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저녁 끼니를 생각한다. 맛있게 끓여 둔 소고기미역국이 아직 남아 있지만 오늘은 라면을 끓여볼까 싶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고 구매하는 일도 거의 없는데 그럼에도 지금 내 집에 라면이 떡하니 있는 것은 얼마 전 벌어진 계엄 사태 때문이다. 여느 때와 같이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그날,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더니 대통령이 등장해 계엄을 선포했다. 현실이 아닌 듯 멍해졌다가 다시 정신이 들자마자 어머니와 함께 사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개들 사료는 충분히 있니?” 어쩌자고 그 위중한 순간에 개 사료 생각이 먼저 난 걸까. 어머니가 들었다면 대번에 섭섭했을지 모르겠지만 위급한 순간, 먹거리는 동물에게도 중요하니까. 나라는 단 몇 시간 만에 지금껏 경험한 적 없던 대혼란에 빠져 버렸다. 다행히 곧 해제되긴 했어도 일상이 이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아니, 절대로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길고 불안했던 밤을 보내고 아침이 밝았다. 텔레비전에선 계엄과 관련한 특집 방송을 계속 내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먹거리를 살 수 없거나 택배가 배송을 멈춰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에 나 역시 여분의 개 사료나 쌀을 사서 쟁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 다만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가까운 편의점으로 걸어가 평소에는 관심 두지 않던 라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종류가 이렇게나 많았던가? 오랜만에 찬찬히 살펴보다가 농심에서 만든 매운맛 5개들이 한 묶음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라면을 식재료 수납장 선반에 올려놓고 문을 닫았다. 무언가 쌓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정에는 음식물도 포함되어 있어서 나는 적은 양의 재료를 사서 바로 먹고 소진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 내 집에 비상식량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갑자기 라면을 사두어야겠다는 생각은 통제할 수 없는 불안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이후에도 가끔씩 선반을 뒤적이다 라면이 보이면 혼란스러웠던 그 밤이 떠오른다. 마침, 오늘 내 눈에 뜨였으니 하나 끓여 없애야겠다. 점점 추위가 더해지는 저녁, 오늘도 여의도는 반짝이는 빛을 든 사람들로 가득하다. 추위와 배고픔에 고단하진 않을는지. 뜨끈한 국물 담은 라면 한 그릇 대접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냄비에 물을 붓는다.
(2024. 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