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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Apr 19. 2020

4월 이야기, 빠스칼의 봄 정원  


 원래가 그 어떤 기계와도 친하지 않은 데다가 기계치인지라, 기계로 된 물품의 오류를 접할 때면 서류 상의 글자들이 나의 인지 능력과 따로 놀 때와 마찬가지로 바로 멘탈 붕괴가 일어난다. 그것은 내게 기계가 갖는 이미지 때문이기도 한데, 나에게는 트라우마와 같은 '수학'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인 듯도 하다. 여하튼 내가 기계를 만지면 그 기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자주 고장이 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본능적으로 기계를 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하물며 컴퓨터라는 복잡다단하고 귀한 기계는 오죽할까. 

 지난 주말부터 컴퓨터에 이상 신호가 왔었다. 자꾸만 동작 멈춤이 반복되는 불길한 현상을 지나 몇 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게 하더니 기어이 계속되는 강제 종료를 해야 하는 참담함. 올리고 싶던 글을 결국 올리지 못한 채 잠들었던 지난 며칠. 컴퓨터 수리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현재 상황 속에서 글을 쓰고 싶은데 쓸 수 없는 황망함 앞에 내 속은 타 들어갔다. 다른 건 다 몰라도, 혹시라도 컴퓨터가 먹통이 돼버려 글을 한동안 못 쓸 수도 있다 생각하니 아찔했다. 부디 그런 참사는 나를 비껴가기를 눈을 질끈 감으며 바랬었건만.  


뒷집 빠스칼이 숲 속에 쌓아놓은 장작 더미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한국 친구가 원격으로 8시간을 넘게 컴퓨터를 봐주었다. 계속된 동작 멈춤으로 무한한 인내가 필요했건만 한마디 불평 없이 봐준 친구에게 너무 고마웠다. 이튿날부터 컴퓨터가 월등히 좋아졌지만 여전히 하드 상의 문제가 있는지 가끔 되다 안되다를 반복한다. 연식이 좀 되기도 했지만 사실 찔리기도 하였다. 먹통 된 지 사흘째 되던 새벽, 파란 동그라미만 뱅글뱅글 도는 동작그만을 5시간 넘게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던 나는 그만, 두 손으로 컴퓨터를 쾅! 내려쳤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니가 나한테 그러면 안되지 같은 심정이었달까. 그만큼 컴퓨터가 내게 가지는 의미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이곳에서, 어쩌면 이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이 되어주는 것이자, 내게 가장 중요한 글쓰기라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그 장치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은, 내가 당장 글쓰기를 마음껏 할 수 없다는 뜻이고 세상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어이 오늘까지 인내심을 시험하던 컴퓨터를 초기화시키기로 결정했다. 자료들을 백업하고 웹하드에 저장하고. 그러다 또 잠깐 매끄럽게 작동하는 지금 문득 글을 하나 쓰고 싶어졌다. 별 일 없는 나의 일상이지만 내게는 다 별 일인 순간들의 기록을 말이다. 


숲을 경작하여 만든 자연 그대로의 모습, 빠스칼네 정원


 엊그제 빠스칼의 정원에 다녀왔다. 엘크가 갑자기 전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양봉을 하는 빠스칼 꿀벌들에게 새로운 여왕벌이 나타나 그날 아침 모든 벌들이 떼로 정원에 모여 있다며 구경하러 오라고 한 것이었다. 바로 뒷집이고 숲과 연결된 정원이기에 문제는 없었다. 오랜만에 가보는 빠스칼의 정원은 역시 편안했다. 우리는 각자가 멀찍이 떨어진 채로 벌들을 구경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수백 마리 벌들의 날갯짓을 바라보자니 새삼 생명의 고귀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빠스칼의 다듬어지지 않는 정원을 지나, 빠스칼의 도끼가 널브러져 있는 오솔길을 지나, 산더미처럼 쌓인 장작더미를 지나 숲길을 헤치고 집에 돌아왔다.

 기쁜 소식은 빠스칼이 그날부터 마스크를 쓰고 외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며칠 전 동네 유기농 마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마스크를 하지 않은 빠스칼에게 내가 단단히 얘기해두었었다. 꼭 써야 한다고. 그랬더니 어제 빠스칼이 마스크를 한 채로 마주친 남편에게 말했다고 한다. "산책이가 꼭 써야 한다고 했다고" 역시 여자 말을 잘 듣는 남자는 언제나 옳다. 한국에서 받은 KF94 마스크는 큰 마트나 사람이 붐비는 곳에 갈 일을 대비하여 아껴두는 중이고 요즘은 친구에게 받은 면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빠스칼이 장작을 패는 도끼. 빠스칼네 정원과 연결되어 있는 집 뒤에 숲길


 빵집 아저씨가 내 마스크를 보더니, 네가 만들었냐고 딱 맞고 너무 좋다고 부러워한다. 자기도 친구가 만들어줬는데 너무 커서 계속 내려온다고. 보니까 정말 코 밑으로 다 내려와 있다. 빵집에서 나오니 온 몸에 문신을 한 예쁜 여자가 나를 한참 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건넨다. "니 마스크 정말 예쁘다. 니가 만들었니?" 나는 우아한 눈웃음을 지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거 한국에서 보내준 거야" 여자는 "와우!" 하며 엄지척을 남긴 채 지나갔다. 일본 친구에게도 전화가 왔다. 일본에서 마스크를 구할 수 없는데 마스크 살 수 있는 한국 사이트를 좀 알려달라고. 마스크 하나 있는 것이 이렇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을 줄이야.

 그나저나 삼시세끼 집밥 모드가 한 달이 넘어가니 슬슬 귀차니즘 모드가 발동하는 중이다. 수제짜장 수제돈가스 정성비빔밥 등은 이제 점점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요 며칠. 아이에게는 수제 샌드위치를 만들어주고 남편은 스테이크를 해주고서 나는 이도 저도 싫으니 라면의 연속이었다. 맛있는라면 비빔면 김치볶음면. 거기에 삶은 계란은 필수. 내일은 오랜만에 밥을 좀 제대로 먹어야지 생각은 하고 있다. 행복했던 건 내가 사랑하는 '블루베리 플렁' 케잌을 통째로 주문해서 이틀 연속 실컷 먹었다는 것!


전혀 달지 않고 매우 촉촉한 입에서 사르르 녹는, 내 맘대로 우리 동네 특산품! 야생 블루베리 플렁

  

 프랑스에는 애석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생크림빵이나 생크림케잌이 없기에, 그와 가장 비슷한 질감의 담백한 크림류의 케잌을 가끔 사 먹는다. 우리 동네 빵집 중 소년같은 미소를 가진 '파트라슈 할아버지'가 만든 플렁은 가히 세계 최고인데, 야생 블루베리를 넣어 만든 것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요즘 같은 날은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아예 살 수가 없었는데 이번 주부터 예약 주문을 받는다길래 냅다 주문을 했다. 원래 한 조각씩 파는 케잌을 통으로 만들어 달라하니 파트라슈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찡긋 미소를 지어 보인다. 할아버지 미소가 이렇게 설렐 줄이야. 언제 꼭 내가 만든 김밥을 갖다 드리고 싶다.  


컴퓨터가 부디 잘 소생하기를 바라며. 모두가 이 시기를 건강하게 잘 나기를 바라며. 이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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