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Oct 03. 2019

"나는 엄마가 부끄러워"
하늘이 무너진 날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24화 


 우리 아이는 처음부터 엄마인 나와 한국말로 소통을 했다. 어릴 때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와 보냈기 때문에 프랑스말보다 한국말을 먼저 배웠고, 어린이집에 들어가고 잠깐 프랑스말을 더 쓰려고 할 때도 금세 다시 돌아와 '엄마와는 한국말로만 말하는 아이'로 자라주었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여기서 나고 자란 많은 아이들이 '친구들과 다른 게 싫어서' 한국인 엄마와도 불어로만 말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며, 일부러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슨 대단한 교육을 시킨 것은 아니었고 그저 나는 처음부터 마음을 확고하게 먹었었다. 더구나 불어가 유창하지 않은 내가 내 아이와 불어로 소통하는 모습은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도 않았다. 
 
이 땅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이가 한국인의 정신을 간직한 채로 자라나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엄마와 무조건 한국말로 말해야 한다 생각했고 그것만은 아이에게 꼭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엄마를 잘 따라주던 아이를 보며 고마웠고 기특했고 뿌듯했다. 프랑스 엄마들조차 자연스럽게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아이를 보며 부러워하곤 했었기에. 이 땅에서 내 아이가 나와 한국말로 함께 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었었기에.
 
 한국인의 입맛을 길들여 주기 위해서도 노력했었다. 어릴 때부터 백김치, 물김치, 양파장아찌 등을 담가 먹였고 된장국 미역국 나물들을 해서 먹였다. 그렇게 아이는 프랑스식 조리법보다 한국식 조리법을 선호할 만큼 한국음식을 정말 좋아했고 한국에 가는 것을 너무 좋아했고 한국을 좋아했다. 
 
 그렇게 한국에 관한 것은 언제까지나 순탄할 줄만 알았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삶은 나를 거기로 데려갔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엄마, 이제 학교에 나 데리러 왔을 때 한국말 하지마" 한국에 거부감이 없고 한국의 모든 것을 다 좋아했던 아이였기에 순간 서운했지만 이내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이는 덧붙여 말했다. "아니, 이제 학교에 자주 오지 마" 이 것까지는 괜찮았다.
 
 며칠 후 학교에 데려다주는 나를 아이가 굳은 얼굴로 앞서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뒤따라가며 같이 가자 말했으나 아이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로 내 손을 뿌리치며 혼자 앞서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에게 아이가 무언가를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 "엄마... 나는 엄마가 부끄러워" 

 순간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왜 그렇게 느꼈냐는 나의 말에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는 프랑스 엄마들처럼 프랑스말 잘 못하잖아. 그러니까 학교 오지 마" 
 
 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하늘이 무너진다'는 느낌이 무언지 알 것 같았다. 내 삶의 가장 큰 위로이자 낙이자 하나뿐인 희망같은 내 아이가 나를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안 그래도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던 내게 아이의 차가운 태도는 나를 낭떠러지에서 밀어버린 것과 같았다.
 
 절벽에서 떠밀린 나에게 뒤이어 잔인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초등생이 되자 매일 학교 숙제가 있었던 아이는 숙제할 공책을 꺼냈고 장기출장이 잦았던 남편은 여느 때처럼 출장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저녁이었다. 아빠가 짐가방을 챙겨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자마자 아이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빠가 없으면 나는 숙제는 어떻게 해..." 

 그 정도는 엄마가 다 도와줄 수 있는 거니 걱정 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아이 머릿속에서 이미 엄마는 '프랑스말을 완벽하게 할 수 없으니 학교 공부를 도울 수 없는 사람'이었을 뿐. 남편이 돌아온 후에도 아이의 이러한 상태는 오래 계속되었다. 아이는 아빠에게만 숙제를 도와달라고 말했고 엄마인 나는 아빠가 '부재할 때에만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내 아이가 나를 밀어내던 그 순간. 나의 심장은 멈췄다.


 설상가상으로 학교에 도우미 엄마로 갔던 어느 날, 아이와 같은 반의 한 남자아이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놀렸다. "중국년이래요~ 중국년이래요~" 우리 아이를 포함한 학급의 모든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이 얼굴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우리 아이가 그 순간 어떤 마음일지는 너무 뻔했기에. 

다음날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그 부분에 대해 확실히 얘기하고 현재 아이가 엄마에 대해 어떤 마음 상태인지를 말씀드렸다.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그리고 아이와 이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한참 후에야 아이는 내게 말해주었다.  
 
 "사실은... 엄마가 학교 왔을 때, 친구들이 엄마 발음이 이상하다고 웃었어"
 
 그런 이유가 있었을 거라 짐작했었다. 아이가 그토록 예민하게 나를 거부했었던 데에는. 아이는 친구들이 엄마에 대해 얘기하며 웃었을 때 '엄마를 놀리는 듯한 그 느낌'이 불쾌했을 것이고 슬펐을 것이고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엄마에게 화가 났을 것이다.
 
 아이에게 그런 경험을 갖게 해 주었다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처음으로 내가 말공부를 열심히 안 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감정들보다도 더 강하게 나를 짓눌렀던 것은 서러움이었다. 내가 어쩌다 자식에게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가 라는 서러움. 너마저 나를 밀어내면 나는 정말로 갈 데가 없다는 서러움...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이미 '사랑하는 엄마를 밀쳐내기로' 마음먹었고, 그것이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모순된 마음 안에서 아이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한번 무너진 나의 마음은 쉬이 평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지쳐있었고, 이 땅의 모든 것들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그렇게 내 마음은 세상에 대한 분노로 탁해져만 있었기에. 
 



* 메인 그림 포함 모든 그림 : Edvard Munc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