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특별한 생신, 칠순

엄마를 향한 축사를 곱씹으며

by namoomo


(남들은 자신이 쓴 글을 몇 번 정도 다시 읽어볼까? 갑자기 궁금하다. 읽고 또 읽어봐도) ‘나의 바람과는 다른 글쓰기’가 나의 마음을 더 복잡하고 심난하게 만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참된 글쓰기’란 생각과 마음을 깊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해소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믿었는데! 정리되지 않은 채로 성급하게 쏟아낸 단어들이 도리어 나를 향해 찌르듯 돌아왔다. 마음이 여전히 아프고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 실컷 흉보고 나서 뒤가 구린 듯 그렇게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나의 어두운 밑바닥을! 가벼운 사랑을, 그리고 낮은 인격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시리고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지난 글쓰기는 그렇게 부끄러운 흔적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 부족한 것을 스스로 알게 하였으니 조금은 고마운 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더 깊어질 것을 믿기에 부끄러운 내 모습도 나로 받아들일 마음을 먹는 중이다.


그 이후로 며칠 동안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몸을 움직여 땀 흘리는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도모하다 보니 일상이 마비되지는 않고 표면적으로는 회복된 듯하다. 꾸준히 운동하고 밥도 잘 차려먹었다. 아이들이 방학인 덕분이다. 아픈데도 돌봐야 할 존재들로 여길 땐 짐이었는데, 돌봄으로 돌본다고, 사실은 내가 그 돌봄의 혜택을 누리는 중이다. 관점을 바꾸면 어디서나 감사의 제목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릴 적 엄마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으며 자랐다. 이제는 엄마로부터 받은 유산, 그 교훈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불가능한 것도 없다는 믿음, 방법을 찾고 최선을 다하면 안 되는 것도 되게 할 수 있다는 엄마의 삶의 태도가 나에게는 절실하다. 나는 그런 무대뽀(*무뎃포)식의 전투적인 엄마가 싫었지만 실제로 엄마는 뭐든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엄마의 투쟁이 없었다면 나는 이 정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지 못했을지 모른다. 내가 추구하는 삶과 엄마의 삶의 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그 내면의 소원이 가족의 행복이고, 건강이고, 평화로움이라면 우리는 결국 같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서로 방법은 많이 다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나와는 정반대로) 항상 씩씩하고 도전적인 여성의 표본이었다. 가녀린 외모와는 다르게 대장부 기질이 있었고 (시민운동가이면서 남들 돕는 일에 앞장서느라 늘 바쁘신) 아빠를 대신해 가계를 책임지면서도 우리 세 자매를 키우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부족함이 없으셨던 강인한 여성이고 엄마였다. 외가에서는 장녀였고, 친가에서는 (제주에 사는 큰엄마를 대신해) 맏며느리 역할도 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중 어느 것도 쉬운 것은 없었을 것이란 걸, 이 나이를 먹고 나니 조금은 알겠다. 늘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었으나 그 안에 얼마나 큰 상처가 있는지 들여다보지 못했던 나는, 나이 든 엄마의 주름을 보며, 이제야 그 세월을 가늠해 본다. 나에게 늘 감사할 것을 찾으라던 엄마의 말은 자신을 위한 주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앙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고난의 시간도 ‘고난 주심이 은혜를 더하기 위함’이라는 성경의 구절을 믿었기 때문이었음을 안다. 그러던 엄마가 십수 년 전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을 때, 그 안에서 무언가 곪아버린 것은 아닌지, 겉으로 괜찮다 했던 세월의 많은 부분이 괜찮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처음으로 의심했었다. 다행히 엄마는 그 시간들도 잘 견디었고, 오히려 (그때만 해도 암진단금이 적지 않았을 때라) 보험금을 받아 온 가족이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날 수 있어 행복해했다. 대학생이었던 그때의 나는, 엄마의 아픔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엄마가 무엇을 견디며 사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늘 무리하는 것이 익숙한 엄마가 조금 싫었고 걱정이었을 뿐이다. 그 이후로 몇 년에 걸쳐 엄마는 자주 아프셨다. 호르몬과 관련한 많은 질병에 노출되었고 얼굴의 표정이 사라졌다. 여전히 말은 긍정적이고 일도 줄이지 않았지만, (줄일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온갖 자연치유와 면역관리에 관심을 두셨고 한의원, 병원 가리지 않고 치료에도 적극적이었다. 엄마는 늘 적극적으로 살았다. 나라면 주저앉아 될 대로 되라지 했을 것 같은 상황에도 부지런히 움직이며 삶을 그냥 내버려 둔 적이 없다. 그러나 그 결과에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늘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함부로 좌절하지 않았고 쉽게 원망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그렇게 살아와서인지 결혼 후에 어쩌다 힘듦을 토로하는 딸에게 공감하고 위로하는 방법은 모르는 그녀였다. 그리하여 긍정을 강요당하는 나는 힘들기도 했다. 그저 공감받고 싶었고 격려해 주길 바라며 여느 엄마들처럼 살갑게 안아주고 토닥여주길 바란 적도 있다. 나에게 엄마는 그런 의미였는데, 엄마에게 엄마는 한없는 희생과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는 강인한 모습이었으리라… 나의 엄마는 멀리서 떨어져 바라볼수록 더 멋지고 훌륭한 엄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독립된 자아 대 자아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듯하다.


