.그러나 가는 곳마다 물길이 막아섰다. 속이 탔다. 저녁 7시가 다 돼  500미터쯤 되는 언덕을 하나 넘어서니 해변 공원이 나타났다. 해수욕장 앞 넓은 솔숲, 유스호스텔과 테니스코트가 있었다. 공을 네트 너머 넘길 때마다 '사요나라!, 아리 갓또!' 하면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새삼 나그네 여수가 도드라졌다.


해수욕장 솔숲에는 깨끗하게 관리된 조리대와 화염소(火焰所)라고 적힌 바베큐장이 있었다. 거의 모든 캠핑장에는 이렇게 바베큐장이 마련돼 있었다. 아예 캠핑이라는 말 자체가 야외에서 바비큐를 해 먹는 행위를 기리키는 게 아닐까 싶었다. 텐트를 친 사람들은 없고 서너 명씩 몰려와 고기를 구워 먹는 두어 팀이 보였다. 일단 텐트는 꺼내지 않고 조리대에서 밥을 짓고, 연어를 굽고, 즉석 육개장을 끓여 저녁을 먹었다. 옆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이곳에서 캠핑이 가능하냐?' 고 물었더니 '아마 안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대답. 게다가 ‘경찰이 자주 순찰을 하기 때문에 시내에 가서 호텔에서 자라’는조언까지 했다. 


밥을 먹고 나니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순찰차가 왔다. 좀 전 그 친구가 고자질한 게 아닐까 의심이 갔다. 순진한 인상의 경찰이 나를 향해 정확히 걸어오더니 오늘 어디서 잘 거냐?'라고 물었다. ' 88번 사찰 일주하고 있는데, 캠핑장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 '미안하지만 여기는 숙박을 할 수 없다. 밥을 지어먹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래? 나는 구글에서 캠핑이 가능하다고 해 찾아왔는데, 지금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침 6시 이전에 떠날 테니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되겠냐?' '나는 상관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 때문에 곤란하다.' 내가 계속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할 수 없다는 듯 '남들 눈에 뜨이지 않게 주의해주세요.' 이렇게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 

밤 9시. 완전히 날이 어두워지고 인적도 뜸해질 때까지는 텐트를 펼치지 않았다. 느긋한 마음으로 설거지도 하고,  커피도 타 마시고 해변가 산책도 했다. 밤 10시 인적이 드물어진 뒤 취사장 옆에 텐트를 펼쳤다. 일단 누워서 스트레칭을 하고  11시 넘어서 수돗가에서 코펠로 물을 끼얹으며 몸을 씻었다. GPS 포인트가 가리키는 캠핑장이 모두 야영이 가능한 곳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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