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는 멋지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그때 ‘멋지다’라는 말은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벌컥 들이켰다가 이는 거북함 같은 것이었고, ‘예쁘다’라는 말은 내 방문에 다정하고 낮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밖에 있는 당신이 누굴까’하고 드는 기대감 같은 것이었다.
스스로 옷을 골라 입던 열 살 넘을 무렵 새 옷을 고를 최초의 기회가 주어졌다. 아빠가 인터넷으로 주문 중이었는데 리바이스 티셔츠를 하나 고르라고 했다. 흰색,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들이 있었겠지. 하지만 마음에 들어온 건 연한 분홍색. 한편으론 ‘분홍색은 여자색’이라 고정된 시선의 반발심이기도 했다.
그때는 리바이스가 의류 역사에 얼마나 굵직한 획을 그었는지 몰랐고, 티셔츠 등판에 적힌 ‘Levis’를 ‘레비스’라고 읽었다. 그저 분홍색이어서 줄곧 입었다. 그 티셔츠를 볼 때나 입었을 때 어떤 산뜻함과 흥미진진함, 부드러움이 공존했다.
분홍색을 선택함에는 뜻밖에 타인의 관심과 옹호도 있었는데. 나를 좋아해 준 같은 학년의 여자아이가 내일은 어떤 옷을 입을 건지, 오늘 입은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와주면 안 되냐고 문자로 물어왔다.
어떻게 답장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입을 옷은 내가 고르고, 만약 내가 내일 그 티셔츠를 입고 가더라도 그건 내가 좋아서 입은 거지 너 좋으라고 입고 나간 게 아니다’를 숨기고 또 숨기고 순화시켜서 전송했을 거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결국 다음날 그 티셔츠를 입고 학교에 갔다는 거. 그 애가 내심 하루의 믿음으로, 나와의 내밀한 약속—나의 동의 없는—으로 여겼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는 거. 나는 그 표정을 딱히 신경 안 쓰는 척했지만, 괜스레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