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게 부끄럽다.
쓰리도록 미안하다.
뼈저리게 사과한다.
그때는 권투가 인기 스포츠였다.
장정구와 박종팔이
이름을 날리던 시절이었다.
권투 글러브를 갖춘 집이 제법 되었다.
옆집 동수네도 글러브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겨울 새벽에
동수네 마당에서 권투 시합을 한 일이 있다.
당시는 새벽 운동을 장려하던 때였다.
친구들끼리 놀이 삼아 벌인 경기에
나는 등 떠밀려 권투를 하게 되었다.
한 살 어린 경엽이랑 붙으라고 친구들이
다그쳤다.
나는 권투에 소질도 없었고
누구를 때리는 행동이 마뜩잖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경엽이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친구들은 나를 꼬드겼다.
경엽이는 한 손에만 끼고 하기로 했다고.
불공정하다며 나는 단호히 거절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경기를 받아들였다.
알량한 자존심을 위해 나와 타협한 것이다.
나는 양손에 글러브를 끼고
경엽이는 한 손에만 끼고 대결을 시작했다.
한 손이지만 경엽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더 많이 쳤다.
두 주먹을 한 주먹이 어찌 당하랴.
순간의 희열은 있었지만
경엽이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밀려드는 건
막을 길이 없었다.
경엽이와 대결하던 중에
구경하던 친구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라도 이기고 싶었냐'는 눈빛이었겠지만
내가 잘 친다고 경탄하는 눈길인 줄 알았다.
바보 영구가 울고 갈 일이다.
십 분 가량 지나서 대결은 끝났다.
승부가 나서가 아니고
다른 친구들에게 글러브를 넘겨야 했다.
그날 이후, 경엽이와 대결한 날은 없었다.
여름에 경엽이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이날 이때까지 경엽이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도 새벽 권투 대결은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가끔 옛일을 되새기는데 경엽이가 보였다.
그날의 대결도 또렷이 목도하였다.
비열한 내 모습은 더 선명하게 읽혔다.
불리한 조건의 친구를 이겨 보겠다고
무자비하게 주먹을 휘두른 겁쟁이.
이런 내 자취가 세상없이 수치스럽다.
속 얕은 짓을 한 내가 용서 안 된다.
중년이 된 경엽이를 만날 재간은 없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경엽이는
나라는 존재를 떠올리기나 할까?
나를 '비겁한 놈'이라고 마음에 두고 있겠지?
경엽이에게 가슴 깊이 사과하고 싶다.
내가 못났다고.
내가 모자랐다고.
경엽아!
내가 잘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