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23화
나는 지쳐 있었다. 그들의 '모든 것'에.
그들의 '불편한 전통'에 그들의 '형식을 중요시하는 격식'에 그들의 '가식적인 미소'에. 그들의 '차가운 이성'에 그들의 '논리를 앞세운 논쟁'에 그들의 '틀 안에 구겨 넣으려는 고지식함'에.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나는 안 그래도 별 애정이 없던 이 땅이 더 싫어졌다. 끊임없이 시끄럽게 구는 참새처럼 '끝나지 않는 말장난'을 널어놓는 듯한 이 땅의 사람들이 보기 싫었다. 내가 아는 상식과 보편적인 가치를 왜곡하는 그들의 '억지 논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자유로울 줄만 알았던 교육이 엄격함이라는 '차가운 이성'으로 통제되고, 아이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마저 합리주의라는 '딱딱한 논리'로 흘러가는 세상. 그것이 나 자신을 넘어 내 아이를 '억압'하고 '부자유'로 데려가고 심지어 '고통'을 방치하는 데에까지 일조하였다는 강한 적대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이 땅은, 모두가 상상하는 유토피아는커녕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완강한 거부감이 나를 지배했다.
문명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모든 것. 우아함 예절 지성인 교양인... 그 모든 것들이 다 싫었다.
이러한 것이 지성이고 교양이라면, 이러한 것이 문명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문명이라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그들의 방식과 모습' 앞에 나의 저항감은 깊어만 갔다.
그나마 말이 통한다 생각했던 프랑스 친구들도 저마다의 크고 작은 이유로 실망감을 안겨준 건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역시나 하나로 통했다.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그들의 '지긋지긋한 생각'
그것은 집 안이건 집 밖이건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남편이라고 있는 사람도 프랑스인. 가족이라고 있는 사람들도 프랑스인. 가족 휴가라고 가봤자 소화도 안 되는 밀가루 덩어리들과 고기 덩이들을 꾸역꾸역 먹어야 했고 전혀 편할 리 없는 '그들의 관습과 전통을 그저 따라주어야 했던' 나의 현실,
친구라고 있는 사람들도 프랑스인. 사회적 함의와 보편적인 가치도 프랑스식. 이 땅에서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나의 가치와 철학에 위배되어도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나의 현실이었다.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하고 싫은데, 이국만리 타향에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앞으로도 이 '딱딱한 인간들'과 투쟁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 숨이 나왔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나는 처량하고 외롭고 위태롭기만 하였다.
그러한 감정들이 학교와 같은 '외부 환경'에서만 온 것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바로 옆, 한 공간에서 숨 쉬며 생활하는 남편에게서 시시각각 느껴야 했던 것이었기에 나는 그 모든 '불편함들' 속을 매 순간 살아내야만 했었다.
남편과 나는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나' 할 정도로 '모든 것이 상극'이었다.
먹는 것부터 취향, 생각하는 방식, 유머 코드, 감정을 받아들이는 법, 거기에 극명하게 다른 언어와 문화, 특히 '보편적인 가치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아이의 양육을 비롯한 생활 전반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그 접점을 찾는 것은 언제나 서로를 지치게 하였다.
그나마 둘이 같은 게 있다면 남편도 나도 둘 다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 하나 득이 될 것 없던 그 비슷한 특질은 '너무 다른 생각과 방식'을 서로의 '신경을 긁는 불편함'으로 느껴지게 했고, 우리는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언성이 높아지거나 그새 다툼이 시작되었기에 어떠한 대화도 진지하게 나누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자주 '물'과 '기름'이라는 것만 확인한 채로 서둘러 다툼을 끝내곤 하였었다.
특히 내가 남편으로부터 '좌절감'을 느낀 부분은, 이 땅에 살며 발견하였던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에 대한 적대감'과 닿아있는 지점이었다.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
물론 그것이 나를 편하게 해주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다. 나는 '현실 감각'이 많이 떨어지는 사람인 데다 '경제적 효용'이나 '실용적인 삶' 같은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기에, 남편은 나 대신 '돈'을 벌어왔고 내가 보지 못하는 '실용성'이라는 부분을 앞서 보고 행하고 메꾸어주었다.
그럼에도 작은 것들까지 함께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일상에서 '공감을 받지 못한 채' 늘 차가운 이성의 벽에 부딪혀야 함은 외로운 것을 넘어 내 마음을 아프게 두드리곤 하였다.
나는 지금 당장 어떤 해결책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옮고 그름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해를 받고 싶을 뿐'이었는데, 내 편에 서서 '그랬구나'라는 한 마디를 듣고 싶을 뿐이었는데,
남편은 공감보다는 언제나 '차가운 논리의 잣대'를 들이대었었다.
그리고 대화의 끝에서 자주 나는 '합리적으로 살지 않는 위험한 사람' 또는 '실용성을 무시하고 사는 철부지'가 되어 남편의 한 숨을 감내해야 했었다. 현실 속의 나는 서툴고 느리고 자주 뭘 잃어버리고 사회성 떨어지는 '맹한 사람'에 가까웠기에.
'머리를 비운 채로' 살고있는 나를 이성적인 남편은 '아무 생각 없는 사람' 처럼 느꼈기 때문이었고 '모든 것에 무덤덤함'은 남편에게 '이해할 수 없는 무기력함'일 뿐이었기에. 그렇게 우리는 생김새뿐만 아니라 마음속까지 선명하게 다른 '양 극단'에서 온 성분들이었다.
그러한 남편이 생활 속에서 나와 아이에게 '문명인의 틀'을 들이밀 때마다, 시댁 가족들에게서마저 제국주의자의 무의식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더 '참을 수 없는 혐오감'만이 올라왔고 그것은 점점 프랑스인에 대한 혐오로 프랑스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그것은 이 땅에 살며 그동안 쌓여왔던 모든 불편함과 외로움과 서러움들이 한데 엉겨 만든 매우 단단한 감정이었다. 오래도록 물을 주고 키워왔던 어떤 것.
나는, 나의 그 모든 서글펐던 시간들을 보상해줄 어떤 '선명한 적'이 필요했다.
바로 '프랑스'라는 적. '프랑스인'이라는 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