1년 전부터 엄마는 오랜 세월 꾸려온 뷔페식당을 정리하고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다. 분명 헛헛함이 있으련만 그런 내색은 하신 적이 없다. 서예가와 문인화 작가로 활동하시는 아빠를 따라 문인화를 배우고 계신데 그 즐거움에 집중하고 과정을 공유하신다. 97세의 노모를 모시면서 집안을 돌보고 더하여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는 엄마의 모습은 여전히 전투적이다. 새벽 2시까지 붓을 놓지 않을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엄마의 지나침이 늘 걱정인데, ‘좋아서 한다’는 말에 늘 할 말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조금씩 표정이 되살아나는 엄마의 얼굴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엄마의 70 평생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에도 아직 소녀감성을 품고 사는 엄마를 보며, 마치 시 같고 노래 같은 문자메시지를 적어 보내는 엄마를 보며, 사랑받아 마땅한 그녀를 보며 나의 마음이 짠해지는 것은, 진정한 사랑과 믿음의 본이 되어 준 엄마를 향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 그리고 애달픔이다.


지난 주말, 나는 전철을 타고 아이들을 이끌고 엄마의 칠순 생신파티 장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남편에게 솟구치던 원망의 마음이 조금 내려앉아 섭섭함도 잦아들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 그럴 수 있지.’ -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까닭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온을 위한 것이었구나! 깨달았다. 그는 나를 두둔해주지 않았어도 나는 가서 그를 두둔할 것이었고.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행여나 부모님 마음에 걱정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남편을 위한 마음이 아니니 그가 고마워하기를 바랄 필요도 없어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언니가 파티장소로 섭외한 이탈리안레스토랑은 여러모로 완벽했다. 따뜻한 조명과 분위기는 물론 음식도 맛있었다. 맛에 있어서는 늘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엄마의 취향에도 딱 맞아 파티 주인공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언니의 세심한 준비로 테이블마다 꽃장식이 있었고 참석자들은 모두 왕관 같은 머리띠를 하고 코스로 준비되는 정갈한 음식들을 즐겼다. 배경으로 아빠의 서예/문인화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내가 만들어간 캘리그라피 현수막도 한 편을 차지했다. 엄마의 사진이 합성된 그 현수막을 포토존으로 하여 사진도 찍었다. 무엇보다 엄마의 살아온 날들을 축복하고 감사해하는 참석자들의 축사가 감동적이었다. 엄마의 조카(내 사촌동생들)들과 손주들의 축가도 멋졌다. 다들 즐거워하고 나 역시 즐거웠다. 다만 내 남편의 부재가 계속 마음에 밟혔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앉아있으니 남편 생각이 절로 났다. 지금쯤 출발해서 운전 중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메시지를 남겼다.


”맛있는 음식을 같이 못 먹어서 아쉽네. 조심히 올라오세요. “


이 정도면 화해의 제스처로 충분하지 않나? 아니면 말고, 내 마음은 전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진심이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랐다. ‘늦게라도 오면 좋겠다. 사진이라도 같이 찍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마지막에 등장한 남편과 함께 단체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오랜 운전으로 피곤한지 아주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본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어서 스스로도 다행이라 여기지 않았을까! - 그렇게 내가 편한쪽으로 생각하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여전히 냉랭한 상태였지만, 더 이상 남편에게 서운하거나 섭섭하지는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우린 여전히 너무도 다른 사람이고 어쩌면 영원히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가치와 관점을 가진 아주 다른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산다. 엄마와 내(딸)가 다른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더 많은 부분에서 다른 남편과 아내 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하기로 작정하였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샘처럼 솟아나는 사랑이 아니라면 우물 파듯 계속 파낼 것이다. 나는 엄마가 알려준 대로(그녀의 삶을 통해 보여준대로) 그렇게 끈기 있게 내 사랑을 퍼 올릴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더 깊어질 것이고, 내 엄마를 더 닮아갈 것이다. 엄마의 70세 생신파티에서 나눈 엄마를 향한 감사와 축복의 인사를 곱씹어본다. 나는 결코 엄마와 같을 수는 없지만 엄마의 모습에서 배울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런 내가 되기 위해 나는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다듬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기에 더하여, 때로 우리가 양가감정을 느낀다면 그중 남는 감정은 내가 선택한 감정일지 모른다. 내가 남긴 감정은 남고 버리기로 작정한 감정은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다. 무엇을 남길 것인지 선택하려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성급함’은 좀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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