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었다. 거대한 산들이 연이어 부드럽게 능선을 잇고, 연둣빛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포근해 보이는 풍경 속에서.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고 나의 좌표가 그대로 드러나는 단순하고 정직한 그곳에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걸어보고 싶었다. 어느 날 보았던 캅카스 조지아의 사진 한 장은 이런 강렬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오랫동안 그날을 염원했다. 갈망은 커져가는데 혼자 떠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아 조바심이 나던 차에 마침 그곳으로 가는 패키지여행을 발견했고 주저 없이 참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떠나기까지의 과정은 수월치 않았다. 여행을 목전에 두고 난데없이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터졌다. 심지어는 갑작스러운 다리 근육통으로 인해 일주일 남짓을 걸을 수 없었다. 출발을 불과 열흘 앞둔 상황이었고 심리적, 신체적으로 모든 것이 너무나 불안정했다.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정리될지 가늠할 수도 없었지만, 고민 끝에 결국 합류를 결정했다. 시간이 없었다. 심리상담사와 재활의학과 주치의, 물리치료사가 한 팀처럼 내 컨디션을 살펴 주었다.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고서야 나는 떠났다. 그토록 바라던 그곳으로.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여행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난 후였다. 여행 속도가 너무 빨랐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방문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도착하여 둘러본 후 바삐 다음 장소로 향하는 스케줄이 반복되었다. 게다가 일정은 모두 성당과 수도원, 박물관뿐. 나는 걷고 머무는 여행을 선호하지만, 이것은 단체 여행이니 어쩔 수 없는 거라 이해하려 해도 여전히 의아한 점들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룸메이트에게 물었더니 ‘이건 관광이 아니니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응? 관광이 아니라고? 그럼, 이 여행은 뭘 하는 거지?’
이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여행 과정에는 역사와 문화, 종교, 신화가 넘쳐났다. 여행을 인솔하는 교수님은 조지아와 인접한 나라들의 정치적 관계를 설명하고 건물의 건축 시기, 성화·성물의 상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일행 중 몇몇은, 전시된 유물에 관해 종종 토론을 벌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문화탐방이었던 것. 하지만 방대한 세계사는 지금껏 내 관심 밖이었고 성경 또한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스·로마 신화조차 읽기 위해 애쓰다가 내용이 복잡하다며 결국 그만두어 버렸다. 그런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튀르키예,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넘나들며 역사, 종교적 장소들을 방문하는 인문학 여행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한국에서 이스탄불까지 11시간을 날아가고 트라브존을 거쳐 조지아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다니! 이것은 명백한 내 불찰이었다. 심지어 떠나기 전에 여행 설명회에도 참석해서 일정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담긴 두툼한 안내 책자까지 받아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나는 모든 사인을 간과했다. ‘그곳에 가고 싶다’라는 강력한 동기만이 작동하여 엄청난 오류를 일으키고 말았다.
어이없는 실책을 나무랄 겨를이 없었다. 어쨌든 여행은 계속될 테니까. 교수님은 열정적으로 강의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당장 대책이 필요했고 곧바로 익숙한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설명은 짧게라도 메모하고 최대한 자세하게 여행의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풍경을 조망하고 색감을 기억하고 내 시선을 끄는 대상의 이미지를 모아갔다. 미처 이해하지 못한 상징이 도처에 있었지만, 내용을 궁금해하며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걱정거리는 또 있었다. 엇비슷해 보이는 건물과 성화들, 심벌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킬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블로그에 일정을 정리했다. 다행히 많은 사진이 있었기에 빠짐없이 여정을 기록할 수 있었다.
끝없이 걷는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모든 것이 소진될 때까지 걸어서 무엇을 비워내고 싶었을까. 왜 그토록 간절했을까. 어쩌면 기도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스름해질 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아이가 겁에 질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듯, 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칠 수 없는 미세한 불안에서 벗어날 길을 찾고 있었는지도. 나는 꼭 있어야 할 순간에 가장 적절한 장소에 도착해 있었구나.
결과적으로 이 여행은 아주 특별한 선물이 되었다. 나와는 다른 관심사를 가진 이들을 만나 탐색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여행 후기를 쓰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단순히 성당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관련 기사를 찾아보다가 나중에는 영상으로 아르메니아 역사 강의까지 듣게 되었다. 강의를 들으며 그들의 민족적 시련과 고통스런 세월을 알게 되자 내가 보고 느꼈던 풍경과 색감이 다르게 다가왔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대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내년에는 그리스 여행을 가볼까 한다. 물론 이번엔 자발적 선택으로. 아주 오래전 입시를 준비하며 수없이 그렸던 역사, 신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조지아에서 걷지 못했던 아쉬움은 10월의 제주에서 은빛 억새 가득한 오름을 걷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평소 제주 여행을 할 때는 일정에 두어 군데씩 오름을 넣곤 했는데 이번엔 2박 3일 동안 원 없이 오름만을 걷는다. 완주할 수 있을지 내심 염려가 되지만 일단 떠나기로 했다. 이로써 조지아 여행이라는 버킷 리스트의 목록을 하나 지운 대신 몇 개의 새로운 목록이 더해졌다. 앞으로도 나의 여행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10여 일의 밤을 함께 보낸 내 룸메이트와 헤어질 때,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하다. 매일 바뀌는 객실 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헤매고 방에서 나올 때마다 엘리베이터 타는 방향을 헷갈리던 나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대부분의 밤마다 코골이를 했을 것이며 신박한 잠꼬대로 나 자신마저 깨워버리던 부산하고 시끄러운 밤들을 견뎌준 그녀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