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29화
나는, 툭 건들면 터질 수 있을 폭탄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를 건들면 안 되었었다. 하지만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중년의 불안함이 함께 엄습해버린 남편 역시 폭탄인 것은 마찬 가지였다.
해야 할 말이 있어도, 상의해야 할 것이 있어도, 저녁마다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집에 들어오는 남편과 나는 어떠한 말도 제대로 나눌 수 없을 만큼 남편은 오랜 슬럼프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찬바람이 불고 세금 고지서들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남편은 신경이 잔뜩 곤두선채로 더욱 차가운 공기를 풍겨대었다. 그의 얼굴은 집이라는 공간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한 듯 보였다.
어떠한 견해에 조금만 다른 의견을 내어도 남편은 가끔 불같이 화를 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나는 그러한 대접을 받을만한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큰 눈과 선명한 이목구비는 그때마다 서슬 퍼런 냉혈동물의 그것처럼 느껴져 더이상 보고싶지 않았다. 가을 내내 우리는 언성을 높이며 매우 빈번하게 다투었다. 심지어 아이가 함께 있는 공간에서조차 서로 으르렁거렸고 뱉어내는 말의 수위도 점점 위험해져만 갔다.
"나 아무래도 여기서는 안될 거 같아. 프랑스에서는 내가 도저히 행복할 수 없어"
"그렇게 불행하면 한국 가버려! 혼자 가면 되잖아! 이혼하고 한국 가! 됐지!"
방에 있던 아이가 처음으로 '이혼'이라는 말을 들은 날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더 자주 큰소리로 다투었고 그때마다 이혼 얘기를 뱉어내었으며 아이는 몇 번 더 우리의 그 말들을 듣게 되었었다.
아이 앞에서만큼은 조심했어야 했건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서로는 결국 어리석음을 뿜어내고 말았다.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저 말을 들으며 한편으론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드디어 내게 맞지 않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구나'
그리고 드디어 진짜 폭탄이 날아왔다. 남편과 아이 둘만 어머님 댁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온 아이의 가을 방학 직후였다. 어머님은 남편 손에 내 용돈을 들려 보내셨고 설마 했던 것이 현실로 드러났던 날.
내가 결정적으로 폭발했었던 데에는 '시어머님의 돈'이라는 민감한 문제가 있었다. 언제나 '주는 자'라는 달콤한 권력을 가진 어머님과 반대의 자리에 있던 나. 그것이 감사하면서도 불편했던 나. 어머님이 내게 돈을 주신 이유는 지금까지 내게 돈을 주셨던 이유는, 나에게 '당신의 권력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거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편한 적 없던 어머님 얼굴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그 날 저녁, 남편은 또 나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까지 화낼 이유가 없는데 화부터 내고 보는 남편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함께 있으면 언제나 '불편했었던' 두 사람. 그 두 사람이 나에게 드디어 본성을 드러낸 듯 느껴졌다. 그동안 꼭꼭 숨겨놓은 잔인한 발톱을 꺼낸 듯 그 둘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눈빛과 말투 심지어 상처를 주는 방식까지도 똑같았다. 집에 있는 남편을 볼 때마다 내가 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는 듯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왔다. 나는 더 이상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댁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나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이내 한참을 길 잃은 아이처럼 목놓아 크게 울었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깊은 슬픔을 지나 남편에게 담담하게 이별을 고할 수도 있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기억해냈다. 사실 내가 원한 삶의 형태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남편에게 사랑받고 아이를 기르고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는 것' 그런 것은 처음부터 내가 원한 삶도 아니었고 삶의 목표는 더욱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고 '구속받는 것'을 못 견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사실 '행복'이라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행복해지고 싶다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는 것을. 나에게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는 것을.
단지 나는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과 그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갈 때 차오르던 충만감이면 족했다는 것을. 그저 그러한 순간 속을 살고 싶었다는 것을.
숨을 쉴 수 없었다. 결혼이라는 것이 나를 옥죄는 끔찍한 감옥처럼 느껴졌다. 옴짤달싹 할 수 없는 감옥.
이 감옥은 나가고 싶다고 맘대로 탈출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내가 갇혀있는 이 곳은, 함께 책임져야 할 생명이 있었기에 도망도 갈 수 없는 감옥이었다.
그랬다. 나의 '불행하다'는 느낌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감정이었다. 깨어진 힘의 균형으로 나는 오래도록 욕망의 좌절을 느껴왔고 그것이 '자유를 침해당한 것과 같은 고통'으로 다가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까지 두고 혼자 떠나는 사람들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유를 찾아서' 가는 거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관계에서 행복하지 못함은 '자유롭지 못함'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그것은 성인 자녀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괴로운 것과 같았다.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지만 자녀는 '자유 결정권의 제한과 억압'을 느끼기에 행복하지 않다. 이대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죽은 것과 같았다.
가슴이 답답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한 숨이 나왔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났고 길을 걷다가도 눈물이 났다. 그러다 문득 집 앞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평온한 강 속으로 뛰어들면 자유로워지겠지'
살아있음의 시간들이 이렇게 고통이라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를 향한 '마지막 숭고한 선택'이라 여겨졌다.
어차피 고통에 익숙한 삶. 삶이라는 것에 그리 큰 미련은 없었다.
* 메인 사진 : Ophelia - John Everett Milla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