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출발이 다르다는 것
남편과 나는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와 문화가 달라서라기 보다는, 너무도 다른 서로의 빛깔 때문이기도 했고 여전히 녹아들 수 없는 서로의 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흥미를 느끼는 소재나 지점이 확연히 다를 뿐 아니라 중요한 가치와 생각의 기준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 무언가를 나누기 위해 말문을 떼는 순간 "A는 B가 아니므로 C가 될 수 없다" 같은 '논리 강의'를 들어야 하는 것. 나는 서둘러 입을 닫아 버리는 쪽을 택했었다.
이성에 근거하지 않는 모든 것에 곧바로 태클을 거는 것, 어떤 얘기를 하건 책과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무참히 의견을 묵살하는 것, 직관에 의거한 생각을 철저하게 불신하는 것, 반드시 합리적인 종결을 맺으려 하는 것, 아주 작은 소재라도 맞고 틀림을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것, 그 논리적인 말의 향연이 무엇보다 나의 머리를 아프게 하기 때문이었다.
남편도 내게 말한다. 자기도 나와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고. 사실과 지식에 근거하여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경청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남편의 사고가 나와 충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남편은 '틀 안에서' 사고하고 나는 '틀 밖에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기존의 지식과 관습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나는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기 때문이다. 증명된 권위와 보편적 지식 그리고 정설. 그것들로부터조차 열려있는 내 방식을 남편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얘기를 나누건 둘 사이의 간극은 좁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다시 대화라는 것에 진지하게 임하게 된다. 가족이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밥을 먹는 순간이 그러하다.
아이는 아빠에게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었다. 다독가인 남편은 아이의 어떤 질문에도 '수려한 지식'에 근거한 답을 척척 내놓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는 밥을 먹으며 궁금했던 것들을 쫑알쫑알 아빠에게 질문하곤 한다. 그러면 엄마인 나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남편의 대답이 한쪽에 치우쳐 있다고 판단될 때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대답이 지나치게 지식에 근거한 '딱딱한 대답'이라고 판단될 때는 '상상력을 동원한 열린 대답'으로서 질문을 던져주고,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 사고나 제국주의적 관점이 개입되었다고 판단될 때는 한국인이나 비유럽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관점으로 다시 얘기를 해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화는 '서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나는 생각이 깊어진다. 밥을 다 먹고 밥상을 치우면서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과 그대로 두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며칠 전의 저녁과 오늘 저녁으로 이어진 우리의 식탁머리 대화는, 부모로서의 책임에 대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
두 대화 모두, 남편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치우진 관점'을 아이에게 심어준 것이었고, 그것은 프랑스인만이 아닌 한국인이기도 한 아이에 대한 배려와 책임이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의 대화 주제는 '인쇄술'이었고 오늘의 대화 주제는 '원자폭탄과 2차 세계대전'이었다. 모두 아이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 내가 아이 아빠에게 '균형 잡힌 관점과 보다 폭넓은 시선'을 담아 줄 것을 말했었을까? 아이가 한국인이기도 하다는 것에 그 단서가 있다.
인쇄술에서는 구텐베르크 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직지'를 함께 얘기해주어야 맞다고 생각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진주만 전쟁과 히로시마만 언급할 게 아니라 일본의 식민 사실에 대해 언급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정작 그 이야기들은 제쳐두고 아이에게 '서방 국가 기준'에 의한 '역사의 나열' 그러한 지식과 정보를 늘어놓기에 바빴다. 왜 그랬을까?
남편은 철저하게 '유럽인의 기준에서' 사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인이기도 한 우리 아이에게 프랑스인의 관점만 건네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양 극의 문화에서 태어난 아이인 만큼, 완전하게 다른 관점일 수밖에 없는 양 쪽 모두를 말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아이에 대한 도리이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의 사고의 출발이 거기인 만큼 그것을 전하는 방식에 있어 '유럽 중심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구텐베르크보다 100년이 앞선 '직지'라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존재하고 그것은 한국인들이 만든 거라는 얘기를 같이 해줘야 하지 않을까?" "직지는 만든 방식이 달라서 함께 논할 수 없어" "뭐가 얼마나 다른지는 모르지만 세계는 직지의 존재 자체를 숨기고 있잖아. 왜 그것을 숨겨야 할까?" "직지는 구텐베르크의 기술과 다른 것이라 논외라고" "그게 왜 프랑스에 있는 줄은 알아? 너네가 훔쳐 간 거잖아. 중요하지도 않은데 왜 훔쳐갔을까?"
"2차 세계대전 얘기를 하는데 왜 일본 얘기는 쏙 빼?" "그렇지, 일본도 있긴 했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체가 끔찍한 세월을 보냈어. 얼마나 잔악했는 줄 알아?" "독일이 더 심했어" "일본의 만행에 대해 아는 게 있어? 유럽인들 아무런 정보도 없잖아. 배운 적도 없잖아. 하지만 아이에게는 일본 얘기를 함께 해줘야지. 한국인들이 당한 고통이야" "당신은 너무 한국적 프로파간다에 매여있어" "아니, 난 그 어떤 프로파간다에도 관심 없어. 한쪽에 치우친 시선만을 아이에게 전해주어서는 안 된다고 여길뿐이야"
오늘도 우리의 식탁머리 대화는 총체적 난국이다. 그럼에도 아이가, 이 난국을 뚫고 균형 잡힌 시선을 갖기를 소망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프랑스 한복판에서, 한국어를 모르고 한국의 역사적 고통에 감정 이입이 안 되는 프랑스 남편과의 오늘을 잘 보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아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정신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모든 그림 : Maurice Denis
'프랑스 제국'을 위한 정치적 무기, 예술
프랑스는 '문화와 예술의 나라'라는 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