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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31. 2019

교회 오빠. 그리고 첫사랑

오겡끼데스까. 30년 만에 온 편지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신'이라 불리우는 것은 분명 있지만, 그것이 보통의 종교들에서 말하는 그런 '인격신'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것은 항상 내 삶의 미스터리였던 '신'이란 것의 정체를 나름 오래 추적해서 내린 나만의 결론이었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어릴 적 오래도록 교회를 다녔었다. 부모님은 무신론자셨지만 기독교 신자였던 고모들이 우리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데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매주 일요일을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사실 한국의 교회 개념이 '공동체'에 가깝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교회란 그저 '또 다른 즐겁고 신나는 일이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성경 공부는 늘 뒷전이고 교회에 '놀러 가는' 것이다. 그곳은 학교와는 다른 친구들이 기다리는 곳이었고, 끝없는 잔치가 열리는 곳이었으며, 무엇보다 '멋진 교회 오빠들'이 기다리는 곳이었기에!
 
 지방의 꽤 큰 도시에 살았던 내가 다니던 교회는 시내 중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큰 교회였다. 성가대 단원이기도 했던 나는 언제나 소프라노 파트를 맡았었고, 늘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했던 나는 어린이부 대표기도를 자주 도맡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유년시절의 많은 기억들은 교회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두 명의 교회 오빠가 있었다. 
 
한 오빠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오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오겡끼데스까, 열풍을 몰고 왔던 영화 '러브레터'


 나는 중3이었고 오빠들은 고등학생이었다. 
둘의 캐릭터는 극명하게 달랐다. 한 명은 매끈한 얼굴에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고 늘 자신감이 넘치던 '쾌남'이었고, 다른 한 명은 뽀얀 얼굴에 금테 안경을 끼고 있던 말 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던 '소년'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오빠는? 당연히 '소년'이었다. 

 교회에 내가 짧은 치마를 입고 갈 때마다, 내가 친구들과 '롤러장'에 다녀왔다는 말을 전해 들을 때마다 "긴치마 입고 다녀라" "그런 데는 너 같은 애가 가는 데가 아니야"라고 꼭! 한 마디씩 해야 직성이 풀리던 쾌남은 그 당시의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굉장히 '꼰대'스러웠기에. 
하지만 소년 오빠는 달랐다. 언제나 말없이 있었기에 눈도 사실 몇 번 마주쳐 본 적이 없을 만큼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그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미소만 지었었다. 그 수줍음이 좋았다.


 성탄절 성가 연습을 할 때, 오빠가 조금이라도 내 옆에 가까이 앉기라도 한 날에는 떨리는 마음으로 더 정성껏 노래를 불렀다. 오빠에게 더 고운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그리고 다가온 발렌타인 데이. 친구들이 '너는 누구에게 초콜릿을 줄 거냐'라고 물을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은 하나, 당연히 나의 소년 오빠였다. 그 오빠를 위해 나는 매우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었다.

그 당시 '테이프 녹음' 선물만큼이나 감성 터지던 '노트 선물'이었다. 
 
 예쁜 공책을 하나 준비해서, 그 공책 전체를 오로지 나의 그림과 꾸미기와 손편지들 시들로만 채워서 주는 것. 오빠의 이름을 기하학적 패턴 무늬로 디자인하여 크게 새기기도 했고, 오빠의 모습을 그려 넣기도 했고 그럴듯해 보이는 시를 멋진 손글씨로 적어 넣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장 맛있는 제과점에서 가장 멋진 초콜릿 상자를 샀다. 직접 주지는 못하고 우편으로 보냈다.
 

손편지는 아니었지만, 30년 후 오빠도 내게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오빠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했다. 잘 받았는지 기뻤는지 궁금했기에. 오빠는 그 수줍은 웃음으로 선물이 너무 예쁘다고 초콜릿이 맛있다고 정말 놀랬다는 듯 말하며 부끄러워하였다. 오빠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행복하게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오빠가 지금껏 '이 정도의 고퀄리티 선물'을 여자에게 받아본 적이 없었고, 내가 그 최초?이며, 그렇기에 더욱 기뻐했다는 것을.

 
나는 '내 인생에 둘도 없는 공책'을 오빠에게 준 것을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오빠를 보지 못했다. 나는 중학교를 끝으로 '스스로 교회를 끊었기' 때문에. 우리를 그토록 사랑한다면서,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그것은 죄악이다, 나만을 섬겨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이란 존재는 내게 너무 큰 모순덩어리였고 그냥 '속좁은 인격'처럼만 느껴졌기에.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아스라이 사라졌던 기억이었다. 근데 그 기억을 먼저 소환한 것은 '오빠'였다. 
 

 나는 한국에 있는 양대 포탈의 메일을 진작에 다 처분했었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의 연락처는 아예 저장되어 있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지만, 유일하게 오래 쓰고 있는 지메일 계정 주소를 오빠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 잠깐 페북을 했을 때 알게 된 것이었다. 


'오겡끼 데스까' 나는 잘 지내요


 그렇게 불과 몇 개월 전인 지난겨울, 불현듯 나의 그 '소년'에게 이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제목은 '잘 지내시나요?'. 내가 한참 힘들어하던 시기였기에 신기하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제목에 왜 존대를 썼냐 물었더니 '영화 러브레터를 오마쥬 해보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사실 고백하자면 교회 오빠가 내 첫사랑은 아니었다. 조숙했던 나는 이미 초등학교 때 첫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오빠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오빠가 내 첫사랑이라고 믿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더 로맨틱하니까.
 
굳이 옛날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진 않다. 이미 '소멸된 인연'이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 내게 소중한 사람들은 '앞으로 함께 갈 사람들' 내 옆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다가온 인연들이기에. 그러나 다시 만나야 할 사람은 꼭 다시 만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가을, 나는 다시 그 첫 마음을 연다. 세상을 향해. 노트를 만들던 그 날들처럼. 



영화 '러브레터' OST, < A Winter Story > 

음원출처 : http://bitly.kr/3d1fVPS



* 메인 그림 출처 : https://tuney.kr/tzAA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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