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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07. 2019

문명인과 자연인.
융화할 수 없는 '우리'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28화 


 언제부턴가 나의 주요 일과는, 꼭 해야 되는 집안일이나 밥 하기 아이 챙기기가 아니면 늘 책상머리에 앉아 불교철학 글귀를 뒤적이고 그에 대해 사유하고 글을 쓰고, 혼자 조용히 앉아 고요한 시간을 보내거나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원래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되도록이면 불필요한 만남을 만들지 않았다.
 
 전에는 뜬구름 같던 붓다의 가르침들이 순간적으로 이해되거나 그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을 때마다 기쁨이 가득 차오르곤 했다. 그렇게 '불행한 현실'이라는 외적인 고통이 커져갈수록 나는 더욱 내면 깊이 거하였고 그 안에서만큼은 내 오랜 숙원에 한 발짝씩 다가서는 '만족'을 누렸다. 

그것은, 나 자신과 이 세상을,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이해하고 싶다는 오래된 열망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내 '현재의 고통'은 외면하였고 의식 안으로 통합시키지 않았었다.

 그렇게 나는 '지혜로 가득한 세계'로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가리고 있었다. 허나 그럴수록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은 커져만 갔고, 나는 점점 현실의 중력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강한 유혹을 느꼈다.
그렇게 한 때는, 이 성가신 속세의 옷을 벗고 훨훨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머물기도 하였다. 자연스럽게 '출가'에 대한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것은 내게 무책임이 아닌 마음 깊은 곳이 가리키는 '단 하나의 꿈'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미 너무 높이 공중에 떠 있었다. 저 밑에 땅이 보이지 않을만큼...
 
그러다 눈을 뜨면, 뾰족하고 딱딱한 것들이 마구 나를 찔러대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나에 대해 체념한 것을 넘어 '보고싶지 않다'는 표정과 눈빛과 말투로 나를 더 차갑게 대했다. 기껏 프랑스까지 데려왔더니, 자기에게는 관심도 없고 집에 처박혀 불교 공부만 하고있는, 한국만 쳐다보고 있는 아내 모습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남편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늘 나에게 '화가 나 있는 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불교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도, 내가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이 싫어지기 전에도, 내가 남편을 미워하게 되기 전에도. 나는 처음부터 그것이 속상했고 마음 아팠었다. '왜 남편은 나만 보면 기분이 나쁠까?' '딱히 내가 뭘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 걸까?'
    

생명의 본성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의 깊고 고요한 눈빛


 처음에는 '둘이 너무 달라서'라 생각했고 살다 보니 '언어와 문화가 너무 달라서'가 추가되었으며 '너무 이성적인 사람이라' 우리는 '상극'인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래전 펼쳐보았다가 이내 묵혀두었던 체게융의 책을 다시 집어 든 순간.
 
 "살아가면서 태도를 일부러 꾸민 사람은 나를 못 견디게 만드는데, 내가 자연인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무의식은 나를 위험한 사람으로 인식한다. 내가 말하는 방식, 웃음 등 나의 모든 것이 그들을 괴롭힌다. 그들이 나에게서 자연을 느끼기 때문이다"
 
 융의 이 말을 다시 본 순간 알았다. 이것이 나와 남편 사이의 '본질적인 불편함'이었다는 것을.
 
 그랬다. 내가 남편을 비롯한 프랑스인들에게서 느꼈던 거부감의 실체는 그들의 방식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들의 방식에 '저항했고' 그들에게 '옳지 않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의 방식을 '위험하다' 말했고 '옳지 않다'라고 했다. 내가 그들의 인위성을 못 견디는 것처럼 그들 역시 나의 자연스러운 방식을 못 견디었던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의 추장을 만나 대화를 나눈 융이 말했다. "이 인디언은 우리의 아픈 곳을 찔렀으며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을 보여주었다" 인디언 추장이 융에게 한 말은 이것이었다.
 
 "백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생겼는지 보시오. 그들의 입술은 얇고 얼굴은 주름으로 접히고 변형되어 있소. 노려보는 그들의 눈빛은 항상 무언가를 찾는 것 같소. 그들이 무얼 찾을 것 같소? 백인들은 항상 무언가를 원한 다오.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가만히 있지를 못하지. 우리는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하오. 그들은 자신들이 머리로 생각한다고 말하죠. 우리는 여기로 생각을 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융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유럽인들은 일정한 잣대와 정해진 목적을 얻은 대신 삶의 강렬함을 희생했음을 깨달았다. 유럽인들은 기술이 있는 미개인이자 지적인 야만인이다"
 
 그가 느끼고 이해한 것은 내가 느꼈고 이해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내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꼈던 지점이 바로, 그들의 '생명력을 존중하지 않는 야만성'이었기에. 
 

자연 그 자체로 사는 사람들.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


 그렇게 나는 비로소 융을 통해, 이 땅에서 겪은 모든 서러움들을 한 번에 보상받은 느낌이 들었다. 
나만 유럽인들을 그렇게 느끼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누구에게도 이해시킬 수 없던 그것을 나는 융에게서 공감받았고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러자 이 땅에서 내가 겪은 모든 것들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오래전부터 세상적인 전파를 차단하고 세상적인 소음을 멀리하며 살았던 한 소녀는, 더더욱 내면으로 침잠하여 '문명적인 것들'을 멀리하며 살고 있던 그 소녀는,
 
어쩌면 '인디언 소녀의 눈이 되어' 이 유럽이라는 문명국을 보고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이 선명해지자 나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만 갔다. 자연 그 자체인 인디언 소녀가, 생명력을 희생하는 문명의 땅에서 계속 살 수는 없었기에. 

 엘라 아빠가 떠올랐다. 아프리카 이름 없는 나라의 예술가였던 엘라 아빠는 백인 프랑스인 아내를 만나 프랑스에 살다가 엘라가 다섯 살 때 혼자 다시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 땅에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이었으면 사랑하는 아이까지 두고 혼자 갔을까. 그것은 그가 '자연인'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엘라 아빠가 떠날 때의 그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누구도 나의 답답함을 이해할 수 없으며 누구에게도 나의 서러움을 이해시킬 수 없는 삶. 외계의 땅에서 외계인들과 섞여있는 이질적이고 불편한 삶.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죽어있는 삶.
 
 어딜 둘러봐도 싸늘하기만 한 '문명인들'의 공기는 나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 주었고 나는, 준비가 돼있었다. 

 문명을 
뛰쳐나갈 마음의 
준비가.




* 융의 말 인용 : '기억 꿈 사상(Memories, Dreams, Reflections)' 원서 p.247-248, 25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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