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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04. 2019

힘의 균형이 무너진 땅.
완벽한 무력감의 지배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26화


 남편과의 냉전 상태는 오래 지속되었다. 프랑스에 오면서부터 달라진 나의 '내적 상태' 그리고 소통에 대한 소외감이 고통으로 이어지며 더욱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게 된 나에게, 너무 다른 남편과의 잦은 다툼은 매우 성가신 어떤 것이었다.
 
 더구나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충돌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편하였기에, 아무리 남편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거슬려도 좀 억울해도, 그때 그때 따지거나 잘잘못을 가리는 것조차 자주 포기한 채로 그 상황들을 넘어가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나의 권리를 제 때 챙기지 않았던 대가. 
 

 남편은 늘 내게 '화'가 나있었다. 이미 일적으로 오랜 스트레스 상태였거니와 아내라고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자기의 관심사나 가족들의 제안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고, 무엇을 묻든 '이래도 흥 저래도 흥'같은 밍밍한 반응을 보이는 아내의 태도를 오래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러한 나의 태도를 남편은 '가족에게 관심 없는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싫어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적인 것에 흥미를 잃었었기에 '이것도 저것도' 재미없는 것일 뿐이었다. 더구나 프랑스의 방식과 그들의 즐거움은 나의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마음은 프랑스인 남편에게는 더더욱 이해받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가 크게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챙기지 않는 자에게 돌아갈 권리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나의 태도는 더욱 '모든 권위를 남편에게 위임한' 결과를 가져다주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가 어머님 댁에 갈 때마다 돌변하는 모습으로 내가 힘든 지점과 같았다. 그렇게,
 
 '아무런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의 초라한 자리를 매번 확인하는 것. 
그것은 결국 내가 이 땅에서 '불행한 느낌'으로 살았던 것에 대한 모든 단서들이기도 하였다.
 

서 있어도 누워 있고 눈을 떠도 눈을 감고 있던 날들  


 일단 우리 집의 권위자는 누가 봐도 남편이었다. 우선 남편은 '돈'을 벌어오는 사람인 걸 넘어, 여기의 시스템을 모르는 아내를 대신하여 모든 행정 업무를 도맡아 했으므로 당연히 통장 관리나 돈 관리는 처음부터 남편의 몫이었고, 가계 재정의 결정권은 언제나 남편에게 있었다. 시댁 가족모임 시댁 가족여행 또한 나는 언제나 '따라주는 자'였을 뿐 가족들이 알아서 다 지휘하고 결정하였다.


 더구나 외벌이인 우리 형편이 뻔한 것을 아시는 어머님은 자주 우리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셨는데, 우리가 한국에 갈 때마다 매번 비행기 티켓 값을 보내주셨고 용돈을 쥐어주시곤 하셨다. 한국 가는 경비가 부담스럽기에, 내가 경제력이 없기에 감사하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늘 우리가 어머님께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불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어머님이 돈을 주시면 받고, 어머님이 원하시는 대로 일주일씩 자주 함께 지내고, 남편이 무엇을 하자면 하고, 안된다면 못하고, 남편이 한국에 보내주면 가고, 안 보내주면 못 가고... 그것은 나를 오래도록 숨 막히게 했는데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였다. 


 이 곳에서의 나의 삶이, '내가 주체가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 땅에서의 내 삶은, '힘 있는 어머님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다가' 인생이 끝날 것 같다는 위기감이 올라왔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더구나 이 곳에서의 나는 일도 없고, 경제력도 없고, 사회적 네트워크도 없고, 가족도 없고 진짜 친구도 없고, 
 
 결정적으로 인간관계의 권력을 가르는데 가장 중요한 '결정권'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나의 경제력의 부재'가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위축되어만 갔다. 남편이 세금 고지서를 받아 들고 신경이 곤두선 채로 나를 대할 때마다, 어머님이 내 앞에서 남편에게 월급이 더 많은 직장을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어머님이 가끔 건네주시는 용돈을 받을 때마다. 
 더구나 프랑스는 맞벌이가 '당연한 사회'였고 '밖에 나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있거나 게으른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프랑스인들은 내가 '집에서 애를 본다'라고 하면 '왜 멀쩡한 사람이 집에서 놀고 있지?'라는 반응을 보였었기에. 그 보이지 않는 압박감들 속에서 나의 '자아존중감'은 땅에 떨어져만 갔다. 
 

땅 위에 서 있을 수 없어 물 속을 헤메이게 된 시간 


나는 
마치 '아무런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것은 다 '내 잘못'인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의 사소한 한마디도 나를 무시하는 듯 들렸고,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남편에게, 어머님에게... 죄책감에 가까운 감정까지 생겨나 나를 괴롭혔던 시간들. 그것들은 말없이 나를 짓누르던, 내가 안고 가야 할 어떤 '바위 덩어리들'이었다. 그렇게 내 마음은 더 작게 수축되어만 갔다. 더 이상 예전의 자신만만하던 나는 없고 '초라하고 무용한' 나약한 인간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 곳은 '나의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의 결정권도 이동권도 제약된 어떤 세계,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한심한 아내로' '걱정스러운 며느리로' '쓸모없는 엄마로' 살아내야 하는 어떤 세계였다. 
 
그러한 내 좌절감의 뿌리는, 나의 삶이 '내'가 아닌 남편과 시댁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그들에게 '과도한 힘이 쏠려있다'는데 있었다. 

 힘의 균형이 무너진 땅. 그것은 계속된 '욕망의 좌절'을 뜻하였고 '완벽한 무력감'을 뜻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양도함으로 맞닥뜨린 당연한 결과였다.  
 

 나에게, 그 모든 좌절과 슬픔을 견뎌내게 해줄 것은 하나 밖에 없었다. 나를 인간 세상으로부터 더 멀리 꺼내어 '안전하게 두는 것' 어떠한 배신도 아픔도 없는 자리로 '가 있는 것' 

나는 더 힘차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모든 것은 꿈이라는 가르침' 붓다가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는 곳으로. 더 멀리. 더 깊이.    




* 메인 그림 포함 모든 그림 : Edvard M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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