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이상한 똘레랑스 2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이가 아랫배 밑 부분에 커다란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박힌 채로 집에 온 적이 있었다. 아이는 아직 4살이었고 빨갛게 부어오른 이빨 자국이 너무 컸었기에 나는 거의 까무러쳤었다. 같은 반에 있던 덩치 큰 남자아이가 그렇게 했다고 했다. 더구나 우리 아이는 생일이 늦어 반에서 '가장 어리고 작은' 아이였다.
다음날 학교 선생님께 얘기를 드리니 선생님은 '산만한 아이가 하나 있는데 그 아이가 좀 말썽을 부린다. 죄송하게 되었네요'로 얘기를 끝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이가 어리지만 그래도 잘못한 아이가 우리 아이에게 사과라도 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내게,
"아무리 잘못한 아이라도 그 아이의 '인권'이 있기 때문에 그 아이가 누군지는 당연히 말해줄 수 없고, 그러한 절차를 우리는 따로 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아. 가해자 아이의 인권. 그래. 참 '무언가 고고하게 느껴지던' 그 개념 앞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채 집에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남편에게 물었다. '아무리 그 아이의 인권이 중요하다지만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그 아이에게 얘기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하니 남편은 '아이들끼리 놀다 보면 그런 일도 생기는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하여 다음날 어머님과 시누이에게 모두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이 '아이들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다였다. 물론 아이들끼리 놀다 보면 그럴 수 있지.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잘못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해주고 반성하게 하는 것'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스 학교는 '아이들끼리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가 아주 심각하지 않은 이상 한국처럼 '양쪽 부모님의 대면'이나 잘못한 아이의 '사과 절차' 같은 것을 밟지 않고 '웬만하면 그냥 다 넘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똘레랑스'라는 개념과 닿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잘못한 아이의 인권과 입장도 존중해주어야 하므로,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아이들이 그럴 수 있다'며 넘어가는 것. 아이의 앞의 두 가지 사례에서, 학교와 시댁 가족들, 남편, 주위의 프랑스 엄마들이 보인 반응들이 이거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되었다. 그 관점으로 바라보니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갈등의 문제가 '관용의 법칙 안에서' 해결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불관용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이,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도리가 아닐까? 잘못한 당사자에게 '진정한 반성'을 요구하지 않는 개념 아래서라면 부당한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위험을 낳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상황을 아이가 다시 8살 때 맞닥뜨리게 되었다. 갈등의 상대는 바로 학교 담임 선생님이었다. 새 학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이는 펑펑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 선생님이 자신을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엄청 크게 소리를 지르며 혼냈다고 하였다. 이상하였다. 우리 아이는 학교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학교와 학습을 잘 따라가던 '좋은 학생'이었고 학급의 반장이기도 하였다. 근데 그 이유가 더더욱 이상하였다.
선생님이 여러 번 설명해준 어떤 문제를 단 한 명 자기만 못 알아들었고 그래서 선생님이 화가 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매일같이 '소리 지르는 선생님'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그것을 견딜 수 없던 우리 아이는 그 순간 '모든 감각을 닫아버렸었다'는 것을 말이다. 마음을 숨길 수 없던 아이의 불만이 얼굴로 드러났을 테고 선생님은 그런 아이를 보며 더 화를 냈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아침부터 오후 4시 반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엄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이 선생님은 히스테릭에 가까울 만큼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었고 학습 결과 또한 완벽히 도달하기를 요구하는 불필요하게 엄한 선생님이었다. 소음에 민감하고 결이 예민한 아이는 선생님의 방식을 견딜 수 없었고, 학기 초에 아이에게 준 '모멸감'으로 아이 마음속에서 선생님은 이미 '아웃'이 된 상태였다. 새 학기에 아이는 가끔 울면서 하교를 했고 학교를 바꿔달라고 내게 자주 말하였다.
나는 아이가 느끼는 압박감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방식은 당연히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켜보는 척하다가 연말이 되기 전에 그냥 조용히 사립학교로 바꿔야지 생각했었다. 프랑스 사립학교들 학비는 한국처럼 부담스럽지 않으며 그냥 등록만 하면 바로 옮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선생님을 만나서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할 때마다 "괜찮다. 아이가 새 학기라 그럴 수 있다. 다른 아이들도 다 별 말 없지 않으냐" 또는 "피한다고 능사는 아니다. 아이는 강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잘 모르고 선생님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말들을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몇몇 프랑스 엄마들에게도 조언을 구해보았다. 그들의 반응 또한 남편과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더구나 공부를 잘 가르쳐 중학교 준비를 잘해주기에 엄마들 사이에 만족도가 높다. 중학교 가면 더 이상한 선생님을 만날 수도 있는데 '강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듯 아이의 상황에 대해 조언을 구할 때마다 돌아오는 말은 "선생님의 철학을 믿고 존중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더 지켜봐라"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관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행동'과 그것으로 '정신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아이'라는 명제가 내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충분히 힘들어했다. 그리고 내게 좋은 선생님은 아이가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생님이었다.
모두는 나에게 '신중할 것을' 말했다. 하지만 내게 그들의 애매한 태도는 '부당한 행동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이상한 논리'로 보였다. 그랬다. 그들은 정작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아이들 문제에서는 언제나, '아이의 마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자연에 대한 '관용'을 실천하지 않는 프랑스
'이성의 감옥'에 갇힌 프랑스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