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실 멋 내는 게 좋아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슬쩍슬쩍
그런데 누가 멋 냈느냐고 물어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내가 왜 그러는지
내가 왜
.
.
.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옷이나 그런 거 별로 관심 없는데요
― 이랑의 노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 中 ―
사춘기 시절, 마음에 들지 않는 옷차림으로 밖을 나가는 게 정말 싫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차림에는 갖은 이유가 있었다. 원단이 피부에 닿을 때 까끌까끌하다. 움직이기 불편하다. 색감이 안 맞다. 상의와 하의의 실루엣이 조화롭지 않다. 옷은 어울리는데 신발이 이상하다. 바지와 신발은 어울리는데 양말이 따로 논다. 가짓수가 몇 없는 내 옷으로는, 조합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일찍 통달했다. 엄마와 아빠 옷장까지 열었다. 방구석 패션쇼를 하며 거울 앞으로 여러 번 오가기 일쑤였다. 가관이었다. 그 고생을 감수한 이유는 이것저것 입어 보는 일이 재밌기도 했거니와, 마침내 내 옷을 입은 느낌이 들었을 때 무척 흡족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옷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부러 티 내지 않았다. 그 이유에는 글을 쓰겠다는 자의식이 한몫했다. 도서관을 밥 먹듯 드나들었고 마음에 든 시를 공책에 필사해두는 학생이었다. 그때 내게 글과 옷은 다른 것이었다. 글은 보이지 않는 영역을, 옷은 보이는 영역을 다룬다. 글에는 심안이, 옷에는 육안이 쓰인다. 거리가 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티 내지 않는 걸 넘어서 옷에 대해 의심도 했다. ‘옷이 날개다’라는 말을 직접 체감했기에 더욱 그랬다. 만약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이 옷을 잘 차려입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옷만 잘 차려입는다면? 그 질문은 옷을 ‘속물적인 물건’이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눈속임에 넘어가도록 꾀는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은연중에 ‘옷을 입기 전에 사람이 되자. 사람으로서 완성된 다음 갖춰 입자. 그때도 늦지 않다.’하고 생각했다. 동시에 길거리에서 멋있게 입은 사람을 마주치면 몰래 뒤돌아봤다. 도서관에서 이따금 스트리트 패션 사진집을 빌려 보며 감탄했다. 옷과 거리를 두려 하면서도 옷에 관한 관심은 커가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입장이 됐다.
그런 청소년기를 지나 군도 다녀오고 복학했을 무렵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강렬한 차림새여서 인상착의를 설명하면 이름은 모르더라도 누구나 ‘아, 그 사람’하고 대답했을 법했다. 그 친구와 나는 스타일은 달랐지만, 옷을 좋아하는 건 티가 날 수밖에 없었는지 결국 말을 트게 됐다.
우리는 언제부터 옷을 좋아해 왔는지 예전 모습을 보여주었다. 각자의 거처에 놀러 가 옷장을 구경하고 궁금한 건 입어보기도 했다. 함께하는 방구석 패션쇼였다. 학교 근처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제 옷을 구경하기도 했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은 무엇인지, 멋이라는 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남이 듣기에 시시콜콜한 것부터 간지러울 것까지 얘기를 나눴다. 그 친구도 나처럼 옷을 좋아했지만 그 사실에는 당당했다. 차츰 느꼈다. 내가 눈치 보며 좋아했던 것을 드러내도 무해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어떤 의심이나 계산 없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첫눈 같은 느낌을.
무해한 첫눈 속에서 사춘기 시절을 돌이켜본다. 글은 보이지 않는 영역을, 옷은 보이는 영역을 다룬다고 여겼던 건 터무니없었다. 좋은 글은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나왔다. 머리보다는 몸으로 쓴 글이 눈길을 오래 끌었다. 좋은 옷은 지어지기 전에 착용자의 생활을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 배려는 육안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글과 옷은 꽤 가까울 수 있다. 그리고 인격이 완성된 다음 입을 수 있는 옷 같은 건 없었다. 인간은 미완이다. 책을 읽을수록 그랬다. 성인으로 불리는 공자나 소크라테스도 부족한 인간적 면모를 보였다. 그렇다면 미완을 받아들이고 내가 정의하는 옷을 즐기며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육안과 심안을 함께 닦아가며. 끝으로 무엇보다,
나는 사실 멋 내는 게 좋다.