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동거

by 나무

반가운 친구 K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에서 만나 친구가 된 이후로 그녀와의 인연이 벌써 30년에 가깝다. 그간 사는 것이 바쁘기도 했고 이제는 SNS가 더 익숙해진 탓에 한동안 전화 연락이 뜸했던 참이다. 서로 가족의 안부까지 살뜰하게 챙기는 긴 인사를 나눈 후에야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이제야 이삿짐 정리를 마무리했어.”

그녀는 올해 초 이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짐 정리로 바쁘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벌써 두어 달 전이다. ‘얼마나 수고가 많았느냐’라는 나의 말에는 정말이지 진심이 가득 담겼다. 새집을 알아보고 계약하고 짐을 싸고, 풀고 난 후에 정리를 하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과정이 없음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K가 이번 이사를 하며 큰 성과를 하나 이뤘다고 한다. 오랫동안 끌고 다니던 짐을 1톤분은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버렸냐고도 묻지 않은 채 ‘잘했다’라는 칭찬을 건넸다. 이번에도 진심을 가득 담아서.

오래전 내가 이사를 준비할 때의 일이다. 포장 이사업체를 선정하느라 분주한 날이었다. 몇 군데 전화를 걸어 사전 상담을 받던 중 짐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짐의 양에 따라 이삿날 사용할 트럭의 크기를 정해야 했다. 남들 다 있는 가구며 가전만 있던 터라 ‘그다지 많지 않으니 중간 정도 크기의 트럭이면 될 것 같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며칠 후 현장 견적을 보러 온 직원은 집을 다 둘러보고 나서 더 큰 트럭으로 바꿔야 한다며 전화 상담과는 다른 견적서를 놓고 갔다. 마음 한편이 찜찜해지면서 ‘혹시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이삿날이 되어서야 말끔히 해소되었다. 세상에, 물건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몇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쓰지 않은, 심지어 저런 게 있었나 싶은 것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이사업체 직원들이 마구 끄집어내 바구니에 쓸어 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했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소란이 끝나는 대로 불필요한 짐들을 처분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새집으로 이사한 후 물건들이 수납장 속으로 모습을 싹 감춰버리자, 마음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비록 번거로운 상황을 외면하고자 하는 가짜 평화일지라도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얼마나 많은 물건이 필요할까? 소유에 대한 욕망을 버릴 수만 있다면 일상에선 눈길과 손길 닿는 곳에 있는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만 해도, 주방에는 실제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그릇이 상자째 보관되어 있고 신발장에도 샌들이나 부츠가 가득하지만 정작 신는 건 운동화 서너 켤레뿐이다. 옷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꼭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는 게 평소 신념인데도 이렇게나 물건이 넘쳐나고 있다. 안 그래도 소비가 일상화된 요즈음, 중국의 대형 온라인 쇼핑몰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다양한 제품을 엄청나게 싼 가격에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충동적으로 물건을 구매하게 된다는 지인들의 경험담이 넘쳐난다. 그중 어떤 것은, 상품의 질이 너무 낮아서 쓰지도 않은 채 버리기도 하지만 가격이 워낙 저렴하다 보니 개의치 않는단다. 실제로 며칠 전 어린이날쯤에 이 쇼핑몰에 관한 충격적인 기사를 보았다. 해당 사이트에서 판매 중인 어린이용 장난감에서 허용 기준치를 크게 웃도는 유해 물질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일찍 발견하여 회수 조치 된 점은 다행이긴 해도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품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환경 오염이라는 또 다른 위험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가 전 지구적 문제가 되어버렸다. 물론 나도 그중 일부에 일조하고 있다.

묵은 짐들을 청산하고 홀가분해졌다는 K에게 이번에는 내가 고해성사하듯 말했다. “사실 내 집에 있는 방 중 하나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단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가구까지 차곡차곡 쟁여놓은 그 방은 나에겐 열어선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닫힌 방문을 열고 두꺼운 먼지처럼 쌓인 시간의 흔적을 비워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공간을 과거가 아닌 현재로 채울 수 있을 테니까. 나의 고백에 그녀가 공감과 위로를 건넸다. 우리는 한동안, 곧 쓰레기가 될지도 모를 물건들을 잘 처리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일단 친구들을 모아 무료 나눔 장터를 열기로 했다. 그 기회에 방치되었던 것들이 새 주인을 찾아간다면 내 마음의 짐도 조금은 덜어질 듯하다. 개운하게 방의 짐을 비워낸 후엔 또 다른 물건으로 다시 채우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 반복하지 말아야지. 그날엔 줄어든 짐의 부피만큼 내 삶도 정갈해져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더불어 늘어만 가는 내 체중도 좀 더 가벼워진다면 더 좋고.


2024, <언제쯤 철이 들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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